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역 고등법원 판결록 3권. | ||
그렇다면 1세기 전쯤에는 어땠을까. 그 시절에도 한반도에서 그토록 많고 다양한 사건들이 일어났을까.
얼마 전 법원도서관(관장 민일영)이 발간한 <국역 고등법원 판결록>(3권)을 살펴보면 당시에도 복잡다단한 사건들이 비일비재했음을 알 수 있다. 사기꾼에게 골탕 먹은 친일파 거두에 얽힌 사건이 있는가 하면 놀랍게도 방화를 이용한 보험사기극까지 등장한다.
이 판결록은 대한제국 대심원 및 통감부·조선총독부 고등법원의 민·형사 판결이 수록된 총 30권(1909~1943년·법원도서관 소장본)의 자료집 가운데 일부 기간의 판결문을 한글로 번역한 것. 당시 조선총독부 고등법원이 선고한 민사 판결 154건과 형사 판결 75건이 수록돼 있다(고등법원은 일제강점기 시절의 3심 법원으로 현재의 대법원에 해당한다). 당시 우리 선조들의 생활상과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몇 가지 흥미로운 사건의 앞과 뒤를 따라가봤다.
▶꼼수에 당한 친일파
우선 대한제국 말기의 대표적 정치인 중 하나인 박영효가 소송 사기를 당한 사건이 눈에 띈다.
박영효는 1884년 개화파 김옥균과 함께 갑신정변을 주도한 뒤 정치적 우여곡절을 겪다가 일제강점기에 후작 작위를 받으며 친일행각을 벌인 인물.
사건은 박영효가 일본에 망명 중이던 1906년 2월경부터 1907년까지 안 아무개 씨로부터 수회에 걸쳐 8500원을 빌린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당시의 1원은 금 두 푼을 살 수 있던 돈으로 최근의 금값과 단순비교하자면 현재의 2만 원 정도.
1907년 박영효는 오랜 망명생활 끝에 귀국해 궁내부대신(宮內部大臣)에 임명돼 정치적 재기를 하는 듯했다. 그러나 얼마 뒤에 고종의 양위에 앞장선 대신들을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아 1년간 제주도에 유배되기도 했다. 조선에 돌아온 후에도 안 씨에게 거금을 갚을 만한 처지가 못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하루아침에 박영효의 신세가 펴진다. 친일세력들에 대한 일제의 회유정책 덕분에 8만 원 상당의 은사공채증서를 하사받게 된 것. 이에 박영효는 같은 해 12월 31일 안 씨를 집으로 불러 빚 8500원을 모두 갚았다.
친일파에 대한 응징 심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거액의 공채증서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을까. 당시 안 씨는 한 가지 꼼수를 부린다. 고향에 서류를 두고왔다고 거짓말하며 박영효가 써준 채권 증서를 돌려주지 않았던 것.
그로부터 1년여 뒤 안 씨는 채권 증서를 증거 삼아 경성지방법원에 대여금 8500원 및 이에 대한 연 20%의 지연이자를 돌려달라는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다음해 소송에서 패한 박영효는 안 씨를 경무총감부에 사기혐의로 고소하게 된다.
하지만 안 씨로부터 돌려받지 못한 채권 증서가 결국 발목을 잡았다. 경무총감부는 박영효에게 ‘빌린 돈 8500원을 전부 갚는 대신 안 씨에게 화해금 명목으로 6800원만 지불하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이미 돈을 갚은 박영효는 억울했지만 울며 겨자 먹기로 안 씨에게 6800원을 건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결국 소송사기 수법이 밝혀져 안 씨는 사기죄로 기소된다. 이 사건으로 안 씨는 1심과 2심에서 유죄를 받았지만 이에 불복해 고등법원에 상고를 했다. 안 씨는 “6800원을 지급받은 것은 민사판결의 집행에 따른 것이 아니라 화해계약에 따른 것이므로 사기죄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주장했지만 고등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사건은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채무 관련 사기사건과 유사한 사례. 당시 일제로부터 귀족의 지위까지 받은 ‘권세가’ 박영효가 이러한 소송사기사건에 휘말렸다는 점이 흥미롭다.
