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 ||
위의 경우처럼 여성의 신체를 몰래 촬영하거나 상대의 의사에 반하는 신체접촉을 한다는 것은 통상적인 관념으로 볼 때 분명 ‘떳떳한’ 행동이 아님은 분명하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행동을 규제할 기준이 모호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성 관련 범죄를 다루는 경찰의 태도 및 법원의 판결을 지켜보는 국민들은 혼란스럽다.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앞뒤 정황을 포함해 위법성 여부를 가려낸다치더라도 미묘한 ‘한끝 차이’로 처벌 유무가 달라지는 등 확실한 기준을 찾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성범죄의 유죄와 무죄 사이, 그 아슬아슬한 경계속으로 들어가보자.
최근 성범죄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을 분석해볼 때 유·무죄를 판가름하는 잣대는 ‘성적 수치심’을 유발했느냐 그렇지 않느냐다. 문제는 이 ‘수치심’의 기준이 대체 무엇이냐는 것.
지난 2006년 12월 미니스커트를 입고 지하철 좌석에 앉아있는 여성의 다리를 휴대폰 카메라로 찍은 남성이 성폭력범죄처벌법 위반으로 기소됐다. 이 남성은 벌금 50만 원에 약식기소됐으나 ‘억울하다’며 정식재판을 청구, 최근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다리는 성적 욕망이나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부위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 재판부의 판단이었다.
현행법상(성폭력범죄의처벌 및 피해자보호등에 관한 법률 제14조의2) 카메라 등을 이용해 성적 욕망이나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타인의 신체를 그 의사에 반해 촬영할 경우 5년 이하 징역 또는 1000만 원 이하 벌금에 처해지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수치심을 유발하는 신체 부위를 어디로 국한할 수 있느냐’ ‘성적 욕망을 유발했는지의 여부를 누가, 무엇으로 가릴 수 있느냐’다. 성적 욕망이나 수치심을 유발하는 부위에 대해 규정하고 있는 법적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것으로, 이번 대법원의 판결을 보면 여성의 다리는 가슴이나 엉덩이와 비교해볼 때 ‘덜 민감한’ 부위라는 뉘앙스를 풍긴다. 그렇다면 다음 사례를 한번 살펴보자.
지난 3월 제주도에서는 비디오카메라로 여자 수영선수들의 가슴과 엉덩이 등 특정 신체부위를 촬영한 일본인 관광객이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으나 역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음란물 유포 혐의가 없는 데다가 관련 규정이 불명확해 처벌할 근거가 없다는 것이 경찰의 설명이었다. 그리고 촬영을 했다는 것만으로는 성적 수치심을 유발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
도촬꾼들의 행위를 성범죄로 볼 수 있느냐의 문제는 경찰의 대응 방식과도 직결되는 문제다. 지난해 8월 경포해수욕장에서 비키니 차림의 여성 피서객 200여 명의 신체를 몰래 촬영한 남성은 촬영 화면을 별도의 인터넷 사이트에 게재하는 등 추가 범죄가 확인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구속 입건됐다. 하지만 2006년 지하철과 노상 등에서 여성들의 치마속을 몰래 촬영한 영화사 미술감독과 지난해 6월 공중화장실에서 여성의 엉덩이 등을 600여 차례나 몰래 촬영해 온 남성은 바로 구속됐다. 또 지하철 승강장 에스컬레이터에서 여성의 치마 속을 촬영하려다 발각된 남성은 범행이 미수에 그쳤음에도 100만 원의 벌금형을 받았다. 또 지난해 9월 서점에서 여성 속옷을 촬영하다 걸린 일본인 관광객도 쇠고랑을 찼다.
