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에서부터 전숙희 씨가 쓴 책 <사랑이 그녀를 쏘았다>, 김수임 씨의 생전 모습, 연극배우 윤석화가 주연한 <나, 김수임>. | ||
AP통신은 김수임의 동거남이었던 당시 미군정청 헌병대장 존 베어드 대령이 미국 정부에 제출한 <베어드 보고서>를 바탕으로 ‘김수임 사건’에 숨어 있는 진실을 파헤치고 있다. <베어드 보고서>는 미국국가기록원에서 비밀해제된 문서다. 기사를 작성한 찰스 헨리 기자는 “김수임 사건이 조작되었으며 베어드 대령이 동거녀인 김수임을 배신했다”고 주장하며 여러 가지 근거를 제시했다.
하지만 정작 김수임과 베어드 대령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김원일 씨는 이번 AP의 보도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그동안 어머니에 대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던 그로서는 다소 뜻밖의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김수임의 아들인 김 씨가 이번 보도와 세인의 관심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또 <베어드 보고서>가 말하고 있는 ‘김수임 사건’의 진실은 무엇일까. 김 씨의 측근들과 AP통신 추적 기사를 통해 그 진실에 접근해 보았다.
김수임은 1950년 ‘여간첩 혐의’를 받고 사형을 당했다. 그의 주요 죄목은 미군 헌병대장 존 베어드 대령과 동거하면서 공산주의자이자 애인인 이강국의 월북을 돕고 미군에 대한 정보를 북측에 전달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붙여진 수식어는 ‘한국판 마타하리, 미모의 여간첩’이었다.
이화여전을 졸업한 미모의 인텔리 여성 김수임, 독일유학파 사회주의자로 북한 정권 초대 외교부장을 역임했던 애인 이강국, 그리고 미군 헌병대 대장인 존 베어드 대령이 등장하는 이 사건은 그 내용 자체가 매우 드라마틱해 큰 화제가 됐다. 또 이 사건은 반공 이데올로기가 극에 달하던 시절 자주 등장하는 소재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김수임 사건’은 공작설이 끊이질 않았다. 1997년 연극배우 윤석화가 주연한 <나, 김수임>에서 당시만 해도 금기시되던 음모설을 제기했고 전숙희 씨가 쓴 <사랑이 그녀를 쏘았다>라는 책에서도 사건의 이면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리고 2005년 KBS <인물현대사>에서는 본격적으로 ‘김수임 사건 조작 가능성’을 다루기도 했다.
특히 <인물현대사>는 김수임의 동거남인 존 베어드 대령이 미국 정부에 제출한 <베어드 보고서>를 바탕으로 제작돼 화제가 됐다. 이 <베어드 보고서>는 1996년 김수임과 베어드 대령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자 미국 캘리포니아 라시에라 대학 신학과 김원일 교수에 의해서 처음 공개됐다.
<베어드 보고서>의 주요 내용은 “당시 베어드 대령이 미군에 대한 비밀 정보를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으며 김수임은 남한 정부의 고문에 의한 희생자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또 “당시 김수임이 제공했다는 미군 철수에 관한 내용은 이미 당시 인기 있는 미국 잡지에 소개되었을 정도로 공개된 정보였다”는 내용도 담고 있다. 더욱 충격적인 점은 <베어드 보고서>가 “김수임의 애인이었던 이강국이 미국 CIA의 스파이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내용까지 담고 있다는 사실이다. <베어드 보고서>는 베어드 대령은 물론 미군 관계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김수임 사건’에 대한 의혹은 끊이질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사형과정에는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 너무 많았다. 민간인이 군법정에서 단심으로 재판 3일 만에 사형을 선고받고 예정보다 앞당겨 사형이 집행된 점, 사건 판결문이 유령처럼 사라진 점, 이강국이 월북한 것은 남과 북에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인 1946년 일이었는데 적을 도왔다는 죄목으로 처벌했다는 점 등.
김수임의 아들 김원일 교수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 가장 먼저,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인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한국에서 ‘김수임 사건’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에 그리 달갑지 않는 눈치다. 최근 AP 보도를 통해 또 한 번 세인의 관심을 끈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어머니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그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최근 그는 AP 보도 때문에 한국 언론에서 인터뷰 요청을 수없이 받고 있지만 선뜻 언론에 나서지 않고 있다.
AP 보도가 나온 후 전화통화를 했다는 김 교수의 측근인 조명화 감독(그는 현재 김수임에 관한 영화 제작 중이다)은 그의 이러한 반응에 대해 “그동안 여러 번 의혹이 제기됐지만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김 교수는 이번 AP 보도의 내용은 이미 수년 전부터 한국 언론에도 소개됐던 내용인데 그때는 아무 말 없다가 해외 언론에서 보도했다고 새삼스럽게 관심을 보이는 건 난센스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전했다. 또 그는 “김 교수가 사건을 다시 한번 환기시킨다고 해서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달라지는 건 없다고 여기고 있다”고 덧붙였다.
AP통신의 기사에는 “이강국이 미국 CIA의 스파이였을 수 있다”는 흥미로운 내용이 실려 있다. 찰스 헨리 기자는 “1956년 육군 정보부에 의해 작성된 한 기밀 파일에 의하면 이강국은 CIA의 비밀 조직인 JACK(Joint Activites Commission Korea)에 고용된 적이 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북한은 1953년 정전 후 그를 ‘미국의 스파이’란 죄목으로 처형하였다”고 보도하고 있다. 찰스 헨리 기자는 “당시 통일된 한반도 정부를 세우기 원했던 이강국이 북한 공산당에 들어가 그 뜻을 이루려고 했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조 감독은 이번 AP통신의 기사에 인터뷰어로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AP통신의 기자인 찰스 헨리는 ‘노근리 사건’ 보도로 퓰리처상을 탄 언론인이다”며 “김원일 교수가 그와 만나는 걸 거절해 전화통화로 인터뷰를 했다”고 전했다.
조 감독은 특히 찰스 헨리 기자에게 ‘존 베어드 대령의 배신’에 대한 이야기를 강조했다고 한다. 그는 “베어드 대령은 정보장교가 아니라 헌병대 장교 즉, 미군 내의 군인과 물품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며 “베어드 대령 자신도 김수임이 이강국에게 비밀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는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어떤 증언도 하지 않았으며 공판 3일 전에 아무런 연락 없이 미국으로 떠났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베어드 대령은 김수임과 동거에 들어가기 전 김수임에게 자신이 곧 이혼할 몸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며 “김수임은 동거녀가 아니라 일종의 현지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전했다.
김원일 교수는 베어드 대령의 행적을 수소문한 끝에 미국 로드 아일랜드 요양원에서 그를 만났다고 한다. 하지만 베어드 대령은 자신에게 사생아가 있다는 사실을 부인했다고 한다. 베어드 대령은 그 이듬해에 사망했다. 조명화 감독은 “김 교수는 베어드 대령이 본처와 함께 나란히 묻혔으며 비석에는 ‘Together Forever’라고 쓰여 있는 걸 보았다는 얘기를 했다”고 전했다.
류인홍 기자 ledh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