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그러나 10월 4일 대전 시티즌 숙소에서 만난 고종수는 과거의 그가 아니었다. 굴곡 많았던 축구 인생은 경험과 연륜으로 남았고 세상에 대해, 언론에 대해, 사람들에 대해 가졌던 원망과 상처는 오기와 결의로 승화시킨 것 같았다.
지난해 말 기자의 기사로 인해 상당한 오해와 불편한 시간들이 있었지만 이번 만남을 통해 서로 훌훌 털어버리자며 악수를 나누고 시작한 인터뷰는 사연 많은 고종수의 또 다른 내면을 들여다보게 했다.
수많은 좌절과 포기를 오가는 벼랑 끝 인생을 접고 지난 9월 15일 FC서울전부터 2년 3개월 만에 첫 골을 터트린 9월 30일 전남전까지 3경기 연속 풀타임 출전하며 보여준 고종수의 부활은 여러 편의 ‘인간 극장’을 만들어도 될 만큼 드라마틱하다.
대전 숙소 식당에 마련된 인터뷰 장소에 앉아 있자 고종수가 직접 커피를 내온다. 식당 아주머니가 주신 블랙커피였다. ‘커피도 마시느냐’고 물었더니 ‘원두커피는 마셔도 된다고 해서 한 번 마셔보려고 한다’며 입을 댔다. 그러면서 “이거 블랙 커피 맞죠?” 한다.
원래 피부색이 검은 편인데 여름내 훈련과 경기 등으로 더욱 검게 그을렸다. 그래서인지 몸매(?)가 날렵해 보인다. 점심 전이라 시장기가 발동한 고종수가 식당 아주머니에게 ‘배고프다’고 한 마디 하자마자 아주머니가 삶은 계란을 내온다. 아주머니에게 살갑게 구는 고종수의 환한 얼굴이 보기 좋다.
―이렇게 얼굴 보고 인터뷰한 게 얼마만이에요? 일본 교토 퍼플상가에 있을 때 전화로 인터뷰했던 게 마지막이었던 것 같은데.
▲그 사이 나이만 먹었어요. 벌써 서른 살이니까. 그러고 보니 프로 12년차네요.
―나이 먹은 거 실감해요?
▲그렇죠. 제 위보다 밑에 후배들이 더 많잖아요. 후배들이랑 장난치고 얘기하는 게 재밌어요. 후배였을 때는 선배들 눈치보느라 정신없었는데 선배가 되니까 뭐랄까, 후배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마음에 더 준비하고 더 열심히 하게 되는 것 같아요.
―내 기억에 ‘고종수’ 하면 97년 프랑스월드컵 대표팀에 뽑혀서 타워호텔에 묵고 있을 때의 장면들이 떠올라요. 로비에서 인터뷰했던 거 하며, 팬들 때문에 숙소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모습, 식사하러 이동국하고 식당까지 걸어가는 동안 여기저기서 ‘고종수닷!’ ‘까악’하는 함성 소리와 함께 팬들에게 둘러싸였던 그림들이 잊히질 않아요.
▲저도 그때 기억 많이 나요. 당시 고등학생이던 팬들이 지금은 20대 중후반이 됐어요. 선수에 대한 사랑이 금세 식는 팬들도 있지만 제 팬들은 안 그래요. 수원 때부터 인연을 맺은 팬들과 지금까지도 연락하고 지내거든요. 얼마 전엔 새로 홈페이지도 만들었더라구요. 좋은 것 같아요. 걔네들이 결혼하고 애도 있고, 나중에 애랑 신랑님하고 밥도 같이 먹을 수 있을 것 같구요. 시즌 끝나면 모두 모여서 소주 한잔 마실 수 있잖아요. 그때는 10대들이라 떡볶이집에서 만났는데 지금은 통닭집에서 맥주 한 잔 시켜놓고 먹을 수도 있고.
―고종수의 부활을 믿어준 팬들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게 참 많은 용기를 줬을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더라구요. ‘고종수, 넌 참 행복한 선수다’라고.