성범죄의 혼란스러운 범주를 넘나들고 있는 것은 비단 도촬만이 아니다. 지난해 9월 창원의 한 노래 연습장에서 40대 남성이 가족과 함께 놀러온 네 살짜리 여아에게 입맞춤을 한 혐의로 기소됐다. 여아의 어머니가 아이를 데려가려 하자 김 씨는 바닥에 돈을 깔아놓고 이를 밟고 자신에게 오라고 했다는 것. 김 씨는 친근감의 표현이었다고 항변했지만 법원은 “여러 차례에 걸쳐 볼과 입술에 짧지 않은 입맞춤을 했고 돈을 땅바닥에 깔았던 행동은 성적 수치심과 혐오감을 일으키게 하는 추행에 해당한다”며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또 지난 2005년 8월 경남의 한 골프장에서 이 골프장 회장과 골프를 친 건설사 대표가 골프장 식당 여종업원을 상대로 강제로 볼을 부비면서 폭탄주 러브샷을 했다가 기소됐다. 최근 대법원은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일으켜 피해자의 성적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라며 이 남성에 대해 벌금 300만 원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성적 수치심의 기준에 근거해 유죄판결을 받은 사례는 또 있다. 지난 2003년 1월 S 우유 측 신제품 홍보행사를 하면서 전라의 여성 누드모델 3명이 출연하는 ‘누드퍼포먼스’를 벌인 기획자와 출연자 등에게 유죄가 선고됐다. “보통사람들이 볼 때 성적 수치심을 일으킨다면 음란행위”라는 것이 재판부의 의견이었다. 2005년 여름 생방송 음악프로그램 출연 도중 성기를 노출한 인디밴드 카우치가 공연음란죄로 처벌 받은 것이나 지난해 여름 알몸 상태로 주택가와 도로변을 뛰어다닌 30대 남성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한 혐의’로 경찰에 체포된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그러나 술에 취한 의붓아버지가 초등학교 4학년 딸의 몸에 다리를 얹고 엉덩이를 만지며 옷 속으로 손을 넣어 가슴을 만진 사건에는 무죄가 선고됐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평소 딸을 예뻐했고 술을 마신 뒤 꼭 껴안고 얼굴을 부볐으나 딸도 이런 행위를 진심으로 싫어하지 않았고, 2차 성징이 나타나지 않은 초등학교 4학년이라는 점 등에 비춰 아버지로서 다소 과한 애정표시를 한 것에 불과하다”고 판단했다.
한편 음란물을 판정하는 기준도 모호하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음란 동영상을 공급한 혐의로 기소된 동영상 제작업자 A 씨(45)에 대해 최근 대법원은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A 씨가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공급한 동영상은 속옷을 입은 여성의 자위 장면을 비롯해 성행위와 애무 장면이 노골적으로 묘사된 단편 성인물이었다. 하지만 대법원의 판결 기준은 ‘성기 노출 여부’였다. “법에 규정된 ‘음란’ 개념은 사람의 존엄성과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할 만큼 노골적인 방법으로 성적 부위와 행위가 표현되는 것으로 해당 동영상은 성행위와 애무장면을 묘사하긴 했지만 성기의 직접 노출이 없다”며 형사법상 규제가 될 정도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 대법원의 판결이었다.
하지만 성기 노출만 없으면 보는 이로 하여금 성적 수치심과 성적 욕망을 불러일으키지 않느냐는 문제가 제기된다. 실제로 음란물에 대한 기존 판례들을 살펴보면 ‘선량한 성풍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처벌받은 사례가 대부분으로, 이번에 대법원이 언급한 ‘성기노출’ 유무와는 상관없이 ‘성적 수치심’을 잣대로 한 기준이 적용되어 온 것이 확인된다.
1970년 성냥갑에 고야의 명화 ‘나체의 마야’를 넣어 판매한 것에 대해 대법원은 “명화라도 불순하게 사용하면 성욕을 자극하고 선량한 사회 풍교를 해친다”며 벌금 5만 원의 유죄판결을 내렸다. 1990년 공연윤리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친 영화 <사방지>의 포스터에 대해 대법원은 “심의를 거쳤더라도 건전한 성풍속을 해치는 것이라면 음란하다”며 유죄판결을 내렸으며 1995년 소설 <즐거운 사라>를 출간한 마광수 교수에 대해서도 “괴벽스러운 성행위 묘사”라는 이유로 징역 8개월을 선고했다. 1996년 성인연극 <미란다>에서 알몸공연을 한 연출자에게도 대법원은 “관객 앞에서 여배우가 10여 분간 알몸 성행위 연기를 한 것은 음란하다”며 징역 6개월을 선고했다.
법원 측은 “추행은 객관적으로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일으키게 하고 선량한 성적 도덕관념에 반하는 행위로, 피해자의 성적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며 피해자의 의사와 성별, 연령, 행위의 경위 및 객관적 상황, 시대의 도덕 관념 등을 종합해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최근 성범죄에 대한 위법성 여부는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할지 헷갈릴 정도로 일관성이 없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신고를 받은 경찰이나 판결을 내리는 재판부 등 법을 적용하는 그들 자신도 유죄와 무죄를 판가름짓는 그 예민하고 아슬아슬한 경계선 사이에서 적잖은 골머리를 썩고 있다는 후문이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