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욕 인근의 노포크 원정 경기 중에 만난 류제국. 전날 류제국이 선발 등판한 상태라 이날은 더그아웃이 아닌 관중석에서 기자와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소피 J. 신 프리랜서 | ||
류제국은 한마디로 유쾌 통쾌 상쾌한 선수다. 2001년 덕수정보고에서 시카고 커브스 입단식을 열었을 당시 첫 대면 후 7년 만에 만난 류제국(물론 류제국은 기자의 얼굴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당시 워낙 기자들이 많이 몰렸으니까)은 어느새 미소년에서 유머러스러한 건강 청년으로 훌쩍 성장해 있었다. 겉모양새보다는 정신적인 성숙미가 더 돋보인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기자가 류제국을 만났을 때에는 정규 시즌 종료 직전이었고 기자와 인터뷰를 하기 전날 선발 등판한 상태라 류제국은 더그아웃이 아닌 관중석에 앉아 스피드건으로 상대 투수의 볼 빠르기를 측정하는 등 한결 여유로운 모습이었다(메이저리그에선 스피드건 측정이 기록원의 몫이지만 마이너리그는 경비 절감 차원에서 선발 투수들만이 그 일을 대신한다고).
미국에 진출한 한국 선수들 중 류제국처럼 루키리그부터 메이저리그까지 두루 다 경험해본 선수는 없을 것이다. 소속팀은 비록 시카고 커브스와 탬파베이 더블레이스, 딱 두 팀이었지만 루키리그부터 싱글A, 더블A, 트리플A, 빅리그를 거치며 옮긴 팀만도 11번이다.
―미국에 온 지 벌써 7년이나 됐네요. 정말 세월 빨라요.
▲처음 3~4년간은 굉장히 힘들었어요. 일어나서 울고 자기 전에 울고, 정말 적응하기 어려운 나날의 연속이었죠. 운동장 나가기 싫어서 도망친 적도 있었어요. 웃자고 얘기한다면 전 치훈이 형(류제국의 에이전트 회사 사장인 이치훈 씨)한테 완전 속은 거예요. 한국에 있을 때만 해도 전 제가 최고인 줄 알았거든요. 메이저리그, 까짓것 금방 올라갈 수 있다고 자신했었죠. 치훈이 형도 조금만 고생하면 빅리그에 올라가는 건 어렵지 않을 거라고 말했구요. 그런데 막상 와서 보니까 장난 아니더라구요. 루키리그라곤 하는데 하나 같이 실력들이 루키 이상이었어요. 그 애들이 루키라면 도대체 메이저리그에서 공 던지는 선수는 얼마나 대단한 거야 하는 생각도 들었었죠.
―시카고 커브스 입단 당시 한국에선 김진우의 해태 타이거즈(현 KIA) 입단이 화제였어요. 엄청난 계약금과 특급 대우를 받았잖아요.
▲저나 진우나 고등학교 시절 정상의 자리를 쥐락펴락했던 처지라 우리들의 행보에 언론의 관심이 많았죠. 고교야구의 양대 마운드로 불린 선수가 한 명은 한국에 남고 또 다른 한 명은 미국에 진출을 했으니까요. 초창기에는 무지 괴로웠어요. 전 루키에서 주급 80달러 받고 햄버거로 끼니를 때운 반면 (김)진우는 입단 이듬해 12승을 올리며 프로 3년차에 억대 연봉 대열에 올라섰으니까요. 솔직히 그때 심정은 당장 보따리 싸서 한국 들어가고 싶었어요.
―심정적으로 충분히 이해가 되네요. 그런데 지금은 너무나 다른 처지가 됐어요. 김진우는 지금 팀을 이탈해서 야구를 계속 하느니, 마느니 하고 있잖아요.
