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표씩 한 묶음으로 정상처리 된 투표용지(위)와 비정상적으로 처리된 것. 고무로 묶여 있는 것을 보면 서로 두께가 다르고 중간에는 아예 묶지도 않은 표가 두 곳이나 끼어 있다. 이 자료는 법원에서 보관돼 있던 것을 촬영한 것이다. | ||
16대 대선이 끝난 지 8년이 지났고 대법원에서도 이와 관련한 최종 판결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서울시 선거관리위원회 공무원직장협의회 회장을 역임한 한영수 씨도 그 중 한 사람이다. 한 씨를 비롯한 이들은 대선 이후 부정선거 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이재진)를 조직, 그동안 수집한 자료들을 토대로 중앙선관위 측과 8년째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한 씨는 현재까지도 관계 당국과 언론사 등에 “나를 비롯한 일각의 양심선언에 귀를 기울여 지금이라도 진실을 파헤치고 선거질서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 씨는 16대 대선이 무효라고 주장하는 이유에 대해 “부정선거의 가능성이 단 하나라도 있다면 그 이유만으로도 관련 기기에 대한 금지사유가 충분히 된다. 하지만 16대 대선은 검증되지 않은 프로그램이 장착된 전자개표기를 사용해 개표과정에서 있을 수 없는 치명적 오류들이 발생했다.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의 규정과 절차들을 위반하고 선거법위반행위에 대해 적절한 시정조치를 취하지 않은 채 조장·묵인하여 선거결과에 영향을 미친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씨는 이어 ‘대통령선거 무효소송’과 관련 2004년 5월 31일 이뤄진 대법원 최종 판결 또한 전산분야의 전문가적인 판단이 결여됐고 허위사실을 토대로 내려진 잘못된 판결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동안 선관위 측은 일각에서 주장하는 부정선거 의혹에 대해 “말도 안되는 얘기”라며 “통상 예견되는 개표기의 일시적인 오류나 일부 개표사무원 등의 실수를 일반화하여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는 셈”이라며 반박해왔다.
대선이 끝난 지 8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이들의 갈등.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 것일까. 그 핵심을 짚어봤다.
한 씨가 선거 무효의 근거로 들고 있는 것은 크게 다섯 가지다.
첫째, 2002년 대선은 선거법 부칙 5조에 의해 전자개표기를 사용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한 씨는 “16대 대선은 개표사무관리가 전산화에 의해 이뤄졌다. 전산조직에 의해 개표를 하는 경우에는 선거법에 따라 그 실시 여부에 대해 국회 교섭단체를 가진 정당과 협의해야 하는데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일 5일 전에 한나라당 등의 실무진에게 전산조직에 의한 개표를 하겠다고 통보했을 뿐 협의를 거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선관위 측은 “16대 대선에 사용된 개표기는 유효투표지를 골라 후보자별로 분류하여 투표지 매수를 자동으로 계산했다. 어느 후보자에게 기표한 것인지가 명확하지 않거나 훼손된 투표지 등 육안으로 판단해야 할 필요가 있는 투표지는 따로 분류됐다. 따라서 대선 개표는 개표사무관리의 전산화에 의한 개표가 아니었고 개표사무원의 투표지 분류를 보조해주는 용도로만 사용됐다”며 개표기 사용의 적법성을 주장했다.
둘째, 개표 절차상의 중대한 하자가 있었다는 점이다. 한 씨는 “혼표와 무효표를 가리기 위해 심사집계부에서는 분류된 투표지를 육안으로 확인하고 심사해야 하는데 이 과정이 생략됐다. 또 위원검열석에서 이뤄져야 하는 또 한 번의 투표지 검열 확인작업 역시 생략됐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선관위 측은 “개표기에서 분류된 투표지는 심사·점검부에서 다시 투표지 분류가 정확하게 되었는지 여부를 수작업으로 정밀하게 점검하고 심사·집계부마다 별도의 계수기를 설치하여 확인토록 했다”고 반박했다.
셋째, 개표과정에서 혼표 등 부정의혹이 있었다는 점이다.
한 씨는 “경기 안성시의 한 투표구의 투표지를 심사·집계하는 과정에서 노무현 후보의 투표지 한 묶음에 이회창 후보의 투표지 11매가 섞여 들어가고 무효표 1매도 섞인 사실이 발견되는 등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되는 일들이 전국적으로 여러 건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선관위 측은 “개표사무원이 개표기에서 투표지를 꺼내 후보자별로 모으거나 심사하는 과정에서 착오로 섞였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당시 이 사실이 발견돼 개표를 중단하고 다른 모든 투표지를 정밀 심사해 문제가 없다”고 설명했다.
