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문서 위조혐의로 검거된 부 아무개 씨의 위조 증거물로 압수된 각종 위조 자격증과 위조에 사용한 기기. | ||
수많은 문서를 위조해 ‘가짜 인생’을 양산해 왔던 ‘서류 위조의 제왕’이 드디어 검거됐다. 경찰은 지난 4월 18일 대형 컬러프린트기와 스캐너, 위변조 프로그램 등을 이용해 국내외 각종 서류를 위조해 팔아넘긴 혐의로 부 아무개 씨(남·38)를 붙잡아 공문서 위조 등의 혐의로 21일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찰에 따르면 부 씨의 손을 거치면 안되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국내 굴지의 대학 졸업장에서부터 토익·토플 성적표, 회계사 의사 교원 자격증까지 그의 손을 거치면 ‘감쪽같은 서류’로 만들어졌다. 그의 손을 거쳐 우리 사회의 ‘엘리트’로 다시 태어난 사람은 지금까지 파악된 것만 해도 280여 명에 달한다.
경찰의 수배를 받고 쫓기면서도 한 달에 100여 건씩 거래하며 그 세계에서 ‘제왕’이라 불렸던 부 씨가 지난 9개월간 운영한 ‘위조공장’을 샅샅이 파헤쳐봤다.
지난 23일 서울 서대문경찰서 외사계는 외부인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부 씨로부터 공문서 위조를 청탁했다가 덜미가 잡혀 1차 소환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경찰이 부 씨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자체 첩보수집에 의해서였다고 한다. 당시 부 씨는 2건의 다른 사건으로 수배 중이기도 했다. 경찰은 부 씨의 검거 과정과 추적 기간에 대해 “수사 기법과 관련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자세히 말해줄 수 없다”면서도 “(부 씨가) 12개의 대포 폰과 40개의 대포 통장을 사용했다”고 말해 검거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았음을 내비쳤다. 부 씨는 경찰의 수사망을 피하기 위해 작업장을 한 달에 두세 번씩 옮겨가며 범죄 행각을 벌였다. 그러나 이렇게 치밀했던 부 씨도 좁혀오는 경찰의 포위망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지난 4월 18일 검거되기까지 부 씨가 공문서를 위조해온 기간은 약 9개월. 지난해 8월부터 문서 위조를 시작한 부 씨가 ‘손님’을 모으기 위해 각종 포털사이트에 개설한 카페의 수만 40여 개에 이른다. 부 씨가 위조를 해왔던 공문서의 종류만 해도 100여 종이다. 전국 대학교의 졸업·성적 증명서, 토익·토플 성적표는 물론이고 일부 국가의 유학 비자를 받기 위해 필요한 은행잔고증명서까지도 손을 대었다.
아찔한 것은 부 씨가 사람의 생사를 좌우할 수 있는 전문의 자격증과 운전면허증까지 위조를 해왔다는 사실. 경찰의 한 관계자는 “전문의 자격증을 발급받은 사람도 있는데 이 자격증으로 병원을 개업했는지 여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앞으로 소환조사 과정에서 밝혀질 것”이라고 말했다.
경찰에 따르면 부 씨가 ‘도피행각’을 벌이며 공문서를 위조해 올린 수익은 1억 1000만여 원. 부 씨는 위조문서 한 건당 40만 원의 비용을 받았고 세 건 이상을 한꺼번에 주문하면 100만 원선으로 할인해주는 ‘고객 서비스’도 잊지 않았다고 한다.
거래방법은 간단했다. 우선 부 씨는 ‘대포 폰’으로 주문을 받아 위조문서를 제작, 퀵 서비스를 통해 의뢰인에게 배달했고 문서를 받은 의뢰인은 부 씨의 ‘대포 통장’ 계좌로 비용을 입금하면 끝이었다. 서울 지역에서 주문이 들어왔을 경우에는 주문과 배송에 불과 1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여러 건의 동종 전과(공문서 위조)가 있는 부 씨가 과거의 ‘경험’을 잘 살렸는지 문서 위조는 혀를 내두를 만큼 정교했다. 경찰도 한때 “부 씨 혼자서는 모든 문서를 이만큼 정교하게 위조할 수 없다”고 판단, 공범의 존재를 의심했을 정도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조사결과는 부 씨의 단독범행으로 굳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다양하고 정교하게 공문서를 위조해 온 부 씨가 사용한 장비는 의외로 ‘간단’했다. 현재 경찰서 한쪽 방에 압수돼 있는 부 씨의 장비는 노트북, 대형 컬러프린터 및 스캐너, 압인기, 문서세단기 등이 전부였다. 황당한 것은 부 씨에게 위조 방법을 ‘전수’해 준 ‘스승’이 다름 아닌 인터넷이었다는 사실. 부 씨는 경찰 조사에서 “인터넷 사이트 몇 군데 돌았더니 위조를 쉽게 배울 수 있었다”고 진술했다.
한편 경찰 조사결과 부 씨의 ‘고객’은 20대에서부터 40대까지 연령층이 다양했는데 이들은 대부분 ‘구직’을 위해 위조를 의뢰한 것으로 드러났다. 실제로 위조문서로 취업에 성공, 직장을 다니고 있는 사람도 상당수 있다고 한다. 물론 이들의 불법 취업은 경찰 조사가 진행되면서 스스로 판 무덤이 되고 있다.
서대문 경찰서에 소환을 통보받고 경찰서를 방문했다가 때마침 입구에서 만난 A 씨(남)는 부 씨에게 토익 성적증명서 위조를 의뢰했던 인물. 그는 13년째 회사를 다니고 있다고 했는데 최근 진급시험에 토익 점수가 필요해 이 같은 유혹에 빠졌다고 고백했다. 그가 부 씨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역시 인터넷 포털 사이트를 통해서였다고 한다. 그는 ‘위조’라는 검색어를 치자마자 금방 부 씨와 연결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A 씨는 위조된 성적표를 이미 회사에 제출한 상태라고 했다. 그는 “다급한 마음에 일을 저질렀다. (성적표를 위조한 이후) 단 한번도 맘이 편해본 적은 없다”며 “곧 회사에 이 사실이 통보될 텐데 앞길이 막막하다”고 한숨지었다.
한편 이번 사건과 관련, 문서 위조를 의뢰한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은 최소 280명에 달하는 것으로 경찰 조사결과 드러났다. 경찰의 한 관계자는 “현재까지 30여 명을 소환 조사했는데 앞으로 250명 정도를 더 소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것도 부 씨의 장부에 적힌 고객 명단과 위조문서 샘플의 숫자에 불과해 조사를 진행하다보면 더 많은 의뢰인들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고 그는 말했다.
이들에 대한 처벌은 두 가지로 나뉜다. 단순히 문서를 위조하는 데 그친 경우와 이를 활용해 영리를 취한 경우인데 전자는 ‘문서위조 공범죄’가 적용되고 후자는 ‘사기죄’가 적용돼 처벌이 더욱 강화된다고 한다.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서대문경찰서 최진기 외사계장은 “취업이나 외국 유학 비자 때문에 위조가 점점 늘고 있다”며 “문제는 이들에게 아무 죄의식이 없다는 것인데 위조를 부탁한 사람도 처벌된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앞으로 문서 위조 범죄가 많이 줄어들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장환 기자 hwan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