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비열한 거리>의 한 장면. 조폭들은 군대보다 더한 상명하복의 규율을 위해 후배들에게 잔인한 폭력을 휘두른다. | ||
청주지검 형사2부(부장검사 정연복)는 지난 2월 17일 조직의 기강 확립을 위해 후배 조직원들을 집단 구타한 혐의(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등으로 청주지역 폭력조직 파라다이스파 조직원 김 아무개 씨(30) 등 11명을 구속기소했다고 밝혔다. 또 해외로 도피한 조직원 연 아무개 씨(29) 등 17명에 대해 같은 혐의로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신병확보에 나섰다고 전했다.
검찰은 이들 조직폭력배들 사이에 ‘단지’의식이 벌어졌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수사에 착수해 결국 사건의 전모를 밝힐 수 있었다. 조직 내 기강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손가락까지 자르는 잔인한 조폭들의 이야기를 뒤쫓아 가보았다.
검찰에 따르면 청주 시내에는 파라다이스파(244명)와 시라소니파(221명), 화성파(243명) 등 3개의 폭력조직이 오래 전부터 뿌리를 내리고 서로를 견제해왔다고 한다. 이들 조직은 아직까지도 이권 확보를 위해 무력충돌까지 불사할 정도로 세력다툼이 치열하다는 것. 이런 와중에 조직 간 싸움으로 유혈사태까지 종종 벌어져 검찰이 이들을 예의 주시해왔고 결국 단지 사건도 수사망에 포착됐다고 한다.
사건의 발단은 파라다이스 조직 내 9기 조직원 A 씨(30)와 10기 후배 조직원들 간의 불화에서 시작됐다. 검찰에 따르면 A 씨는 평소 조직 내에서 후배들에게 독재자처럼 행동해 원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이에 10기 조직원 중 연 씨 등 세 명이 2006년 10월 중순경 A 씨를 불러내 ‘후배들의 불만이 심하다. 당신이 조직을 떠나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조직을 그만두겠다’며 하극상의 행동을 했다는 것. 당시 암흑가에선 연 씨 등 세 명이 A 씨를 집단 구타했다는 소문까지 떠돌기도 했다고 한다.
연 씨 등의 ‘집단행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조폭세계에서 결혼식과 같은 경조사는 조직원의 단합과 인맥 확보, 세 과시 등을 위해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는 행사 중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 씨 등은 A 씨에 대한 반발심으로 조직의 후배들에게 연락해 그 무렵 있었던 15기 조직원의 결혼식에 ‘10기 아래로는 아무도 참석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고 한다. 당시 결혼식에 참석한 9기 이상의 선배 조직원들은 후배들 중 10~12기까지의 핵심 멤버 들이 보이지 않자 조직 내에 흐르는 이상한 낌새를 알아채게 된다. 이들은 이내 9기 조직원들을 추궁해 연 씨 등이 ‘하극상’을 벌인 사실을 파악했다.
하극상 문제가 조직 내부에서 불거지자 A 씨의 9기 동기인 김 씨가 직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섰다고 한다. 단지 사건이 처음 불거진 것도 바로 이 과정에서였다. 검찰 관계자는 “조폭세계에서 조직원들의 기강 관리는 군대의 그것을 초월할 정도”라며 “그러한 분위기에서 하극상이 이루어졌으니 선배들이 가만히 있지 않은 것이다”라고 밝혔다.
김 씨는 훗날 검찰 조사에서 당시 단지 사건에 대해 “2006년 10월 16일 연 씨를 불러 훈계를 했지만 말을 듣지 않아서 홧김에 내가 운영하던 포장마차에서 새벽에 식칼로 내 왼손 새끼손가락을 내리쳤다”며 “손가락은 청주 인근 저수지에 버렸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검찰은 김 씨가 평소 후배 조직원 연 씨를 많이 아꼈기 때문에 그 책임을 지고 7~8기 선배들 앞에서 속죄의 ‘단지’의식을 거행했다는 내용의 첩보를 입수한 상태였다. 실제로 병원 기록 등의 객관적 증거자료도 김 씨의 진술 내용과는 전혀 달랐다. 2006년 10월 16일자 청주시 모 병원의 진료 차트를 보면 김 씨가 보호자와 함께 절단된 새끼손가락을 들고 왔지만 그가 봉합수술을 극구 거부해 손가락을 다시 가지고 간 것으로 기록돼 있다.
