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손엔 저울을 한손엔 칼을 든 법의 여신상. 사체가 없는 살인사건의 경우 혐의에 대한 입증이 매우 어려울 수밖에 없다. | ||
당시 이들이 투숙했던 방은 욕조에서 넘친 물로 방안의 카펫이 다 젖어있고 수건이 욕조 전체에 깔려있는 등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A 씨가 살해당했다는 증거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집중조사 끝에 경찰은 내연남 B 씨로부터 “내가 A 씨를 죽이고 시신을 한강에 버렸다”는 자백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B 씨는 얼마 후 “호텔에서 나온 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며 진술을 번복했다. 무려 13번의 소환조사에도 불구하고 살인증거가 드러나지 않자 사건은 결국 검찰로 넘어갔고 이 사건은 지금까지도 미궁에 빠져있다.
가장 큰 의문은 4년이 지난 현재까지 어디에서도 A 씨의 사체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모든 정황상 A 씨가 살아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판단되지만 그녀는 여전히 법적으로 ‘실종’ 상태다. 따라서 검찰이 그간의 수사기록을 토대로 B 씨를 A 씨 살해 혐의로 기소한다고 해도 B 씨에게 살인혐의를 적용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살인범죄의 가장 기본적이고 직접적인 증거인 사체가 발견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사체 없는 살인사건’이란 말 그대로 살인의 정황이 뚜렷함에도 사체가 발견되지 않은 사건을 의미한다.
최근 직접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기소 자체에 어려움을 겪거나 기소했다해도 죄를 입증하지 못하는 케이스가 늘고 있다. 사건해결을 확신했던 검·경의 입장에서는 더없이 맥빠지는 일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단 한 명의 억울한 피해자도 나와서는 안되기 때문에 범행을 입증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사법부의 원칙. 특히 ‘살인’이라는 범죄행위가 성립하기 위한 가장 유력한 직접증거가 ‘사체’라는 점에서 법원도 사체가 없는 살인사건에 대해서는 매우 신중한 판단을 내리고 있다.
살해된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 사체는 없고, 살해된 정황은 충분한데 용의자가 죽였다는 증거는 없는 이 기괴한 사건들에 대한 법원의 입장은 어떨까.
지난 2005년 12월 28일 대전에 사는 C 씨는 평소 자신들의 동거를 반대했던 동거녀의 언니를 승용차에 강제로 태운 뒤 몇 시간 동안 감금하고, 유성구 방동저수지로 데려가 살해한 혐의로 기소됐다. 동거녀의 언니는 여지껏 생사불명 상태다. C 씨는 모든 정황상 동거녀 언니의 유력한 살인용의자로 지목됐지만 대법원은 C 씨의 살인혐의에 대해 무죄 취지로 사건을 파기환송했다. “정황상 피해자가 숨진 상태라는 점은 수긍할 수 있으나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상황에서 ‘살해의사’를 가진 피고인의 행위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 대법원의 판단이었다.
또 지난 2006년 평택경찰서에서는 납치살해 혐의로 체포된 E 씨로부터 또 다른 살인에 대해 구체적인 자백을 받았지만 사체를 찾지 못해 혐의를 입증 못했다.
당시 한 동네에 사는 사채업자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E 씨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경찰은 그의 아내가 1년 전부터 행방이 묘연하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내사를 진행했다. 집 우편물이 쌓여있고 오래 전부터 집에 단전·단수가 돼있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은 경찰은 E 씨가 집을 떠나 전 부인의 집에 머물러 왔으며 아내의 행방에 대해 아내의 친구들과 주변인들에게 모두 다르게 설명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심증을 갖고 추궁한 경찰은 결국 E 씨로부터 “전 부인 문제로 다투다 아내를 살해, 토막내 평택 인근 밤나무 단지에 유기했다”는 구체적인 자백을 듣게 된다. 경찰은 E 씨에게 아내살해 혐의를 추가해 기소했다. 하지만 남자가 지목한 장소에서는 아내의 사체가 나오지 않았고 결국 법원은 범행을 입증할 직접증거인 사체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남자는 아내 살인혐의에 대해서는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이틀 후 남편 D 씨가 집에서 쓰레기봉투 5개를 들고 나와 승용차에 싣고 가는 모습이 CCTV에 찍혔다. 또 D 씨의 집 곳곳에서는 사라진 아내의 혈흔이 발견되는 한편 욕조 배관에서는 추가로 피부조직과 뼈조각 등이 발견됐다. 또 경찰은 4월 21일부터 26일 동안 D 씨의 집에서 사용한 수돗물이 무려 5톤에 달한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동시에 사건 한 달 전 아내가 D 씨의 의처증과 가정폭력을 이유로 이혼소송을 냈다는 사실도 추가로 드러났다.
D 씨는 ‘아내가 가출했다’며 범행을 부인했고 아내의 사체도 찾지 못했지만 검·경은 수사과정에서 드러난 제반 정황을 토대로 남편 D 씨를 살인혐의로 기소했고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여 유죄를 선고했다.
