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중토크’ 중간 결산편을 통해 그동안 경기장에선 엿볼 수 없었던 선수나 감독들의 색다른 면면들을 몇 가지 유형별로 분류 정리해 본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운동선수들은 대부분 술을 잘 마신다. 주량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주당들도 꽤 많다. 그 중에서 최고의 주당을 꼽으라고 한다면 역시 얼마 전에 은퇴한 허재가 단연 1위를 달린다.
허재와의 ‘취중토크’를 약속한 뒤엔 내심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주위에선 ‘감히’ ‘어떻게’ 허재와 술 마실 생각을 했냐며 기막혀 할 만큼 기자의 ‘무대뽀’ 정신에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하여튼 술이 덜 취한다는 드링크제까지 마시는 등 나름대로 무장을 한 채 여의도의 한 복집에서 만나 소주를 마시길 두어 시간여. 식탁 밑에 빈병이 8개가 쌓이는 걸 확인한 뒤 2차를 가기 위해 택시에 올라탔고 말짱한 허재와는 달리 심히 ‘알딸딸’해진 여기자는 2차에서 허재가 돌린 폭탄주 다섯 잔에 맛이 가기 시작했다.
선수들 앞에선 절대로 마이크 잡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깨고 허재와 지인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메들리로 노래를 불러 제쳤고 심지어 허재의 노래에 백댄서로 등장하는 추태도 마다하지 않았다. 허재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더 이상 망가지기 전에 자리를 뜨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에 몰래 도망쳐 나오면서도 허재의 위대한 주량에 심히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축구선수 신태용(성남 일화)은 수다도 잘 떨었고 술도 잘 마셨다. 보통 ‘중간 계투’나 ‘백업 요원’으로 등장했던 사진기자 없이 기자 혼자 술상대로 나섰기 때문에 엄청 부담스러우면서도 ‘설마’하는 단순한 생각에 겁 없이 달려들었다가 낭패를 본 케이스였다.
신태용은 ‘취중토크’라는 인터뷰 스타일에 많은 준비를 한 듯 오히려 분위기를 주도했고 술 인터뷰를 하는 기자라면 이 정도의 술은 마실 줄 알아야 한다며 기자의 주량을 업그레이드 시켰다. 둘이서 소주 4병을 비우고 2차를 간 곳은 모 호텔 지하의 단란주점. ‘지원군’이라도 있었다면 ‘쉼표’를 찍으면서 마시겠는데 달랑 두 사람뿐이라 스트레이트로 술잔을 주고 받다보니 ‘꼭지’가 심히 도는 걸 느꼈다.
▲ 박지성 최희섭 최성국(왼쪽부터)은 스포츠 선수로는 드물게 술은 잘 못한다고. | ||
메이저리거 서재응(뉴욕 메츠)과의 ‘취중토크’는 실로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했다. 서재응은 귀국 후 쏟아지는 인터뷰 요청을 거절하고 광주 집으로 내려가 칩거중에 있었던 것. 평소 서재응 아버지와의 친분을 이용(?)해 광주로 내려간 기자한테 서재응은 피곤함을 물리치고 ‘나이스 가이’다운 매너와 답변으로 분위기를 주도했다.
소주 7병이 최고 주량이라는 서재응은 술을 따르면 바로 ‘원샷’으로 해치웠다. 운동선수들 사이에서 ‘체격=술통’이라는 말이 통용되는데 서재응이 바로 그런 선수였다. 서재응은 싱글 A시절, 동료 선수들이 ‘술도 못 마신다’고 시비를 걸자 ‘오늘 너희들 한번 죽어봐라’하는 심정으로 캔맥주 48개로 ‘맞장’을 떴다가 모든 선수들을 넉 다운 시킨 일화를 공개하면서 5년간의 마이너리그 생활의 고단함과 외로움 등을 화려한 입담으로 풀어냈다.
서재응이 말술이었다면 최희섭(플로리다 말린스)은 받아 놓은 술잔에 입술만 적실 뿐 술을 마시지 못했다. 남해 전지훈련지에서 만난 최희섭은 무려 5시간의 기다림 끝에 모습을 드러냈다. 서울에서 늦게 출발하는 바람에 약속 시간을 맞추지 못했던 그는 미안함을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 성의있는 인터뷰 태도로 취재진의 불편한 기분을 희석시켜 나갔다.
