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사건을 해결하는 데는 무엇보다 경찰의 노력이 컸다. 10여 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 무심히 넘어갈 만도 했지만 경찰은 예전의 수사파일을 다시 뒤져가며 아이를 끝까지 찾아냈던 것. 포기하지 않은 경찰이 자포자기 상태에 있던 가족들과 평생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살아갈 뻔한 A 양에게 제2의 인생을 찾아줬다고 모두가 입을 모으고 있다. 눈물겨운 A 양 가족의 사연과 경찰의 수사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지난 1월 16일 대전의 한 보육원에서 고아로 지내던 A 양은 가족들과 극적으로 상봉했다. 아버지는 바쁜 일 때문에 끝내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많은 가족들이 A 양을 찾아왔다. A 양의 언니와 오빠, 할머니 그리고 친척 할아버지까지 모두 4명이 김해에서 대전 보육원으로 찾아왔고 이들은 끝내 한데 뒤엉켜 눈물을 흘렸다.
이들의 가족 상봉은 경찰이 애초 계획했던 것보다 일주일가량 앞당겨져 갑작스럽게 이뤄졌다. 10년 전 A 양을 잃어버렸던 할머니가 경찰서를 무작정 찾아와 울면서 “만사를 제쳐놓고라도 당장 만나야겠다”고 말해 경찰도 만사를 제쳐놓고 일정을 앞당겼다고 한다. 그날 바로 할머니를 포함한 가족들은 경찰 차량을 타고 대전 보육원을 찾아왔던 것이다.
10년 전 할머니를 따라 부산의 한 시장에 옷을 사러 갔던 A 양은 돌아오던 길에 부산역에서 할머니의 손을 놓쳐 길을 잃고 말았다. 할머니가 업고 있던 A 양을 잠시 내려놓은 것이 화근이었다. 당시 A 양은 말도 제대로 못하던 세 살짜리 어린아이였다.
A 양의 할머니와 가족들은 곧 바로 경찰에 실종신고를 하고 부산 경남 일대를 이 잡듯이 뒤졌고 이후에도 몇 년간을 포기하지 않고 부산 인근의 보육원 등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A 양의 할머니는 “2년이 넘게 전단지를 뿌리고 찾아볼 만한 데는 다 찾아봤지만 아이를 끝내 찾을 수 없었다”고 당시의 상황을 전하며 흐느꼈다.
2년 후 A 양의 가족들이 김해로 이사하면서 가족들은 거듭되는 생활고에 지치고 또 다른 일이 겹쳐 A 양을 찾는 것을 거의 포기하기에 이른다. 처음 미아 실종 신고를 했던 부산지역 경찰서에서 김해지역 경찰서로 미아 찾기 신고를 이전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고 A 양 가족들은 털어놨다. 그런 속에서 세월이 흘러갔고 A 양의 가족들은 A 양이 가끔 생각날 때마다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기만을 바랐다.
그러면서 가족들은 A 양을 차츰 잊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가족들 기억속에서도 가물가물한 A 양을 다시 불러낸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김해 중부경찰서 생활안전계 팀이다. 생활안전계의 김기범 팀장은 “지난 7월 사건파일을 정리하다 미제사건으로 남아있던 A 양 실종 사건을 발견했는데 그 순간 실종아동전문기관에서 구축하고 있는 DNA 데이터베이스가 생각났다”고 말했다.
지난해 9월경 경찰은 A 양의 아버지 B 씨에게 연락을 취해 DNA 샘플을 채취했고 이를 국과수에 보내 A 양의 소재를 찾아 나섰다. 이후 ‘실종아동전문기관’은 경찰에게 “대전의 한 보건소에 있는 A 양의 DNA와 B 씨의 DNA가 80% 일치한다”는 통보를 해왔다. 그후 정밀감식을 한 국과수에서 지난 12일경 “A 양과 B 씨의 DNA가 99% 일치한다”는 최종 통보를 해왔다. 이렇게 해서 이들 가족의 눈물겨운 상봉이 이뤄졌던 것이다.
상봉 당시 A 양은 자신의 나이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보육원에서 어림짐작으로 나이를 정한 탓에 중학교에 진학해야 할 A 양은 이제 초등학교 6학년생이었다. 물론 자신의 성도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가족 간의 상봉도 잠시. 안타깝게도 A 양은 여전히 보육원에 남아있다. 경찰은 “가족들의 경제사정이 너무 안 좋아 우선은 보육원에서 생활하다가 형편을 봐가면서 집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A 양의 아버지 B 씨는 공장에서 일하는 일용직 노동자이고 A 양의 오빠는 언어장애를 앓고 있는 상황이다. A 양의 할머니는 “가정형편이야 어쨌건 지금 당장 애를 데려가고 싶다”며 흐느끼기도 했다.
김장환 기자 hwan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