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국 독립을 바라는 광복군의 서명이 담긴 태극기. | ||
안기숙 씨(여·55)는 홀어머니를 모시며 살아가고 있다. 안 씨는 안중근 의사의 종손녀로 안 씨의 할아버지가 안중근 의사의 동생 안정근 애국지사다. 안 지사는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한 39인 가운데 한 명으로 안중근 의사만큼이나 처절한 독립운동을 했던 인물. 안 지사는 지난 1926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조선사업으로 위장한 선박업체를 차려 공작선을 건조하다 적발돼 일제의 탄압을 받았다. 홍콩으로 피신했던 안 지사는 1949년 3월 상하이에서 사망했다.
선친을 따라 프랑스에서 생활하다 15년 전 귀국했다는 안기숙 씨는 우리 말을 할 때마다 항상 ‘더듬더듬’이다. 원래부터 그런 것은 아니다. 오랜 외국 생활 때문만도 아니다. 그의 지인들에 따르면 안 씨는 어린 시절 지독한 가난과 굶주림으로 건강을 잃은 적이 있는데 그 때문에 말까지 어눌해졌다고 한다. 안 씨는 현재 단칸방에서 친정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다고 한다. 안 씨가 자신의 과거에 대해 알려지는 걸 극도로 꺼려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자세히 알기는 어려웠지만 이것만으로도 안 씨의 고단한 삶을 알기엔 충분했다.
곽기수 씨(75)는 ‘밀양폭탄사건’의 주모자로 옥고를 치른 곽재기 의사의 손자다. 곽 의사는 조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 등을 폭파하기 위해 서울로 잠입해 정황을 살피다가 일본 경찰에 발각돼 동지 6명과 함께 체포됐고 1921년부터 8년간 옥고를 치렀다. 1930년 중국으로 건너가 만주, 상하이 등지에서 계속해서 항일 독립운동을 벌이던 곽 의사는 광복 이후 국내에 돌아와 1952년 사망했다. 그의 손자인 곽기수 씨는 30년째 장례식장에서 염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곽 씨는 고정수입이 없는 탓에 평생을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며 살아왔다고 한다. 그가 할아버지를 거쳐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독립운동가의 자손’이라는 명예뿐이었다.
곽 씨는 광복 이후 사망한 독립유공자의 손자라는 이유로 국가에서 어떤 연금 혜택도 받지 못했다.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에는 ‘1945년 8월 15일 이후 사망자는 자녀까지만 유족연금을 지급한다’고 명시돼 있기 때문. 독립유공 관련 단체에서 “수급자 기준으로 2대까지 혜택을 받게 하자”는 내용을 골자로 해 수차례 법 개정을 추진했지만 번번이 좌절돼 고쳐지지 않고 있다.
곽 씨가 국가로부터 받은 것이라곤 ‘애국훈장’ 하나. 곽 씨는 이 ‘훈장’마저도 10여 년 전 국가보훈처에 반납해버렸다. “할아버지의 독립운동으로 인해 생활이 곤란한 후손들에게 훈장이 다 무슨 소용이냐”는 항의표시였다. 하지만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국가보훈처에서는 훈장을 찾아가라는 말도 하지 않고 있다.
▲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국가 지원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는 모습. | ||
방 회장의 할아버지 방한민 지사는 1920년 <조선일보>가 창간할 때에 사회부 기자로 활동했는데 당시 방 지사는 ‘조선민중의 민족적 불평’ ‘골수에 맺힌 조선인의 한’ 등 수많은 반일 기사를 작성했다. 방 씨는 “할아버지가 ‘왜놈’이란 표현을 국내 최초로 만들어낸 사람”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방 지사는 1923년 천보산 광산의 은과 구리 광석을 약탈해 가기 위해 일제가 건설한 ‘천도경편 철도개통 기념식’에 일본총독이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고 총독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우다가 거사 직전 체포됐다. 재판과정에서 일본은행에 폭탄을 투척하려고 했던 혐의도 드러나 징역 10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조선일보>에 복직했던 방 지사는 ‘열성자회사건’에 연루돼 또 다시 투옥됐고 징역 7년의 형을 살았다. 방 지사는 오랜 옥살이와 고문으로 후유증에 시달리다 1951년 1·4 후퇴 당시 실종됐다.
방 지사의 아들 방준영 씨는 1·4 후퇴 당시 아버지가 북한으로 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아버지의 존재를 평생 숨기고 살았다. 시대적 상황이 자칫하면 ‘월북’으로 오인받아 공산당으로 몰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방 씨는 평생을 가난과 싸우다 말년에 뇌졸중으로 세 번이나 쓰러졌고 지난 1989년 사망했다.
아버지가 평생 가난에 시달리다 사망한 데에 충격을 받은 방 회장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듬해인 1990년 할아버지의 독립유공자 신청을 했다. 그러나 증빙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기각됐다. 할 수 없이 방 회장이 직접 할아버지의 독립운동 자료를 찾아나섰다. ‘유공’ 사실을 인정받는 데는 3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독립운동 유공자로 인정받은 이후에도 국가의 도움은 없었다. 앞서의 법규정, 즉 사망한 유공자의 자녀가 아닌 손자라는 이유에서였다.
방 회장은 “첫 수급자를 기준으로 연금혜택을 주는 것이 형평성에 맞지 않겠느냐”며 “선조가 독립운동을 하느라 자손을 보살피지 못했거나 혹은 그 때문에 재산을 빼앗겨 그 후손들은 대부분 어렵게 살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 조상의 일을 알아도, 그리고 국가로부터 유공 사실을 인정받아도 독립유공자의 사망 시점을 가지고 모든 것을 정하는 지금의 법으로는 억울한 사람만 늘어날 뿐이다”라고 말했다.
경제적인 궁핍은 후손들이 떳떳하게 독립운동가 집안임을 밝히지 못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익명을 요구한 한 유공자 후손은 “내가 겪었던 어려움을 말하지 않는 이유는 혹 내 아들의 결혼에 장애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는 사실이 떳떳하고 자랑스러워야 하지만 가난에 찌든 집안이라는 인식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며 “최근엔 드러내고 싶지 않는 과거가 되고 말았다”라고 한탄했다.
취재가 끝날 무렵 만난 한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던진 말은 아직도 할일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국가와 우리 국민 모두에게 던지는 일종의 ‘한(恨)’이었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있지만 그말은 틀렸어요. 후손이 다 망한다고 해야 맞아요.”
김장환 기자 hwan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