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 경찰은 ‘흰색 승합차가 길에 서더니 한 남자가 내렸고 곧바로 총소리가 들렸다’는 현장 목격자 진술을 확보, 이번 사건을 명백한 타살로 보고 있다. 또 바탄가스는 박 여인이 사라진 저녁시간에는 차가 밀려 마닐라에서 세 시간 이상 걸리는 곳으로 알려져 현지 사정을 잘 아는 자의 납치, 청부살인 가능성에 경찰은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히 여권과 현금 400여만 원이 들어있던 박 여인의 핸드백은 사라졌지만 5만 1700페소(약 135만 원)에 달하는 현금이 들어있던 종이가방이 현장에 남아 있었던 사실로 보아 돈을 노린 강도살인이나 우발범행은 아닌 것으로 현지경찰은 보고 있다.
또 범행에 사용된 두 발의 총탄 중 한 발은 확인사살용인 것으로 보이는 점도 이번 사건이 누군가의 사주에 의한 청부살인일 쪽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단순살인이라면 급소를 정확히 겨누고 쏜 것도 모자라 확인사살까지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남대문 인근 상점에서 모은 돈을 부동산에 투자해 수백억대의 재산을 일궈낸 박 여인은 십수년 전 남편과 이혼하고 홀로 지내오다가 살해되기 닷새 전인 지난 3월 30일 딸 서 아무개 씨(40)와 휴양 및 투자이민 준비를 위해 마닐라에 입국한 것으로 전해진다. 필리핀 현지에서 한 달 일정으로 영어를 배우던 박 여인은 사건 당일인 4월 3일에도 평소와 다른 기색이나 이렇다할 의심스런 낌새를 보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딸과 쇼핑을 마친 박 여인은 마닐라의 S 호텔까지 동행한 뒤 “일을 보고 들어가겠다”고 말한 뒤 모습을 감췄다. 이 때 시각이 오후 6시 30분경. 그러나 박 여인은 그로부터 약 2시간 30분 후에 100여km가 떨어진 지방도시 바탄가스의 도로변에서 처참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바탄가스는 박 여인에게는 아무 연고가 없는 곳으로 사건 당일에도 그곳으로 가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경찰이 본격적으로 수사에 착수하게 된 것은 사건이 발생한 지 일주일 만인 지난달 10일. 박 여인의 남동생 A 씨(57)의 요청에 의해서였다. 경찰에 따르면 A 씨는 사건 전후의 여러 가지 자세한 정황 등을 거론하며 ‘사건의 내막’에 대한 강한 의혹을 제기한 것으로 전해진다. A 씨는 경찰에서 이번 사건이 단순 피살이 아닌 박 여인의 재산을 노린 범행일 가능성을 시사했는데 그가 거론한 인물은 다름 아닌 피살된 박 여인의 딸 서 씨인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에 따르면 A 씨는 “사고 소식을 듣고 필리핀에 다녀왔는데 조카(서 씨)가 사고 직전 필리핀 운전사에게 바탄가스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사고소식을 모르는 시점에서 왜 조카의 입에서 바탄가스라는 사건현장의 지명이 나왔는지 의심스럽다. 누나의 사망 소식을 주변 사람들에게 알린 시점도 다르다”며 “(서 씨가) 사건을 은폐하려는 냄새가 나는 등 누나의 피살에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며 진정을 냈다고 한다.
경찰은 박 여인의 가족이 재산으로 인해 적잖은 갈등을 겪어왔다는 주변인물 및 가족들의 진술에 주목하고 있다. 박 여인이 보유한 거액의 재산이 이번 사건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판단한 경찰은 주변인물들을 상대로 수사 중이다.
특히 피살된 박 여인의 딸과 남동생은 사건의 실마리를 풀 수 있는 핵심인물로 거론되고 있는 상황이다. 경찰은 이들에게서 아직까지 특별한 혐의점을 찾지 못했지만 박 여인의 미스터리한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두 사람에 대한 조사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실제로 박 여인의 딸 서 씨와 박 여인의 남동생 A 씨는 박 여인의 재산상속을 두고 지속적으로 다툰 정황이 확인되고 있다.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A 씨와 서 씨는 박 여인의 장례식도 제각기 따로 치른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A 씨는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있었던 미심쩍은 부분에 대해 거론하며 누나의 죽음에 딸 서 씨가 개입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강한 의혹을 제기, 박 여인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는 더욱 확산되고 있다.
“당초 누나의 유언장에는 상속인이 나와 외손녀였는데 3월 중순경 두 딸로 바뀌었다”며 “3월 중순경 유언장의 내용이 바뀌고나서 이 일이 발생했다”는 것이 A 씨의 주장. 실제로 박 여인은 3월 중순쯤 150억 원의 유산 상속인을 남동생과 외손녀에서 두 딸로 바꿨고, 이로 인해 양측 간 심한 갈등을 빚어온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유언장의 내용이 바뀐 사실에 주목하고 유언장이 정상적인 절차를 거쳐 변경됐는지에 대해서도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A 씨의 주장에 대해 서 씨는 “삼촌(A 씨)이 평소 어머니의 재산을 관리하면서 돈을 횡령해 얼마 전 고소를 한 상황”이라며 “삼촌이 평소 친분이 있는 정치인까지 필리핀으로 보내 수사자료를 받아와 나를 음해하고 있다”고 반박, 양측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상황이다.
경찰은 우선 피살된 박 여인의 두 딸과 남동생을 출국금지 조치했다. 동시에 박 여인이 마지막으로 들렀던 호텔 폐쇄회로 화면을 호텔 측에 요청하는 한편 박 여인과 서 씨 등의 필리핀 현지 휴대폰 사용내역에 대해서도 통신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한 60대 재력가 여인의 미스터리한 죽음에 얽힌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현지 경찰로부터 자료를 넘겨받아 수사를 진행하고 있는 경찰은 당초 수일 내로 사건의 전모를 밝힐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피살자의 가족들이 관련됐을 가능성이 제기되고부터 경찰은 상당히 조심스러운 입장을 보이고 있다.
수사팀 안팎에서는 이 사건이 단순한 살인사건이길 바라지만 최악의 경우 재산을 둘러싸고 벌어진 한 집안의 끔찍한 비극으로 밝혀질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