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
시즌 초반만 해도 5연승을 달리며 ‘귀네슈 열풍’을 이어가던 FC서울. 6강 플레이오프 진출은 물론 리그 우승까지 점쳤던 예상이 실패작으로 끝나면서 구단 전체가 심한 후폭풍에 시달려야 했다. 생애 처음으로 ‘완장’을 차고 K-리그를 누볐던 이을용 또한 시즌 중반 탈장 수술의 고통 속에서도 팀 성적을 끌어올리기 위해 절치부심했지만 가을에 축구를 할 수 없는 현실에 굉장히 속앓이를 했던 모양이다.
휴가인 데다 셋째 딸 ‘소을’이를 낳은 지 얼마 안 돼 집에서 가장의 역할에만 충실하고 있다는 이을용과 가볍게 술 한잔하자고 했던 약속이 인터뷰로 이어진 날, 3시간이 넘는 대화 속에서 이을용은 참으로 많은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축구선수로서의 매력과 인간적인 면면을 제대로 보여준 이을용과의 ‘취중토크’를 정리한다.
이을용, ‘욕쟁이’가 되다!
6강 플레이오프 탈락의 후유증은 꽤 깊은 듯했다. 인터뷰의 처음과 끝이 대부분 그 내용으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더욱이 완장을 달고 뛰었던 이을용으로선 주장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크게 괴로워했다.
“그라운드에서 선수들에게 욕밖에 한 게 없는 것 같아요. 게임이 너무 안 풀리니까 절로 욕이 나왔어요. 후배들에게 정신 차리라고 욕하고 손발이 안 맞아서 욕하고 제 자신에게 너무 화가 나서 욕하고…. 그렇게 시즌을 끝내니까 정말 허무하대요.”
이을용은 시즌 초반 FC서울이 5연승까지 내달릴 때 기분 좋으면서도 불안했다고 한다. 가장 큰 이유는 선수들 대부분이 나이 어린 선수들이란 사실 때문이었다.
“경험이 있는 선수들은 템포 조절이 가능하잖아요. 그러나 어린 선수들은 한 번 무너지면 와르르 주저앉고 걷잡을 수 없이 추락하게 돼요. 그걸 가장 걱정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대로 나타나더라구요. 5연승 이후 그 다음 게임이 광주 상무전이었어요. 무승부로 끝나면서 조금씩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경남FC와의 경기에선 선수들 눈에서 하고자 하는 의욕을 읽을 수 없었어요. 게임장에서 상상할 수도 없는 욕을 마구 해댔죠. 그렇게라도 안 하면 조직력이 완전 망가질 것 같았거든요.”
이을용은 경기가 없을 때는 어린 후배들과 대화의 시간도 많이 가지려 했고 선배의 욕지거리로 상처 받은 후배가 있다면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자신의 휴식을 반납했을 만큼 선수들에게 다가서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말로 자신의 현실을 설명한다.
“저 왕따예요. 아무도 저한테 오질 않아요. 뭐,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죠. 욕만 해댔으니까.”
어린 선수들에게 고함
터키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화려한 플레이를 선보이다 지난해 7월 FC서울에 입단한 이을용은 1년 넘게 K-리그를 경험하면서 젊은 선수들에 대해 참으로 다양한 ‘느낌표’를 갖게 됐다고 한다.
“바람 든 선수가 너무 많아요. 특히 대표팀에 한 번 갔다 오면 실력을 키우기보다 바람만 잔뜩 넣어서 돌아와요. 그런 선수들 보면 답답하죠. 아직 갈 길이 먼데 벌써부터 뭐가 다 된 것처럼 행동하니…. 주위 사람들이 더 문제예요. 에이전트들도 잘못이 있고. 한창 예민한 상태의 선수들에게 ‘헛바람’만 넣어주고 있으니까 그렇죠. 요즘 선수들은 1억 원을 큰돈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프로 1년 차에 연봉이 1600만 원이었거든요. 세금 떼면 한 달에 88만 원 정도 받았다구요. 그런데 지금 후배들은 평균 연봉이 1억 원이에요. 5000만 원씩 오르는 건 눈에 차지도 않는 수준이죠. 운동해서 돈 많이 받는 건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받은 만큼 몸값을 해내느냐가 중요하죠. 반성해야 할 선수들 정말 많아요.”
수술로 7주 동안 쉬어
이을용은 주축 선수들의 부상으로 팀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탈장 수술을 받고 7주를 쉬었다. 일명 ‘스포츠 헤르니아’로 불리는 이 병은 처음에 진단이 쉽지 않아 선수들이 복통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정확한 원인을 알지 못하는 병이다.
