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리핀의 환상적인 휴양지. 최근 이곳은 빈부격차가 극심해지며 한인들을 대상으로 강력범죄가 잇따르고 있다. | ||
이런 문구로 그간 은퇴이민자들의 큰 관심을 모으던 필리핀이 이제는 ‘한국인이 살기에 가장 위험한 나라’라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그동안에도 갖가지 한국인과 관련된 사건 사고가 발생해 주목을 받아오던 필리핀에서 지난 7월 27일 또다시 한국인 일가족 피살사건이 일어나자 필리핀 현지 교민들은 물론 국내의 많은 사람들도 충격을 받고 있다.
외교통상부에서 발표한 자료를 보면 지난 2003년부터 현재까지 필리핀에서 발생한 한국인 피살사건은 이번 일가족 피살사건을 제외하고 총 37건. 한국인 교포가 살고 있는 세계 여러나라 가운데 한국인 피살 사건이 가장 많은 나라는 미국이지만 거주하고 있는 교민들의 수를 감안해 보면 발생률은 필리핀이 압도적으로 높다.
전문가들은 우선적으로는 필리핀의 치안이 불안하다는 사실에서 그 이유를 찾고 있지만 일부에서는 필리핀 내 일부 한국인들의 부주의나 부적절한 행동 등도 범죄 단체들에 쉽게 노출되는 이유로 보고 있기도 하다. 이번 ‘일가족 피살 사건’을 계기로 한국인들이 필리핀에서 왜 주요 범행대상이 되고 있는지, 그 이유와 대책 등을 살펴봤다.
필리핀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 교민들의 불안감이 높아지고 있다. 필리핀에서 지난 1년 사이 4차례나 한국인 피살 사건이 발생해 교민들의 민심이 흉흉한 가운데 또다시 한국인 일가족이 피살됐다는 소식이 또다시 전해지자 “도저히 불안해서 살 수가 없다”는 말들이 곳곳에서 들리고 있는 것.
이번 사건은 지난 27일 필리핀 롱가포시 카발란 지역에서 발생했다. 필리핀 현지 언론에 따르면 카발란에 거주하고 있던 한국인 장 아무개 씨(여·54)와 그의 딸(34) 그리고 손녀(10)가 모두 집에서 흉기에 찔려 숨진 채 발견됐다.
피살된 장 씨 일가를 최초 발견한 것은 장 씨의 손자 A 군. 다른 방에서 잠을 자다가 화를 면한 A 군은 이른 아침 할머니와 어머니가 잠들어 있는 방문을 열어보고는 곧바로 필리핀 현지 경찰에 신고한 것으로 전해진다. 장 씨의 남편 B 씨는 직장일로 다른 지역에 출장을 갔다가 그곳에서 가족의 피살 소식을 뒤늦게 접했다고 한다.
경찰은 장 씨 집의 에어컨 환기구가 뜯겨져 있었다는 점과 서랍 안에 물건이 없어진 점을 들어 돈을 노린 강도가 환기구를 통해 장 씨의 집에 침입한 후 일가족을 살해한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딸 장 씨와 손녀가 옷이 모두 벗겨진 채 발견된 점으로 미뤄 범인들의 성폭행 여부도 의심하고 있는 상황이다.
필리핀에 거주 중인 한 교민에 따르면 현재 필리핀 경찰은 필리핀 현지인 다섯 명을 장 씨 일가족 피살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이들 중 세 명을 체포해 조사 중이라고 한다. 용의자들은 장 씨의 집 인근에 살던 강력범죄 전과자들. 하지만 이들이 아직까지 범행 여부를 자백하지는 않은 상태기 때문에 진범인지 여부는 확실치 않은 상황이다.
교민들에 따르면 장 씨가 피살된 울릉가포시 카발란 지역은 한국인이 전혀 살지 않는 지역으로 전해진다. 카발란에 거주하고 있던 한국인은 피살된 장 씨 가족이 유일했다는 것이 필리핀 현지인들의 설명이다. 필리핀 마닐라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이 아무개 씨는 “필리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한국사람들이 부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장 씨 일가가 오픈된(외지인의 출입이 자유로운) 곳에서 유일한 한국인 가정으로 외따로 살다보니 쉽게 범행 대상이 됐을 가능성이 높다”며 “장 씨 가족이 살던 곳은 너무 위험한 곳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국인과 관련한 사건은 고립된 위험 지역에서만 발생한 것은 아니다. 그간 필리핀에서 발생했던 한국인 피살 사건이 마닐라, 바탕가스주 등 한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곳에서도 꾸준히 발생해 온 것을 보면 장 씨 가족의 참변이 단지 “위험한 곳에 살았기 때문”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어 보인다.