넷째, 100매 묶음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 씨는 “개표기 운용부에서는 투표지를 확인해서 100매씩 묶었다고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를 증명해주는 사진도 있다”고 주장했다. “2003년 1월 27일 대전지방법원에서 이뤄진 검증에서 소송수행자가 ‘개표기에서 분류돼 나온 투표지가 일정한 매수가 되면 꺼내어 고무밴드로 묶는데 꼭 100매씩을 확인해서 묶지는 않는다’고 진술했음에도 대법원은 정확히 100매 묶음이 이뤄진 것으로 인정했다”는 것이 한 씨의 얘기다.
그 예로 한 씨는 노원구에서 전자개표기를 통과한 투표용지가 100표 단위 다발로 묶여있지 않고 110~700표 또는 1000표 이상이 한 다발로 묶여져 있는 경우가 속출했음을 폭로했다. 이는 개표시 사람의 손으로 직접 확인했다는 것에 의혹을 갖게 하는 부분이라는 것이다. 노원구선거관리위원회에서도 이 부분에 대해 인정한 바 있다. 해당 선거관리위원회에서는 “개표기에서 후보자별로 분류된 투표지를 수시로 꺼내 고무밴딩했으므로 정확히 100매 단위로 묶여져 있지 않을 수도 있다”고 대답한 바 있다. 다만 100매 단위로 묶는 것에 대해서는 “개표기에서 후보자별로 정확히 계수가 되기 때문에 큰 의미가 없다”고 설명했었다.
마지막으로 검증되지 않은 기기가 사용됐다는 것이다. 한 씨는 “대선에 사용된 전자개표기는 성능검증 테스트 자체가 실시되지 않은 것으로 당시 대선은 검증이 안된 전산조직 불법프로그램에 의해 이뤄진, 누구도 실체를 확인할 수 없었던 일종의 비밀개표나 다름없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선관위 측은 “입찰 참여업체 대상 장비성능 테스트를 실시했으며 16대 대선 사용 전일까지 실제 투표지 규격과 동일한 점검용 투표지로 속도 및 분류의 정확성 등 기기 성능을 수시로 검증했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양측의 주장은 팽팽히 맞서고 있다. 도대체 누구 말이 옳은 것일까.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 나온 후에도 그치지 않는 이 오래된 논란의 진실을 밝히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당시 투표지가 이미 모두 폐기 처분됐을 뿐 아니라 관련 증언을 해야 할 사람도 선관위 측 인사들이기 때문이다. 현재로서는 당시 개표에 참여한 참관인들의 진술을 통해서 확인하는 방법밖에 없다. <일요신문>에서 입수한 진술서는 모두 12건이다. 이 진술서를 보면 한 씨의 주장이 전혀 근거없는 얘기만은 아니었다. 특히 참관인들의 진술이 2002년 대선 관련 소송에서 법원에 증거자료로 제출된 것들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물론 이것도 그 숫자를 감안하면 전체를 대변할 수는 없다.
충북 OO시 개표소 참관인이었던 A 씨는 “이OO 사무국장이 검사부검표원에게 수작업으로 체크하지 말고 전자개표기에서 나온 그대로 넘기라고 해 지시대로 했다”고 진술했다. 경북 OO시 개표소 참관인이었던 B 씨는 “실제 투표인 수와 개표결과 투표인 수가 다르게 나왔는데도 참관인에게 한마디 설명도 없이 개표를 끝냈다. 또 전자개표기로 집계된 득표수에 대해서도 100매 단위 투표용지 검토를 요구했으나 선관위 직원이 거절했다”고 증언했다.
경남 OO군 참관인이었던 C 씨는 “최초 개표시에 1번 투표지가 2번 투표지에 섞여 들어감을 발견하고 이의를 제기해 재부팅을 한 후 재차 테스트를 한 다음에 개표작업이 진행됐다. 당연히 처음부터 다시 개표작업을 했어야 했지만 실제 작업은 중단된 부분부터 진행됐다. 또 전자개표기에 투입된 투표수와 개표기를 통과한 투표수가 차이(2매)가 발생했는데도 선관위 직원의 지시로 그냥 넘어간 적이 두 번이나 있었다”고 밝혔다.