▲저도 그 부분은 무척 안타까워요. 사정을 잘 모르겠지만 진우만의 책임은 아닐 거예요. 주위에서 진우를 가만두지 않았을 테니까요. 저도 심각하게 한국행을 고민한 적이 있었어요. LG에서 러브콜이 있었거든요. 돈만 따졌다면 벌써 갔을 거예요. 돈보다도 가족들, 친구들이 있는 데서 즐기며 야구하고 싶었어요. 고생하는 게 지긋지긋했었죠. 저만큼 화려한 이력을 갖춘 선수는 없을 걸요. 각 리그를 두루 거쳐봤으니까요.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좋은 경험이었어요. 만약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하지 못한다고 해도 나중에 뭔가 할 얘기가 많을 것 같아요.
―올시즌 자신의 성적에 대해 만족하는 편인가요.
▲만족해요. 시즌 개막 때 25명의 로스터에도 들어가 봤구요, 생애 처음으로 양키스타디움에서 공을 던지기도 했었죠. 물론 1⅔이닝 동안 5실점하고 다시 마이너로 내려왔지만 올시즌 체중 조절에 엄청 스트레스 받으면서 열심히 달려왔어요. 9월 1일 빅리그 복귀 기회가 있는데 그때 다시 불러준다면 기분 좋은 거구 아니면 말구요(아쉽게도 류제국은 빅리그의 부름을 받지 못했다).
―류제국 하면 떼려야 뗄 수 없는 사건이 있었죠. 다시 거론하기 미안한데 그때 일을 묻지 않을 수가 없어요.
▲아, 새 맞힌 사건이요. 이젠 괜찮아요. 얼마든지 편하게 얘기할 수 있어요. 한국에는 ‘물수리 사건’으로 알려졌잖아요. 그 사건 이후 한 일주일 동안은 알렉스 로드리게스 안 부러웠어요. 어딜 가나 방송 카메라와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으니까요. 마치 할리우드 스타가 된 듯했어요. 야구 선수 중에 CNN에 나온 선수는 저밖에 없을 걸요.(웃음)
―경찰들이 보디가드를 자처했다면서요.
▲제가 운전하면 앞뒤로 경찰차들이 따라 붙었어요.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제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서래요. 미국 사람들이 절 ‘버드 킬러’라고 손가락질하는 상황에서 언제 어느 때 위험한 일이 발생할지 모른다면서요. 협박 편지도 수없이 받아봤구요, 제 사진에다 눈과 입을 오려서 보낸 사람도 있었어요. 솔직히 봉사활동하기 전까지 잠을 제대로 못 잤어요. 너무 무서웠거든요. ‘돌아가신’ 새로 인해 제 야구 인생도 쫑 날 뻔했죠. 그래도 한국분들이 많이 격려를 보내주셨어요. 신경 쓰지 말고 야구만 잘하라면서. 시간이 흐르면서 되돌릴 수 없는 사건이라면 도망다니지 말고 차라리 즐기자고 마음먹었어요. (웃으며)야구선수가 CNN에도 나왔는데, 진짜 대성할 선수 아니냐, 너희 중에 새 맞힐 수 있음 나와 봐, 뭐 이렇게 들이대면서 안정시켜 나갔죠.
▲ 류제국의 ‘히스토리’가 담긴 사진들. 2001년 시카고 커브스 계약 당시(맨 위), 같은 팀에 있는 서재응과(가운데), 지난 2003년 겨울 한국에서 봉중근과 훈련하던 모습. | ||
▲억울하잖아요. 새 때문에 야구 그만두면. 그리고 그 일로 미국을 떠난다면 제 자신에게 지는 거죠. 재미있는 건 그렇게 큰 일을 당한 이후에 오히려 성적이 좋았다는 사실이에요. 그 사건이 플로리다주 데이토나에 위치한 하이 싱글A 시절 벌어졌는데 법원에서 3년간 플로리다 접근 금지 명령을 내렸어요. 결국 미시간주 랜싱의 로우 싱글A로 쫓겨갔어요. 당시 너무 고통이 심해 매일같이 술로 살다시피했었죠. 등판 전날에도 술을 마셨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성적이 좋은 거예요. 6승 1패에 1점대의 평균 자책점으로 올스타에 뽑혔을 정도였어요.