‘장모를 때린 사위의 행동은 이혼 사유에 해당된다’는 판결도 눈에 띈다. 흔히 그 시절을 아내에게 손을 대는 게 묵인되던 시대로 착각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때에도 남편의 폭력은 분명 ‘유죄’였던 것.
경성에 사는 김 아무개 씨는 아내 박 아무개 씨와 부부싸움을 하던 중 이를 말리던 장모 홍 아무개 씨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이에 박 씨와 홍 씨가 부상을 당했지만 김 씨는 신경 쓰지 않고 흙발로 처가의 거실로 뛰어 들어가 몽둥이로 살림살이를 부셨다. 이로 인해 김 씨는 구류 7일의 즉결처분을 받는다. 하지만 법도 그의 못된 버릇을 고치지 못했던 것 같다. 구류를 살고 나온 뒤에도 김 씨는 박 씨와 장모 홍 씨에게 폭력을 휘둘렀던 것.
남편의 폭력을 더 이상 참지 못한 아내 박 씨는 결국 이혼소송을 청구했고 법원은 박 씨의 손을 들어주었다. 당시 고등법원은 “남편이 부인의 가족들을 구타하거나 부상을 입히는 등의 행위를 하고 학대를 가하였을 때에 부인은 그것을 이유로 남편에 대하여 관습상 이혼을 청구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판결문에 “예로부터 조선에 전해오는 말에 ‘가정싸움은 칼로 물을 베는 것과 같아서 잠시 후면 그친다’고 하는 격언도 있다…”는 내용이 포함된 대목.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속담이 당시에도 흔히 쓰이고 있었음을 짐작케 해준다.
▶대체 땅주인은 누구
폭우로 인해 하천 연안의 토지가 유실되고 다시 생기는 현상 때문에 빚어진 소유권 분쟁도 눈에 띄는 사건. 신의주에 살던 김 아무개 씨는 26년 전 홍수로 아버지가 소유했던 강가의 토지가 침수돼 사라지는 불행을 당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 같은 장소에 흙이 쌓여 다시 토지가 생기자 그 땅이 자신의 소유임을 주장하며 그곳을 새로 관리하고 있던 이 아무개 씨와 소유권 다툼을 벌였다.
김 씨에 따르면 아버지가 제3자에게 돈을 주고 산 땅이 오래 전 강이 범람했을 때 사라졌지만 시간이 흘러 흙이 쌓이면서 땅이 다시 생겨났다는 것. 아버지가 죽으면서 자신에게 재산을 물려줬기 때문에 새로 생긴 땅은 당연히 자신의 소유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고등법원은 “조선에서는 하천연안의 토지가 홍수로 인하여 함락하고 그후 동일 장소에 토지가 형성된 경우 또는 한쪽 변에서 토지가 된 경우에는 기존 함락지의 소유자가 새로 생긴 토지의 소유권을 취득하는 관습이 있음을 인정한다”며 김 씨의 손을 들어줬다. 하천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아 폭우나 홍수로 인해 토지의 침수와 유실이 잦았고 이로 인해 소유권 다툼도 자주 빚어졌던 당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다.
지난해 6월 30일부터 국내에서 시행된 ‘이자제한법’과 비슷한, 그 시절의 ‘이식제한령’과 관련된 판결도 주목할 만하다. 고리사채에 대한 민원이 많았기 때문인지 1911년 조선총독부는 ‘이식제한령’을 내려 사채의 이자율을 엄격히 제한했다. 이 법령에 따르면 원금이 100원 미만일 때 이자율은 연 30% 이하, 100~1000원 미만은 연 25% 이하, 1000원 이상일 때는 연 20% 이하로 제한됐고 이를 초과하는 부분의 계약은 무효로 인정하도록 했다.