외교통상부 관계자에 따르면 지난 2003년부터 2008년 상반기까지 필리핀에서 살해된 한국인 피살자수는 37명. 이 통계에 따르면 필리핀은 통상 두 번째로 한국인 피살자가 많은 나라다. 하지만 같은 기간 첫 번째로 교민 피살자 수가 많은 미국의 경우(76건) 그곳에 거주하는 교민이 250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고 반면 필리핀은 단기 체류하는 한국인 유학생의 수를 모두 합쳐도 그 수가 20만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것을 볼 때 필리핀이 그 어떤 나라보다 한국인 피살사건의 발생빈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밖에도 크고 작은 강도 절도 상해 사건까지 합치면 사건 사고 비율은 한층 높아진다.
▲ 필리핀의 한 허름한 주택가 모습. | ||
필리핀 교민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한 인터넷 사이트 커뮤니케이션(philcafe24.com)에 글을 올린 한 교민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한국에 들어갈 계획을 심각하게 고려 중이다”라며 그동안 필리핀 사회에서 계속돼 온 한국 교민들의 불안감을 표출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필리핀에서 한국인을 상대로 한 범죄가 이토록 기승을 부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필리핀 현지인들은 하나같이 “필리핀 원주민들 사이에 한국인들이 돈이 많다는 인식이 팽배해있다”며 “이 때문에 범죄의 표적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A 여행사에서 필리핀 은퇴이민 관련 상담업무를 맡고 있는 장 아무개 씨(30)는 “필리핀 사람들의 50~60% 정도가 서민 정도가 아니라 극빈층에 가깝다”며 “가난한 사람이 많다보니 저택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들이 돈이 많아 보이는 것은 당연할 것이고 범죄의 대상으로 낙점되기 십상”이라고 말했다.
물론 필리핀의 외국인들 중 한국인만이 이런 인상을 주는 것은 아니다. 외교부 한 관계자에 따르면 필리핀에서 “외국인은 돈이 많다”는 인식 탓에 다른 동양인들을 상대로 한 강도 및 피살사건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 이 관계자는 “일본인이나 중국인도 ‘돈이 많다’는 이유로 범죄의 타깃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라며 “다만 2000년 이후 다른 나라보다 한국 교민이 압도적으로 많아졌기 때문에 한국인이 범죄에 많이 노출됐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유독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많다는 것은 부인하기 힘들다. 우선은 일부 한국인들의 부주의가 문제라는 지적이다. 일본인이나 중국인 등은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데 비해 일부 한국인들은 국내에서와 마찬가지로 거리낌없이 행동해 눈길을 끄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다른 동양권 사람들보다 특히 한국인에 대한 필리핀 원주민들의 정서가 좋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A 여행사의 장 씨는 “한국인을 중심으로 필리핀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 원정 성매매, 한국인 아이를 임신한 필리핀인 10대 미혼모의 증가 등 한국인들에 의해 자행되고 있는 필리핀의 사회적 문제점들이 한국인 전체에 대한 인식을 악화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필리핀에서 얼마간 생활을 했던 사람들 중에서는 “필리핀 남성들이 특히 한국 남성을 싫어한다”는 말을 듣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필리핀에 1년여간 연수를 다녀왔다는 박 아무개 씨(27)는 “필리핀에 한류 열풍이 불면서 필리핀 여성들 중 한국 남성을 좋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졌지만 그 반면 한국 남성들 중 일부가 이들을 대상으로 좋지 못한 행동을 해 나쁜 인상을 준 경우도 있다”며 “필리핀 사람들은 이런 부분에서 상대적 박탈감과 함께 분노를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지금 필리핀 내 한국 교민들의 불안감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필리핀에서 오래 거주한 교민들은 “세계 어느 나라나 100% 안전할 수 없고 또 100% 불안한 경우도 없다”며 “한국과는 다른 외국에 사는 만큼 늘 조심하고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렇게 불안해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5년째 필리핀에서 거주하고 있다는 한 교민은 “필리핀에 체류할 경우 되도록 시내에 거주지를 정하는 것이 좋다”며 “외곽지역이 집값이 싸다고 해서 치안에 문제가 있는 지역에 거주지를 정하기도 하는데 이는 범죄의 희생양이 될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한국인들은 화려한 옷을 입거나 귀금속을 몸에 지니고 거리를 활보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행동도 범죄의 표적이 되기 싶다”며 “비싸거나 화려한 옷차림은 애초에 피하고 수수한 복장으로 다니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A 여행사의 장 씨는 “필리핀에서 택시를 탈 때 안쪽의 손잡이가 부러졌거나 고장이 나 있는 경우 곧바로 택시에서 내리고 기사가 기분 나쁘게 행동하면 반드시 주변인에게 택시 번호를 알려줘야 한다”며 “또 주변의 필리핀 사람에게 집안의 금전적인 정보 등 너무 많은 것을 알려주는 것도 금물”이라고 말했다.
한편 한 필리핀 교민은 “필리핀 원주민과 시비가 붙으면 먼저 사과하고 조용히 넘어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며 “치안이 불안한 필리핀 일부 지역에서 밤에 혼자 밖에 돌아다니는 것은 ‘나를 총으로 쏴 달라’는 말과 똑같은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장환 기자 hwan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