최희섭은 대학 신입생 환영회에서 ‘사발식’도 뒤탈 없이 치렀고 남들 노는 것만큼 즐거운 학창시절을 보냈지만 미국으로 진출하면서 이전의 화려함과 놀이문화를 모두 버리고 갔다고 말했다. 심지어 자존심까지 한국에 두고 갔다고 말한 부분에선 메이저리그에 적응하기 위해 처절할 정도의 노력을 기울인 ‘용병’ 최희섭의 단면을 엿보는 기분이었다.
‘순둥이’ 박지성(에인트호벤)과 ‘리틀 마라도나’ 최성국(울산 현대), 프로농구 원주 TG의 전창진 감독도 술과는 인연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술을 못 마시는 취재원을 만나면 대부분 기자가 더 오버해서 술을 마시게 된다. 맨송맨송한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선 누구든 한 명은 ‘지름길’이 아닌 ‘갈짓자’ 행보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전창진 감독은 외견상의 ‘견적’은 말술임이 분명한데 술을 한 모금만 마셔도 얼굴이 빨개지고 몸 안의 흥분 수치가 최고조에 다다른다며 손사래를 치는 바람에 오히려 기자가 당황했던 케이스였다.
경기장에서 뛰는 선수와는 달리 술 마시기에 있어 비교적 자유로운 감독들과의 술자리는 ‘연출’이 없다는 게 특징이다.
그 중에서도 야구 감독들 사이에서 ‘주군’으로 꼽히는 삼성 김응용 감독은 처음엔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튕기던’ 태도를 버리고 맥주와 백세주를 연거푸 들이키는 ‘꾼’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 조계현 코치의 술 실력은 스포츠 스타들 중 단연 ‘으뜸’이었다. | ||
삼성화재의 ‘우승 청부사’ 신치용 감독은 약속 장소에 나오면서 미리 준비해 온 양주 2병을 꺼내놓아 기선제압을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취중토크’를 대비해 소장하고 있던 양주들 중 특별 엄선해 골라왔다는 신 감독은 스트레이트로 계속 ‘원샷’을 권유하는 바람에 두 시간여에 걸친 인터뷰 말미엔 기자의 혀가 꼬부라지고 졸음이 쏟아지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소주에 적응해 있던 몸 안의 ‘기관’들이 예고 없이 들이 닥치는 양주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 탓도 있지만 취기를 더한 건 신 감독의 현란한 말솜씨 때문이었다. 수많은 선수들을 어르고 달랜 능숙한 입담으로 인터뷰를 주도해 나간 신 감독한테선 ‘우승 청부사’란 살벌한 타이틀보다 ‘웃음 제조기’라는 수식어가 훨씬 그럴 듯해 보일 정도였다.
여자 선수로부터 ‘러브레터’를 받았다고 수줍게 고백을 한 프로농구 김태환 전 LG 감독과 ‘고향’ 같았던 수원 삼성에서 나와 ‘야인시대’로 돌아간다며 낮술로 분위기를 낸 김호 감독, 그리고 언론에 잘못 알려진 ‘노총각’이란 타이틀을 정정하며 한때 결혼했다가 이혼했고 전 부인한테 아이도 있다고 최초로 고백한 여자 프로농구 우승팀 금호생명의 김태일 감독도 ‘취중토크’에서 만난 결코 잊을 수 없는 감독들이다.
한편 배드민턴계의 ‘환상의 복식조’로 세계무대에서 경이적인 기록들을 경신하고 있는 김동문-라경민은 각각의 술자리에서 서로에 대한 호감을 나타내 아테네 올림픽 이후 두 사람이 어떤 행보를 나타낼지 관심을 모았다. 얼마전 미LPGA ‘명예의 전당’에 올라 코리아의 이름을 드높인 박세리는 ‘이젠 결혼하고 싶다’고 밝혀 골퍼 이전에 여자로 살고 싶은 속내를 드러내기도 했다.
‘취중토크’를 통해 간절히 만나길 소원(?)했던 황선홍은 대학시절 처음 나간 미팅에서 축구선수인 자신보다 더 다리가 두꺼운 여학생과 파트너가 된 이후론 미팅에 대한 희망을 버렸다는 일화를 털어 놔 주위를 포복절도하게 만들기도 했다.
‘취중토크’ 중간 결산을 하며 진정한 바람 한 가지가 있다면 각 종목별 ‘주당’들과 술 방담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다. 시간은 무제한, 끝까지 남아 있는 사람이 챔피언의 영광(?)에 오르는 조건을 내건다면 과연 어느 누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까. 경험상의 정답을 말한다면 허재도, 신태용도 아닌 아무리 폭탄주를 들이켜도 너무나 말짱했던 ‘팔색조’ 조계현(현 기아 투수 코치)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