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가만히 들여다 보면 21세기의 추석 풍속도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명절의 의미보다 실속을 내세우는 새로운 추석 풍속도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명절의 무게 중심이 ‘조상’이나 ‘친족’에서 ‘소가족’으로 이동하고 있고 고향을 찾아 떠나는 설레던 귀향길은 여행지를 찾아 떠나는 휴가길로 조금씩 바뀌고 있다. 막히는 귀성길 대신 역귀성을 택하고 번잡함을 피하기 위해 추석을 전후해 미리 고향을 찾기도 한다. 전통적인 추석의 모습도 편해진 세태만큼 변했다. 벌초와 차례상 대행에 이어 이제는 성묘도 사이버 공간에서 대신할 정도다.
맞벌이가 늘면서 직접 차례상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 쉽지 않은 가정을 중심으로 주문 차례상의 인기가 점점 높아지고 있는 추세다. 최근에는 추석 연휴기간 여행 계획을 세우고 여행지, 콘도 등 원하는 장소로 차례상을 주문해서 차례를 지내는 경우도 있다.
차례상을 대신 차려주는 전통 제수차림 전문점들은 20만~30만 원 정도의 가격에 밥만 빼고 음식과 향, 양초까지 준비해준다. 이 같은 ‘주문차례상’은 주문이 밀려 배달이 늦어질 정도로 인기가 높다. 차례상을 통째로 주문하기가 부담스러우면 몇 가지만 골라 패키지 상품을 주문해도 된다. 요즈음은 백화점, 할인점, 인터넷쇼핑몰, 호텔 등에서도 차례상 세트를 만들어 팔고 있다.
일부 젊은층에서는 차례용품을 온라인에서 해결하기도 한다. 대형농수산물 매장의 인터넷 장보기로 차례상에 필요한 제수용품을 구입하고 장 보는 시간과 발품을 줄여 명절 피로를 줄이고 있다. 특별행사와 가격인하 품목을 한눈에 꼼꼼히 살필 수 있는 것도 인터넷 장보기의 장점이다.
정보기술(IT)의 발달로 꽉 막힌 추석 귀향길 차안을 온갖 디지털 기기로 채워 놀이공간으로 만드는가 하면 차례와 성묘를 사이버상에서 해결하는 이른바 ‘디지털 한가위족’들이 생겨났다.
인터넷상의 사이버 추모공간에 추석을 앞두고 고인을 찾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서울시 시설관리공단이 운영하는 ‘사이버 추모의 집’에서는 고인의 미니홈피를 개설해 생전 사진이나 동영상 등을 올려놓고 헌화를 하거나 추모글을 남길 수 있다. 사이버 성묘 및 제사 코너에서는 실제와 똑같은 방식으로 차례를 지낼 수 있다. 가족끼리 오프라인에서 한자리에 모이는 게 아니라 온라인상에서 한자리에 모이고 성묘를 인터넷으로 지내는 셈이다. 이밖에도 부산시와 대전시가 인터넷으로 운영하는 추모의 집을 비롯, 10여 개의 사이버 영락원도 네티즌 사이에서 큰 인기가 있다.
해외에 떨어진 기러기가족들도 화상전화를 이용, 디지털 차례를 지내기도 한다. 해외의 가족이나 어학연수를 떠난 자식들과 함께 인터넷 화상전화로 조상들에게 차례를 지내고 친척 어른들과 인사도 나눈다.
지루한 귀성길에 대비해 휴대형멀티미디어플레이어(PMP)와 위성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 등으로 차안을 놀이공간으로 꾸민 이들도 있다. 또한 오랜만에 모인 친척들 사이에서 디카와 폰카는 필수다. 사진과 동영상은 물론 미처 고향집을 찾지 못한 가족을 위해 3G 화상전화까지 준비한다. 사정이 생겨 고향에 못가는 이들도 화상전화로 차례를 지내고 친척들과 정겨운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귀성길 풍속도도 많이 바뀌었다. 요즘은 부모님들이 자식을 찾아오는 역귀성이 부쩍 늘었다.
역귀성은 귀성길 교통 혼잡을 피하려는 것이기도 하지만 우선은 자식들을 배려하는 부모의 애틋한 마음에서 비롯된다. 지역에 따라 길게는 20여 시간씩 걸리는 귀성전쟁에 자식과 손자, 손녀들이 시달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신들이 움직이는 것이 낫다는 생각 때문이다. 또 자식들이 귀향하면 길바닥에 투자하는 비용 등이 만만찮게 들다보니 부모님이 대중교통을 타고 서울로 가면 돈을 절약할 수 있다는 배려에서 역귀성을 하는 경우도 많다.
실제로 한국산업단지공단이 전국 27개 국가산업단지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귀향 희망자가 줄어드는 추세다. 귀향 비율이 떨어지는 것은 내수부진과 경기침체 탓도 있지만 역귀성도 한 원인으로 분석된다.
소가족제도와 자녀를 한둘만 낳는 세태 등 사회적 변화가 추석 풍속도를 바꿔놓고 있다. 차례상 차리느라 허리가 휘는 대신 친지들이 모여 파티를 열며 추석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고 여성이 제주를 맡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다.
저출산 시대인 요즘 자녀가 딸 하나뿐인 가정은 장남이 차례를 모시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런 가정들을 중심으로 여성이 제주로 차례를 모시는 집안도 나타나고 있다. 이미 대법원 판결로 여성들이 종중 회원으로 인정받게 돼 여성 제주도 늘어나는 추세다.
‘평등하고 다같이 즐기는 행복한 명절’을 보내려는 차원에서 친정과 시댁을 번갈아가며 추석을 보내는 가정도 늘고 있다. 또 형제끼리 번갈아가며 차례를 지내는 가정도 낮선 모습이 아니다.
차례상 음식도 파격의 예외는 아니다. 어떤 집안은 아예 특별히 차례 음식을 준비하지 않고 ‘포틀럭 파티’ 식으로 추석을 보낸다. 가족별로 각자 입맛대로 스테이크, 만두, 갈비 등을 만들어 와서 큰집에 모여 나눠 먹기 때문에 음식 장만이나 엄청난 분량의 설거지 같은 명절 스트레스를 피한다.
송관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