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력 정치인이나 기업인들이 스포츠단체 회장을 앞다퉈 맡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회사와 개인의 이미지 제고에 큰 힘이 되고 해당 종목에서 무시하지 못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무형의 이익이 만만치 않은 것이다. 특히 기업인에게는 기업이윤의 사회환원을 가장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삼성도 이건희 회장이 1996년부터 IOC위원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것을 비롯해 빙상(박성인), 육상(신필렬 삼성전자 사장), 승마(안덕기 삼성그룹고문, 이건희 회장이 명예회장), 레슬링(천신일 세중여행사 대표-삼성그룹의 여행 업무를 대행하고 있는 회사다) 협회의 회장사를 맡고 있다. 또 예전엔 탁구와 태권도협회를 맡기도 했다.
IOC위원으로 국제무대에서 스포츠 파워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건희 회장과 삼성이 ‘차세대 왕회장’인 이재용 전무에게도 그에 걸맞은 스포츠계 위상을 마련하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이다. 특히 이 전무는 경복고와 서울대 동양사학과(87학번) 재학시절 제법 실력 있는 승마선수로 활동했고 국가대표까지 지내는 등 스포츠에 관심이 많다. 지난해 12월 도하아시안게임에서 참변을 당한 고 김형칠 선수의 빈소를 직접 방문해 조문하는 등 확실한 승마인이다. 이 전무는 승마는 물론이고 싱글 수준의 골프실력과 야구광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게이오대학과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공부한 까닭에 국제스포츠계에서 활동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어학 실력도 갖추고 있다. 학창시절 레슬링을 한 아버지에 비하면 스포츠와의 거리감은 훨씬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삼성스포츠단의 한 관계자는 <일요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이재용 전무가 과테말라 IOC총회에 앞서 지난 4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스포츠어코드(국제경기연맹총연합회)에도 조용히 참석했다”고 전했다. 지난 2월 공식적으로 삼성 후계자로 전면에 나선 이후 국제스포츠계에서도 활발히 물밑 활동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이 전무는 베이징과 과테말라에서 삼성과 아버지의 후광에 힘입어 세계 스포츠계의 주요 인사들과 접촉하며 인맥을 튼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이 전무의 스포츠계 활동에는 2005년 삼성전자 전무로 자리를 옮긴 이인용 전 MBC부국장이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과테말라 총회에 다녀온 대한체육회의 한 관계자도 “삼성의 이재용 전무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국내 스포츠계에서 중요한 보직을 맡고 더 나아가 장기적으로 IOC위원까지 바라본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다. 국내 스포츠 발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렇듯 분위기는 고조되고 있지만 정작 이재용 전무와 삼성 측은 공식적으로는 황태자의 스포츠계 진출을 부인하고 있다. 삼성전자 홍보실의 한 관계자는 <일요신문>의 질의에 “당장에 이재용 전무가 스포츠단과 관련해서는 보직을 맡지 않을 것이다. 스포츠단체의 장을 맡더라도 50세, 그러니까 한 10년 후에나 가능한 얘기다. IOC위원도 이건희 회장이 80세까지 할 수 있는 마당에 지금은 너무 이른 얘기다. 과테말라 동행은 큰 의미가 없다. 유치 활동을 돕기 위해 많은 삼성임원이 동행했고, 이재용 전무도 그 일원이었을 뿐”이라고 밝혔다. 전체적으로 아직은 때가 이르다는 반응이다.
▲ 2004년 올림픽 개최지인 아테네에 모습을 보인 이건희 회장과 이재용 당시 상무(오른쪽 끝). | ||
이미 삼성스포츠단 내에서는 ‘포스트 박성인’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고 있다. 내부적으로 신필렬 육상연맹회장과 삼성화재의 신치용 감독이 주목받고 있다. 신 회장은 75년 삼성물산에 입사해 그룹 내부 사정에 밝고 행정 능력도 이미 검증받았다. 또 삼성 라이온즈 사장을 역임해 프로스포츠에 밝으며 대한육상경기연맹 회장으로서 대구세계선수권을 유치하는 등 아마 종목과 국제흐름에도 해박하다. 최고의 배구감독으로 평가받는 신치용 감독은 박성인 회장과 같은 경기인 출신이라는 장점과 전문CEO를 능가하는 조직관리 능력과 인품을 갖췄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아직 박성인 회장이 건재하다는 점에서 신 회장과 신치용 감독 측은 삼성스포츠의 최고위직에 대한 입장 표명을 미루고 있다. 부장으로 입사해 현재 상무에까지 오른 신치용 감독은 “나는 그만한 역량이 안 된다. 배구단 감독 역할에만 충실할 뿐”이라고 일축했다. 신필렬 회장 측도 “아직 그런 얘기를 할 단계가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하지만 삼성스포츠단 최고위직에 대한 조정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거쳐 2008년 말이나 2009년 초에 본격화될 전망이다. 대한체육회 등 국내 주요 스포츠단체는 4년 주기로 열리는 올림픽에 회장의 임기를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재용 전무의 스포츠계 진입이 자연스럽게 이뤄질 절호의 기회인 셈이다. 즉 올림픽 후 열리는 체육단체 개편 때 이재용 전무가 현재 삼성이 맡고 있는 경기 단체 중 하나를 택해 회장을 맡을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2011년 대구세계육상선수권을 유치한 육상연맹이나, 박성인 회장이 길을 잘 들여놓은 빙상연맹이 유력한 것으로 예상된다.
대한육상경기연맹의 서상택 총무이사는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과정에서 잘 드러났듯이 삼성그룹 차원에서 스포츠는 주요 관심사 중 하나다. 이건희 회장을 보좌하는 삼성의 주요경영진이 여러 스포츠단체장을 맡아왔듯이 이재용 전무가 스포츠와 관계된 일을 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유병철 스포츠전문위원 eine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