심지어 대전광역시 OO구의 참관인 E 씨는 “개표기에 노무현 후보의 표가 200여 표가 나올 동안 이회창 후보의 표가 단 한 표도 없어 의아해 전산담당자에게 기계가 정상인지 물어보기도 했다”며 의혹을 제기했다.
인천의 한 개표소 참관인이었던 F 씨는 “전자 개표기 사전점검 때 4대의 개표기가 각각 다르게 인식되는 등 문제가 발견돼 몇 번이나 이의를 제기했으나 선관위 직원들은 ‘지난 6·13 지방선거 때 사용해보니 이상이 없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개표 당일에도 개표기의 ‘인식차’는 기호 1번과 기호 2번의 비율이 7:3 정도(100매가 통과될 때 기호 1번의 경우 용지걸림, 접힘의 경우가 기호 2번에 비해 배 이상 발생했다는 뜻임)로 일어났고 무효표도 1번이 많아 문제제기를 했으나 선관위 직원들은 1번의 경우 노인들의 투표성향이 높아 기표가 정확히 이뤄지지 않아서 그렇다고만 설명했다”며 “개표기와 시스템 검증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진술했다.
경기도 OO시 참관인이었던 G 씨는 “미 분류된 투표용지 분리작업 및 수작업 내용을 확인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으며 100장 묶음이 서로 섞이지는 않았는지에 대한 후보별 확인도 이뤄지지 않았다. 컴퓨터 인식집계와 수작업 집계는 개표 참관인에게 전혀 확인시키지 않고 통과됐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선관위 측은 보도자료를 통해 “개표참관인제도, 개표사무원의 육안확인과정, 전산보고와 팩시밀리 보고의 상호 교차 점검을 통한 결과 공표 등 개표과정의 검증절차를 알지 못하는 사람의 허위주장”이라고 일축했다. 선관위 측은 “개표참관인이 참여한 가운데 개표기를 가동했으며 개표기가 분류한 모든 투표지를 개표사무원이 육안으로 재확인하여 후보자별로 분류된 투표지에 타후보자의 표나 무효표가 섞여 있지는 않은지, 그리고 개표기가 분류·기재한 후보자별 득표수와 실제 투표지 매수가 일치하는지 등을 수작업으로 일일이 심사·확인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한 씨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로 개표에 걸린 시간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16대 대선 개표시간은 3시간 49분이었다. 개표기의 속도를 제외하더라도 이 시간 동안에 개표사무원과 위원들, 위원장이 검열하는 작업이 모두 이뤄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참고로 5년 뒤에 치러진 17대 대선은 개표기 속도를 1.5배 증가시키고 개표사무원을 2배로 늘려 16대 대선 때에 비해 개표속도가 3배나 빨라졌음에도 개표시간은 5시간 이상이 걸렸다. 선관위 측의 주장대로라면 17대 대선 개표시간은 1시간 17분이면 끝났어야 했다. 이것이 16대 대선 당시 수작업을 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라고 주장했다. 즉 대선 개표는 컴퓨터에 의한 인식만으로 이뤄졌을 뿐 선거법 제278조 3항에 규정돼 있는 육안에 의한 확인·심사·검열 절차가 없었다는 것이다.
16대 대선의혹을 주장하고 있는 이들은 “2002년 대선무효소송은 재심의해야 하고 부정선거 관련자들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선이 끝난 지 8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가시지 않는 전자개표 논란. 이 오래된 논란의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일부의 주장처럼 그것이 당락에 영향을 미칠 만큼 득표수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지라도 절차상으로는 상당 부분 문제가 있었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재발방지 차원에서라도 당시의 개표 과정에 있었던 절차상의 문제점에 대한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한 씨 등의 목소리는 설득력이 있다는 지적이다.
대선무표 주장근거
-전자개표기 사용금지 조항 위반
-혼표·무효표 육안 확인 안했다
-개표과정 상대후보 간에 표 섞여
-투표용지 100매 단위로 안 묶어
-검증되지 않은 기기가 사용됐다
선관위의 반박
-개표 사무원 보조 역할만 했을 뿐
-수작업으로 정밀하게 투표지 분류
-착오 발생한 투표구는 재점검했다
-개표기로 계수가 돼 큰 의미 없어
-대선 전날까지도 기기성능 점검해
이수향 기자 lsh@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