▲포기할 뻔했던 적도 많았어요. 축구선수로서 최고의 인기를 맛봤지만 올라간 것의 몇 십 배 이상 나락으로 떨어졌어요.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을 정도로. 하지만 지금 포기하면 전 영원히 낙인 찍힌 놈이 돼요. 재능은 있지만 자기 관리 못해서, 쟤는 원래 저렇게 될 줄 알았어 등등 그런 소리 정말 듣기 싫었거든요. 그럴 때 팬들이 옆에 있어줬어요. 팬들에게, 또 삶이 고달파서 인생을 포기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저 같이 하찮은 놈도 주저앉지 않고 결국 다시 일어나 뛰고 날아갈 수 있다는 걸 꼭 보여주고 싶었어요. 요즘 자살도 많이 한다는데 아, 나도 자살하려고 영동대교를 건너간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중간에 다리가 후들거려서 그냥 도망 나왔지만.
▲ 대전 시티즌 구단버스에는 팬들이 쓴 고종수의 이름이 박혀 있었다. | ||
▲근처에 있었거든요(웃음). 모든 사람들이 절 보면서 조금이라도 희망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진심으로 그런 마음에 더 열심히 하게 된 것 같아요.
―가슴에 팍 꽂히는 말들이네요. 사실 올시즌 대전에 입단하면서 주위의 평가들이 극과 극을 달렸잖아요. 재기한다, 못 한다로.
▲만약 감독님이 배려 안 해주고 그랬다면 지금처럼 풀타임으로 뛰기 어려웠겠죠. 가장 기억나는 게 서울전(9월 15일)에 선발 출장했을 때예요. 그렇게 90분을 뛰고 나니까 자신감이 생기더라구요. 성남이나 수원같이 잘나가는 팀에 있었더라면 90분 뛰기 힘들었을 걸요? 우승을 해야 하는데 저 같은 놈에게 기회를 주겠어요?
―일본에서 생활했을 때 얘기를 해볼게요. 핌 베어벡 감독과 함께 했던 교토 퍼플상가의 기억이 좋지만은 않죠.
▲나중에라도 베어벡 감독 만나면 꼭 좀 물어봐 주세요. 왜 그때 고종수를 미드필더가 아닌 스트라이커로 쓰기를 고집했는지. 저, 정말 궁금해요. 직접 물어봤냐구요? 당연하죠. 이유가 없대요. 그냥 스트라이커 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나더러 한국으로 돌아가란 소리냐고 다시 물었어요. 그건 또 안 된대요. 연습 게임할 때 딱 한 번만 미드필더 보게 해달라고 부탁도 했어요. 그때도 안 된대요. 정말 성질 나더라구요. 슬슬 머리가 도는데 미치기 일보직전이었습니다. 처음에 베어벡 감독이 교토에 온다는 얘길 듣고 진짜 기뻤거든요. 월드컵대표팀에서 코치로 인연을 맺은 사람이고 수원에서 뛸 때 계속 제 모습을 봐 온 분이라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어요. 그런데 막상 오고 나니까 상황이 대역전됐죠.
―그 이후에 만난 적 있어요?
▲언론에선 제가 교토에서 방출, 퇴출됐다고 했지만 제 스스로 걸어 나왔어요. 감독이랑 도통 대화도 안 됐고 너무 열 받아서 그냥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죠. 만류하고 그러기에 나중에 손가락까지 올리고 그랬어요. 막상 제가 빠지니까 바로 스트라이커를 뽑더라구요. 자기 동네 아이(네덜란드)로. 다시 만났냐구요? (이)동국이 결혼식 때 봤어요. 그냥 악수만 나눴죠. 말이 통해야 대화를 하지.
―퇴출, 방출, 잠적, 이런 단어와 참 인연이 많았어요.
▲그렇게 기사를 쓴 기자들에게 물어보고 싶어요. 교토에서 나온 것도 퇴출이고 무릎이 아파서 수술하러 간 것도 방출이라고 하고. 아! 이런 일도 있었다. 가수 조성모랑 생일 파티에서 난투극 벌였다는 기사 기억나세요? 그때 전 술 한 잔도 안 마셨거든요. 걘(조성모) 좀 마신 상태였고. 조성모랑 인사를 나눴는데 아는 형이 둘이 나이가 같으니까 친구 먹으라고 하는 거예요. 성모랑 친구하자며 반갑다고 주먹으로 퉁퉁 치고 약간의 장난기 있는 액션을 취한 것뿐인데 다음날 스포츠 신문 1면에 ‘고종수, 조성모랑 난투극’ 운운하는 기사가 뜬 거예요. 어찌나 황당하던지. 왜 기자들은 나한테만 이럴까 하는 생각에 정말 많이 서러웠어요.