“시신이 발견되지 않아 D 씨가 아내를 살해했다는 직접 증거는 없지만 사건 당시 피고인과 피해자가 한정된 공간인 아파트에서 둘만 있었던 점, 아파트 내 현관에서 채취한 3곳의 혈흔, 안방에 딸린 욕실에서 채취한 4곳의 혈흔들 중 2곳의 혈흔, 그리고 방안 옷걸이에 걸려있던 피고인의 바지에서 채취한 혈흔 등이 모두 피해자의 유전자와 일치하고 있는 점과 욕실에서 채취된 물질들이 사람의 신체 조직으로 밝혀진 점 등을 종합해볼 때 아내가 숨졌음을 인정할 수 있고 그것이 피고인의 행위로 인한 것이 증명됐다고 볼 수 있다. 또 당시 D 씨가 집 밖으로 쓰레기봉투를 승용차에 싣고 나간 점과 나중에 D 씨 집에서 발견해 압수한 종량제 쓰레기봉투가 주거지인 유성구가 아닌 서구와 중구의 것이었던 점을 볼 때 D 씨가 아내를 살해한 뒤 시신을 내다버린 사실도 충분히 증명된다”는 것이 재판부의 의견이었다. 즉, 간접증거가 개별적으로는 범죄사실에 대한 완전한 증명력을 갖지 못한다 하더라도 전체 증거를 종합적으로 고찰할 경우 증명력이 있는 것으로 판단되면 범죄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는 얘기다.
또 다른 사례를 보자. 2004년 7월 서울지방경찰청 기동수사대는 또래 친구를 살해하고 강가에 묻어버린 7명에 대해 무려 10년이 지난 뒤 살인정황을 잡아내 기소한 일이 있었다. 살해 직후 한강 둔치에 묻어버린 탓에 사체는 물에 쓸려가 찾지 못했지만 이들은 법정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탓에 사체를 찾을 수는 없었지만 피의자들이 검찰에서도 동일한 진술과 자백을 했다는 점, 범행 당시 역할분담 건에 대한 상호간 진술이 정확히 일치했다는 점 등이 보강증거로 인정됐다”는 것이 수사담당자의 말이었다.
사체 없는 살인사건에 대해서 법원이 이처럼 신중한 판단을 내리는 이유는 뭘까. 이와 관련해 주목해볼 것은 ‘사체 없는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몰려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F 씨의 경우다. 지난 2006년 1월 부산지법은 F 씨와 그의 부인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과 관련, “국가는 원고들에게 총 1200만 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승소판결을 내렸다. F 씨는 2004년 2월 부산 진구에 있는 술집에서 돈 문제로 욕을 하는 지인을 살해한 뒤 사체를 낙동강변에 버린 혐의로 구속, 28일 동안 수감생활을 했다.
F 씨의 경우만 봐도 그렇듯 사체 없는 살인사건에 대한 법원의 판단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작업임이 확실하다. 모든 정황이 충분하다고 해도 살인의 증거물인 사체가 없을 경우 사인조차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체 없는 살인사건과 관련, 대법원이 유·무죄를 결정짓는 기준은 뭘까. 그것은 사체가 발견되지 않은 상황에서 얼마나 확실하게 살인행위를 증명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사체 외에 어느 정도 수준의 증거가 확보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기준이 모호하다. 적어도 토막난 사체 일부나 혈흔, 뼈조각 정도는 나와야 유죄입증이 가능한 것일까. 실제로 2006년 부평경찰서는 재래식 화장실에서 토막난 사체조각을 발견해 수년 전에 벌어진 살인사건을 밝혀내기도 했다. 피의자가 철길에 버렸다는 머리부분은 끝내 찾지 못했지만 법원은 피의자에게 살인혐의를 적용해 유죄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사체를 훼손시키지 않고 ‘완벽하게’ 유기한 경우라면 어떨까.
검·경의 통상적인 항변은 이렇다. “‘몇 날 몇 시에 어디서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죽여서 어디에 버렸다’는 식으로 범인이 아니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사실을 말하는 경우, 또 그들의 진술이 수사기록과 일치할 경우에도 사체가 없다는 이유로 무죄라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살인이라는 행위를 하면서 확실한 정황증거를 남기는 어리석은 범죄자가 얼마나 있겠나. 사체만 발견되지 않는다면 완전범죄로 빠질 위험도 있지 않겠나. 극단적인 예로 십수 년 전 물에 떠내려간 사체는 어떻게 할 것인가. 돌에 매달아 바다에 빠뜨렸다면 어쩔 것인가. 물론 단 한 명의 억울한 사람도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확실한 증거인 사체를 찾아 살인행위의 증거로 제시하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사체가 살인의 정황을 증명해주는 유일한 증거는 아니다.”
지난 4월 14일 서울 관악경찰서에는 14년 전 아버지를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G 씨가 공소시효 1년을 남겨두고 검거됐다. 당시 27세인 G 씨는 가족을 상습적으로 폭행하는 아버지를 우발적 살해한 뒤 사체를 토막 내 유기했다. 뒤늦게 G 씨 아버지의 실종경위에 의구심을 품은 경찰은 살인정황을 잡고 가족들과 G 씨를 상대로 조사를 진행, G 씨로부터 범행사실에 대한 자백을 받았다. 하지만 14년 전 G 씨가 시신을 유기한 현장에는 아파트가 건립돼 시신을 찾지 못했다. 경찰은 본인의 구체적인 자백과 관련자들의 일관된 진술을 바탕으로 범행이 인정된다고 판단, 기소를 한 상태지만 재판부가 어떤 판단을 내릴지는 미지수다.
사체 없는 살인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확정판결이 잇달아 엇갈리고 있는 가운데 검찰과 경찰, 법원의 고민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