▲ 장성 신촌마을의 무인가게 내부. 마을 주민들이 서울에서 온 기자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 ||
서울 용산역에서 새벽열차를 타고 장성역으로 갔다. 세 시간의 여정 후 역에 내려서 본 하늘은 시릴 만큼 파랬다. 북하면사무소에서 알려준 대로 군내 버스를 타고 신촌마을로 향했다. 군청소재지를 벗어나자 잔설을 머금은 산들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니 가게와 노인정이 나란히 볕 좋은 곳에 자리해 있었다.
“어서 왔소? 날도 춥은디 얼른 들어와.”
마을주민 정한도 씨(76)가 맑게 웃으며 친손자 반기듯 낯선 기자를 맞았다. 무인가게 안은 따뜻했다. 싱크대 선반에는 그릇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가스레인지 위에선 큰 주전자가 연신 하얀 김을 뿜고 있었다. 선반 곳곳에는 비뚤배뚤한 글씨지만 제품명과 가격까지 꼼꼼하게 적은 종이들을 붙여 놨다. 얼마 전엔 주민들과 길손이 잠시 몸을 녹이고 갈 수 있게 헌 소파와 탁자도 들여놓았다. 시골가게란 생각보단 이웃집 응접실 같은 편안함이 느껴졌다.
사실 2005년 3월 이전까지 무인가게는 ‘유인가게’였다. 따로 사람이 가게를 관리했다. 그런데 주인이 서울로 떠나면서 가게도 문을 닫았다. 당장 물건을 구하려면 읍내까지 나가야 할 판이었다. 그러던 중 마을 이장 박충렬 씨(47)가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냈다.
마을주민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네댓 평 남짓한 작은 가게에 과자와 음료수, 라면과 소주, 세제 등을 사다 놓았다. 그리곤 각자 알아서 필요한 물건을 가져가고 ‘돈통’에 돈을 넣기로 했다. 사정이 급한 사람을 위해 외상장부까지 만들어놓았다. 앞으로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장부에 적어놓도록 했다. 이게 바로 무인가게의 시작이었다.
주민 김장원 씨(52)가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김 씨는 화폐교환기에 5000원권 지폐를 넣어 1000원권과 100원짜리 동전으로 바꾼 뒤 물건 하나를 집어 들고는 나무 돈통에 값을 치렀다. 그러고 보니 무인가게에 ‘동전 비눗갑’ 대신 화폐교환기가 등장한 것은 큰 변화다. 예전엔 비누 두 개가 들어가는 비눗갑에 동전을 잔뜩 넣어놓고 잔돈을 바꿔가도록 했다. 하지만 1만 원권이나 5000원권 같은 ‘고액’ 지폐로 셈을 하려면 불편했다. 그래서 도입된 게 바로 화폐교환기였다. 이를테면 양심과 편리함이 만난 셈이다.
사실 무인가게에도 ‘시련’은 있었다. 재작년 겨울 좀도둑이 극성을 부렸다. 처음엔 동전을 집어가더니 라면을 박스째 들고 가기도 했다. 궁리 끝에 가게에 CCTV를 설치해 놓았다. 무인가게가 아니라 감시 가게가 되자 우선 주민들의 맘이 편치 않았다. 외지인의 소행이 분명했지만 마을 인심이 사나워질까봐 걱정도 됐다. 결국 이장 박 씨와 마을 어르신들이 의논을 한 끝에 며칠 만에 CCTV를 떼기로 했다. “이것이 어떤 가겐디… 우리들 맴 같은 것인디….” 없어지는 물건보다 더 소중한 것을 지키기로 했던 것이다.
▲ 가게 안 장부에 적힌 글귀들. | ||
가게 한켠의 장부를 들여다보니 물건 하나 사고 출석 도장 받듯이 한 줄씩 남기고 간 사연들이 빼곡했다. ‘은혜엄마 당일 입금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외상값 조만간 갚겠습니다(삼천원)’ ‘돈 어디다 두고 가는지 한~참 헤매다 가요. ㅜ ㅜ’….
요즘 무인가게의 인기 상품은 사발면과 소주다. 장부를 보면 신촌마을 주민들의 삶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사람 좋은 배 씨 아저씨는 함께 어울려 마실 술을 자주 찾고 칠순의 할머니들은 손주 주려고 과자를 집어간다. 추운 겨울 사발면 한 그릇은 몸을 녹이는 데 그만이다.
읍내에 나가 물건을 떼어 오고 가게 뒤치다꺼리하는 것은 이장 박 씨의 몫. 아무리 양심껏 계산한다지만 손해 보는 때도 종종 있을 법하다. 하지만 그의 얘기로는 무인가게는 ‘남는 장사’다. 작년의 경우 운영수익이 400만 원 가까이 됐다고 한다. 다달이 적게는 20만 원에서 많게는 30만 원대까지 수익을 냈다. 매월 이 가운데 10만 원은 노인정 운영하는 데 보태고 또 몇 만 원씩은 마을 독거노인(9가구)과 소년소녀가장(1가구)에게 보낸다고 한다. 남은 돈은 모아서 지난 연말 장성군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냈다. 마을주민들 그리고 수많은 길손들의 양심 셈법이 따뜻한 온정으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서울서 기자양반 오셨응께 내 이참에 헐 말 허야것쏘.” 가만히 듣기만 하시던 최만례 씨(76)가 입을 열었다.
“우리 새 대통령도 도시 같은 데나 신경 쓸랑가 몰라도 시골서 사는 늙은 사람들한테도 신경 좀 써줘야지. 전에는 장에 만 원 한 장만 들고 가도 살 것이 많았는디 인젠 몇 개 못 사요. …(이 가게가) 좋은 길로만 나가야 허는디 못 퍼져 나갈까봐 걱정되지. 부락민들이 다 마음적으로 합심해서 하는 것인디.”
지난 3년 동안 무인가게는 덩치가 커졌다. 처음엔 서너 평이던 걸 확장해서 이젠 열 평 가까운 크기가 됐다. 하지만 가게의 규모만 커진 건 아니다. 무인가게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전국에 제2, 제3의 무인가게들이 나타났다. 어찌 보자면 신촌마을 무인가게의 ‘지점’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짧은 겨울해가 산등성이에 걸렸다. 무인가게 옆 노인정에서 저녁상을 차리던 아주머니들이 “올라갈 때 차 안에서 꼭 드시오”라며 쌀강정과 곶감 몇 알을 정성스레 봉투에 담아준다. 정겹게 웃으며 손 흔들어주던 주민들의 모습은 마을 산천을 닮아 있었다.
장성=김동욱 인턴기자 sigfri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