▲ 올 1월 대전 시티즌 입단 당시. | ||
▲처음 이미지를 잘못 간 것 같아요. 전 그냥 솔직하게 말했을 뿐인데 다른 선수들처럼 이리저리 돌리지 못하고 생각나는 대로 표현했던 게 기자들에게 이상하게 전달됐나 봐요. 앞으론 가려서 말하려구요.
―축구 인생 최악의 순간을 꼽는다면 언제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전남과 재계약 못하고 무적 선수로 보낸 걸 기억하실 텐데 사실 전남과는 재계약을 못한 게 아니고 1년짜리 계약이 끝났던 거죠. 다른 팀으로 갈 뻔하다가 막판에 계약에 문제가 있어 틀어지는 바람에 2006년이 붕 뜬 거예요. 최악은 수원에서 절 김남일과 2 대 1 트레이드시킬 때였죠. 그때 축구를 그만뒀어야 하는데 타이밍을 놓쳤어요. 김남일과는 고등학교 때부터 같이 뛰었고 프로에서도 그렇고 그랬던 선수였는데 2 대 1로 트레이드되는 게 엄청 충격이었죠. 어떻게 수원이…. 분명 저도 잘못했지만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보세요. 전 정말 <인간극장>에 나와야 해요. 책을 써도 여러 권 될 거예요. 워낙 파란만장해서.
―올시즌도 진통이 뒤따랐어요. 시즌 초반 그라운드에 나오자마자 부상으로 뛰지 못하고 코칭스태프가 경질되는 등 안팎으로 시련이 끊이질 않았잖아요.
▲시즌 초반에는 마음이 급했어요. 몸은 안 되는데 게임에 빨리 나가서 고종수가 살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죠. 그래서 오버했던 것 같아요. 아까도 말했지만 여기서 그만두면 좋은 쪽이 아닌 나쁜 쪽의 표본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린애들이 절 보면서 ‘저 형처럼 돼야지’하는 소린 기대도 안 해요. 다만 ‘저 형처럼 안 돼야지’하는 소리를 듣기 싫었어요. 지금도 가장 불운한 선수하면 고종수라고 말하잖아요.
―프로 데뷔하면서부터 ‘천재’ 소리를 달고 다녔어요. 자신도 ‘천재’라고 생각해요?
▲어휴, 천재는 마라도나 같은 선수가 천재죠. 아무나 천재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어렸을 때부터 ‘천재’란 소리가 많이 부담됐어요. 전 제가 천재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같이 운동해 보면 다 똑같지 뭐, 천재가 어딨어. 선수들과 다른 점이 없어요. 박주영이 천재지 전 아니에요.
―박지성 이영표 설기현 그리고 이동국까지 프리미어리그에 입성했어요. 기쁘기도 하고 한편으론 마음 아팠을 것 같기도 해요.
▲그렇죠. 같은 선수로서 우리가 하지 못하는 걸 해주고 있으니까. 뿌듯하기도 하면서 ‘오살나게’ 부럽기도 해요(웃음). 가끔 그런 생각, 아니 망상이라고 할게요. 프리미어리그를 보면서 야, 저런 선수들이랑 축구하면 정말 축구할 맛이 나겠다…. 패스를 그렇게 세게 해주는데도 다른 선수 발에 딱 붙어 버리잖아. 부러울 따름이죠.
마지막 질문으로 이걸 물었다. “돌이키고 싶은 시기가 언제예요? 돌아가서 내 인생을 수정할 수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어요?” “95년 겨울이요. 고등학교 졸업 무렵이죠. 왜냐구요? 그때부터 ‘게으른 천재’ ‘비련의 축구 선수’ 스토리가 시작됐거든요. 수정할 수만 있다면 95년 겨울부터 지금까지의 인생을 싹 지우고 다시 시작하고 싶어요.”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