―올시즌은 메이저리그보다 마이너리그에서 뛰는 한국 선수들이 훨씬 많았어요. 시즌 초 박찬호부터 서재응, 추신수 등 메이저리그 승격에 기대를 모았던 선수들이었는데 결국 마이너에서 시즌을 끝내게 됐잖아요.
▲건방지게 들리시겠지만 절 포함해서 모두 자기 발전이 없어서 그래요. 여기선 자기 발전 없인 못 이겨요. 처음에는 정말 죽기살기로 열심히 하죠. 그러다 메이저에 올라가고 한국 언론에서 빅스타로 띄워주고 한국 들어가서 귀빈 대접받고 돌아오면 자신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어요. 제가 봐도 형들은 대단해요. 한눈 안 팔고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그 열심만으로 안 되는 게 분명히 있거든요. 바로 ‘헝그리 정신’입니다. 찬호 형이나 병현이 형처럼 많은 걸 가지진 못했지만 그래도 다들 먹고 살 만해요. 그러다보니 조금씩 풀어지는 게 있어요. 그중 가장 큰 문제아는 바로 류제국이죠.
―왜 자신을 문제아라고 생각해요.
▲문제아라기보단 멍청해요. 전 홈런이나 안타 맞는 건 신경 안 쓰는데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걸 되게 싫어해요. 완전 단순 무식하다고나 할까. 제가 던진 공이 안타 맞으면 계속 그 공만 던져요. 칠 테면 쳐보라는 식으로. 그러다 발목 잡히고 봉변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죠. 전 자기 관리도 잘 못하는 데다 유혹에 쉽게 넘어가고 귀가 얇아요. 그래서 살이 찌는 것 같아요. 죽을 둥 살 둥해서 살을 빼놓고 유혹에 못 이겨 또 다시 살이 찌고. 절박한 뭔가가 사라진 거죠.
(류제국은 선배에 대한 ‘뒷담화’가 아닌 자기 자신의 문제점을 솔직하게 고백하려 했다. 온갖 풍파 겪으며 7년을 버텨낸 미국 생활이 이젠 어느 정도 익숙해진 상태라 미국에 진출한 첫 해 가졌던 도전 의식과 목표가 아쉽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잠시 주춤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한국의 루키들이 미국 야구에 도전을 하고 있어요. 후배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고등학교 때까지 전 야구를 정말 사랑했어요. 그런데 미국 진출하고 2005년까진 야구를 증오했어요. 당시 가장 가슴 아팠던 게 그렇게 좋아했던 야구를 증오하게 됐다는 사실이죠. 그때 향수병에 빠져 증오심을 키울 시간에 야구에 더 투자했더라면 지금보다 더 좋은 위치에 있었을 겁니다. 얼마 전 정영일(LA 에인절스)에게도 했던 말이에요. 야구를 사랑하라고. 야구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는다면 네가 미국이든 일본이든, 어디서 야구를 해도 행복할 거라구요.
―7년 전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다면 그때도 같은 선택을 할 건가요.
▲당연하죠. 아무리 힘들어도 미국을 선택했을 겁니다. 솔직히 미국 야구 정말 싫어해요. 인종 차별도 심하구요. 하지만 여기엔 세계에서 가장 야구 잘하는 사람들이 모여있으니까, 그들 틈에서 오락가락하며 야구할 수 있으니까,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거죠.
말투는 가벼웠지만 그의 말 속에는 지난 7년간 미국 야구 도전사의 희로애락이 몽땅 담겨 있었다. 다소 엉뚱하고, 너무 솔직하고, 굉장히 재치있는 젊은 청년의 결코 녹록지 않은 히스토리가 평범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노포크=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