▲ 새끼손가락을 잘라 후배들의 잘못을 대신 속죄한 김 씨의 엑스레이 사진. | ||
하지만 김 씨의 경우가 단지 사건의 끝은 아니었다. 손가락을 자른 엽기적인 사건이 4일 후 또다시 발생하게 된다. 그해 10월 20일 ‘하극상’의 주역이었던 연 씨도 자신의 왼쪽 새끼손가락을 잘랐던 것. 검찰에 따르면 연 씨는 직속선배 김 씨가 자기 때문에 손가락을 자르게 되자 미안한 마음에 단지를 한 것으로 전해진다. 평소 연 씨가 자신을 아끼던 선배인 김 씨를 많이 믿고 따랐다는 설명이다. 결국 그도 봉합수술을 거부했고 김 씨처럼 왼쪽 새끼손가락의 절반이 절단된 상태로 생활했다고 한다.
두 조직원의 ‘단지’만으로는 문란해진 조직 기강이 확립됐다고 생각하지 않은 선배 조직원들은 10월 20일 저녁 청주시 상당구 용암동에 위치한 한 PC방으로 조직의 기강을 확립한다는 명목으로 후배 조직원 23명을 불시에 소집했다. 이들 선배 조직원들은 “조직생활을 잘 하라”며 후배 조직원들 중 17명을 알루미늄 야구방망이로 수십 차례 폭행했다. 그리고 다음날 오후 3시경 청주시 상당구에 있는 한 공원으로 이들 23명을 다시 소집해 거듭 ‘훈계’를 한 것으로 밝혀졌다. 선배가 후배를 소집할 때 ‘왜’라는 토를 달지 않는 것이 그들 세계의 불문율이기에 선배들의 소집 명령에 현역으로 활동하는 후배들 대부분이 ‘훈계 의식’을 치러야 했다는 후문이다.
검찰은 이번 사건으로 구속된 파라다이스파 8기 조직원들로부터 7기 선배들이 ‘집단구타’를 지시했다는 진술을 확보하고 해당 조직원들을 체포하기 위해 계속 수사를 벌이고 있다.
사실 자신의 손가락을 자른 조직원 김 씨는 이번 사건 말고 다른 폭력사건으로 이미 2007년 8월경에 구속된 상태였다. 다른 조직과의 패싸움에서 칼과 야구방망이를 사용해 유혈사태를 일으켰던 것. 당시 김 씨와 함께 이 유혈극에 가담했던 연 씨는 그해 9월경 해외로 도피해 현재까지도 국내에 들어오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으로 두 개 조직에서 16명이 구속돼 현재 재판을 받고 있다고 한다.
검찰 관계자는 “이미 과거 김 씨를 조사하면서 ‘단지’ 의식이 거행됐다는 첩보를 입수한 상황이었지만 객관적 자료를 확보하지 못한 터라 잠시 묻어둘 수밖에 없었다”며 “김 씨의 새끼손가락 절단에 대해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조직에서 알고 이를 은폐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고 밝혔다.
검찰은 증거 인멸의 위험성 때문에 당시에는 김 씨의 단지 사건에 대한 조사를 보류했지만 결국 끈질긴 수사를 통해 병원 진료기록 등 객관적 증거를 확보해 조폭들의 엽기적인 기강 확립 행위를 적발할 수 있었다.
검찰 관계자는 “이번 사건은 그동안 풍문으로만 떠돌았던 조직폭력배들의 잔인성이 검찰 수사로 확인된 경우”라며 “폭력사건에 가담하고 도주한 연 씨 등 조직원들은 끝까지 추적해 엄중하게 처벌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청주=이윤구 기자 trus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