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 A 회장인데 아무개 좀 바꿔봐.”
지난해 3월 10일 S 기업의 한 계열사에 한 통의 ‘이상한 전화’가 걸려왔다. 자신을 S 그룹의 오너, 즉 A 회장이라고 밝힌 정체불명의 인물이 B 임원을 바꿔달라고 전화를 걸어왔던 것. 그러나 프런트데스크 직원은 믿을 수 없었다. A 회장이라면 직접 자신이 전화를 걸리도 없거니와 임원에게 볼일이 있으면 임원 본인이나 비서실로 전화를 걸 것으로 생각됐기 때문이다.
“장난치시면 안됩니다.”
이 직원은 친절한 목소리로 응대한 후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자칭 A 회장은 또 전화를 걸어왔다. 똑같은 목소리에 짜증이 날 법도 했지만 이 직원은 이번에도 “장난치지 마시라”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이후 자칭 A 회장은 무려 6번이나 전화를 더 걸어왔다. 대표전화로 전화를 걸었기 때문에 중간에 다른 직원이 전화를 받는 경우도 있었지만 “장난치지 마세요”에서 “전화번호를 남겨주세요”로 멘트만 바뀌었을 뿐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B 임원은 A 회장의 자녀 중 한 명이었다. 오너가 자기 자식을 찾으면서 회사 대표번호로 전화를 걸어오리라고는 생각하기 쉽지 않고 또한 항상 수행비서와 함께 다니는 A 회장이 직접 몇 번씩이나 전화를 건다는 것도 보통의 시각으론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
자칭 A 회장의 전화는 우여곡절 끝에 B 임원의 비서실로 연결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비서도 ‘장난전화’로 끊어버렸다. 직원 중 한 명이 계속해서 전화가 걸려오자 마지못해 B 임원의 비서에게 전화를 연결해주긴 했지만 이 비서 역시 ‘할 일 없는 사람의 장난전화’ 혹은 ‘회장을 사칭해 임원에게 악담을 퍼부으려는 사람’으로 생각했다는 것.
이렇게 자칭 A 회장은 무려 8번이나 전화를 걸었지만 B 임원과 연결하는 데 실패하고 만다. 모두들 바쁜데 장난전화까지 걸려온다고 투덜대긴 했지만 곧 잊고 평소처럼 업무에 열중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이 회사는 비상이 걸렸다. 회사 입구에서 150여m 떨어져 있는 경비실에서 “회장님이 올라가십니다”라는 무전이 날아온 것. 평소 A 회장은 사전 연락 없이 나타나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전 직원들이 의아해하면서도 일순 긴장했다.
어쨌든 A 회장은 정문에 당도했고 직원들은 앞 다퉈 정문으로 뛰어갔다.
그런데 회장의 표정을 본 직원들이 ‘아차’ 싶었다. 바로 앞서의 그 ‘장난전화’가 생각난 것. 붉으락푸르락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문을 들어서는 A 회장을 본 사람들은 대부분 당황했고 특히 전화를 받았던 사람들은 좀전의 상황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던 것. 그리고 그들의 우려는 들어맞았다. 회장을 사칭한다고 생각했던 전화 속의 인물은 불행히도 실제 A 회장이었던 것. A 회장의 호된 질타가 이어졌음은 물론이다.
B 임원의 사무실까지 한달음에 올라간 A 회장은 그 자리에서 이 회사의 전 임원진을 호출했다고 한다. 이 회사의 한 관계자는 “전화를 받았던 사람들을 부른 것은 아니고 윗선들을 불렀던 것으로 안다”며 “윗분들은 예절교육 등과 관련 A 회장에게 호된 질책을 받은 것으로 들었다. 상관들이 그렇게 혼났는데 아랫사람은 어땠겠냐. 관련자뿐만 아니라 사원들 전체가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고 말했다.
이날의 사태가 그대로 끝났다면 ‘3·10 사태’로까지 불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날 이후 지난 한 해 동안 이 회사에서는 단 한 건의 임원진 인사도 없었다고 한다. 이 회사에서 5년째 일하고 있다는 한 직원은 “내가 입사한 이후에 이제껏 임원진 진급 인사가 없었던 것은 지난해가 처음이었다”며 “회사 내에선 그날 일이 회장님 심기를 건드려서 임직원 인사가 동결됐다는 말이 돌았다”고 말했다.
물론 회사 측에서는 “당시의 일과 임원진 인사는 전혀 무관하다”고 말하고 있다. 회사 측의 한 인사는 “대내외적으로 경제적 사정이 어려웠다. 특히 우리 업계가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 아니냐”며 “그런 사정 때문이지 그 일을 결부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한편 A 회장이 왜 이런 식의 전화를 했었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혹자는 “서비스업체인 만큼 전화를 받는 태도에서 친절도를 알아보려고 했던 것 아니겠느냐”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렇더라도 전화를 무려 여덟 번씩이나 건 부분은 아직도 미스터리라고 한다.
김장환 기자 hwany@ib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