사건은 통영에 사는 신 아무개 씨가 탁 아무개 씨에게 사업비로 1040원을 빌려 주면서 비롯됐다. 신 씨는 탁 씨가 일부 원금을 갚아 빚이 1000원 이하가 되자 연 25%의 이자를 새로 책정했는데 탁 씨가 이 빚과 이자를 안 갚다가 송사를 당했다. 당시 탁 씨는 자신이 신 씨로부터 빌린 돈이 약 601원에 불과하다며 해당액만 갚겠다는 주장을 폈다.
일단 고등법원은 여러 증인의 진술 등을 토대로 신 씨가 탁 씨에게 빌려준 원금이 1040원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신 씨가 연 25%의 이자를 책정한 것은 무효라며 ‘이식제한령’에 따라 연 20%의 이자와 남은 원금만 받으라고 판결했다. 당초 계약 원금이 1040원이고 그후 계약이 변경된 사실이 없으므로 이후에 돈을 일부분 갚아 원금이 1000원 이하로 떨어졌다 하더라도 빌린 원금의 이자율(20%)에 해당하는 이자만 받는 게 합당하다는 의견이었다.
지난해부터 시행된 현재의 ‘이자제한법’은 10만 원 이상의 돈을 빌릴 때 최고 연 이자율을 30%(등록 대부업자 49%)로 제한하고 있다. 약 100년 전의 ‘이식제한령’과 비슷한 수준인 셈이다. 비록 일제강점기 때의 법령이지만 이미 그 시절에 고율의 사채로부터 서민들을 보호하는 법령이 만들어졌음을 감안하면 너무 뒤늦은 법 제정이 아닐 수 없다.
▶남포등 깨뜨린 이유
대체 보험사기극의 뿌리는 얼마나 깊은 것일까. 이번 판결록을 통해 일제강점기 초기에도 보험이 존재했고, 보험의 허점을 노린 사기극까지 벌어진 사실이 확인됐다.
1910년대의 어느 날 옛 가마터에 자리 잡은 창고에서 불이 나 물건이 전소되는 사고가 발생한다. 당시 창고를 운영하던 정 아무개 씨와 또 다른 동업자에 따르면 건물에 걸어둔 남포등의 줄이 끊어져 등이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건물에 불이 옮겨 붙어 창고 안의 술들이 다 탔다는 것. 당시 이 창고는 풍국화재보험회사 등에 보험이 가입돼 있었는데 일단 ‘남포등의 추락으로 인한 화재’로 인정돼 정 씨 등은 2750원의 보험금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뒤 정밀하게 현장을 조사한 결과 정 씨 등의 사기극이 들통 나고 만다. 당시의 화재가 정 씨 등이 보험금을 노리고 일부러 남포등을 바닥에 깨 벌어진 것으로 판명된 것. 방화 및 사기 혐의로 기소된 정 씨 등은 1심과 2심 재판에서 징역형을 받자 상고를 했지만 고등법원은 이들의 범죄 혐의가 인정된다며 상고를 기각했다. 아마도 정 씨 등이 바로 조선 최초의 보험사기범이 아니었을까.
한편 일제강점기 시절 고등법원 판결록을 보면 조선 관습법이 유독 많이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른 가문의 성을 가진 자를 양자로 들일 수 없는 것은 조선에서의 고래의 관습이다’, ‘조선에서는 태어나면 상속권을 갖게 되었고 남자일 경우에는 태아 때부터 이미 출생한 것으로 간주하고 상속권을 갖는 관습이 있다’는 것 등이 대표적인 예.
실제로 법원에 제기된 소송 중에서 관습법과 관련된 사항이 있으면 조선관습법을 기준으로 삼아 판결을 내린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비록 당시가 한일합방 이후 수년이 흐른 뒤지만 여전히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과 동화되지 않고 고유의 생활을 이어갔으며 법원도 이러한 부분을 상당 부분 인정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이윤구 기자 trus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