“축구 선수들은 복근에 힘이 있기 때문에 웬만하면 장이 터지질 않아요. 그런데 시즌 전반기에 3게임 남겨놓고 배가 너무 아팠어요. 마치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처럼 엄청난 통증이 동반되는데 한동안 대포주사를 맞고 소염제 등으로 참았죠. 하지만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전문 병원을 찾아갔더니 탈장 증세가 보인다는 거예요. 절 진찰한 병원 원장이 영국에서 탈장 수술을 해봤던 전문가래요. 초음파로도 보이지 않는 증세를 배를 만져봐서 단박에 알아내더라구요. 그래서 수술을 받았는데 (김)남일이도 나랑 비슷한 증세라고 해서 그 병원을 소개시켜줬어요.” 주장인데다 부상 선수들이 많은 상황에서 자신까지 수술로 이탈하는 끔찍한 일을 벌이지 않으려고 통증을 잊는 주사와 소염제 등으로 버티기를 시도했다는 대목에선 자못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터키에서의 잔류 요청을 뿌리치고 K-리그에서 ‘점’을 찍고 싶었던 이을용으로선 뜻대로 풀리지 않는 여러 가지 일들이 속이 터지다 못해 미치기 일보 직전의 상황으로 내몰렸던 것이다.
▲ 탈장수술에 이어 6강 진출의 좌절을 겪은 이을용. 취중토크를 통해 그의 속 얘기를 들어 보았다. | ||
2006년 시즌 중반에 FC서울에 합류한 이을용으로선 지난해와 올시즌과의 차이에 대해 깊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고 한다. 과연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감독님 바뀐 거 외엔 달라진 게 없어요. 모든 건 ‘적응’이 필요한 법이잖아요. 귀네슈 감독님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솔직히 제가 터키에서 모시지 않은 감독님이라면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거예요. 귀네슈 감독이었기 때문에 기대도 컸고 저도 더 잘 해보려고 했어요. 주장까지 맡은 상태에서 좋은 결과가 나와야 감독님도, 저도 비판의 세례에서 조금 비켜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제 자신에 대해 실망이 너무 컸습니다. 감독님하고 선수들 사이에서 중간 역할을 잘 해야 하는데, 내가 너무 못해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 시즌 끝나고 별의별 고민을 다해 봤어요.”
한 번은 시즌 중간에 선수들이 연이은 경기와 훈련으로 심신이 지친 상태였다고 한다. 오전 오후로 이어지는 훈련 프로그램에 불만이 터져 나왔고 급기야 이을용이 선수들의 마음을 헤아려 오후 훈련 전에 귀네슈 감독에게 훈련 프로그램을 바꾸자고 제의하게 된다.
이을용(이): 감독님, 선수들이 너무 힘들어 해요. 1 대 1 연습게임 대신 쉬운 걸로 바꾸면 안 될까요?
귀네슈 감독(귀): 그래? 그렇다면 내가 선수들에게 직접 물어 보지. 너희들 중에서 훈련이 힘들다고 생각하는 사람 있으면 손 들어봐!
이을용 외엔 단 한 명도 손을 들지 않았다고 한다. 이 일로 인해 이을용은 주장의 무기력함에 대해 비통한 심정이 됐고 순간적인 회의가 물밀 듯했다고 털어 놓는다.
아부가 아닌 스토리
“이건 절대 아부가 아니에요. 우리 사장님처럼 축구를 사랑하는 분은 흔치 않아요. 선수들에게 보너스를 줄 때가 언제인지 아세요? 졌을 때 더 챙겨주세요. 기운내라고. 힘 빼지 말고 더 열심히 해달라고. 1년 내내 선수단 지원을 위해 온갖 허드렛일 다 해가면서 뛴 구단 직원 분들한테도 면목이 안 섰죠. 사장님부터 프런트 모든 분들이 선수들을 위해 뛰는데 정작 선수들은 다른 생각에 빠져서 시즌 막판에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아 정말 화가 많이 났어요. 절 포함해서 고참들도 부상과 개인적인 일들로 문제가 있었죠. 그래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걸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참, 사장님 얘긴 빼주세요. 괜히 아부한다고 오해받고 싶지 않으니까….”
이을용은 귀네슈 감독에 대한 평가는 내년으로 미뤄달라고 부탁했다. 올시즌 주축 선수들의 부상으로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만큼 부상 선수들이 모두 돌아온다면 내년 시즌은 기대해도 될 것이란 애드벌룬을 띄웠다. 그러면서 “(귀네슈 감독이) 명장이라면 뭔가를 보여주시겠죠. 아무나 명장 타이틀 다는 거 아니잖아요”라고 덧붙인다.
이을용은 자신의 축구 인생을 ‘잡초 인생’이라고 표현했다. 연줄과 백그라운드가 작용하는 축구판에서 자신은 도통 ‘빽’이란 게 없다는 것. 하지만 ‘빽’이 없기에 더 악착같이 축구를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한테도 기댈 수 없는 현실에서 믿을 수 있는 건 오로지 자기 자신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내년 시즌이 끝나면 FC서울과 계약이 끝나는 이을용. 성급한 질문인 줄 알면서 그 이후의 계획에 대해 물었다.
“전 꼭 꼭 FC서울이 K-리그에서 우승하는 걸 보고 싶어요. 올시즌이 너무 억울해요. 우승한 뒤에 화려하게 물러났음 좋겠어요. 그 이후엔 언어 연수 차원에서 호주나 미국 등 세미프로에서 뛰고 싶은데 앞으로의 일은 에이전트랑 상의해 봐야죠. 내년에 FC서울이 우승 못하면요? 에이 그럴리가요. 반드시 우승할 겁니다. 우승 못하면 계속 있어야죠. 팀에서 절 필요로 한다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