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일 사직구장에서 만난 롯데돌풍 주역 정수근은 화끈한 성격에 걸맞게 이혼 얘기 등 껄끄러운 부분까지 진솔하게 털어놨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지난해 전처와 이혼 후 혼자 부산에서 지내는 정수근. 비록 아내와는 헤어졌지만 아들과는 이전처럼 살갑고 다정한 부자지간의 끈을 이어간다는 그의 말에 많은 의미와 깊이가 함축돼 있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부산 야구 열기의 근원지인 롯데 자이언츠 주장을 맡아 치솟는 팀 성적과 함께 ‘정수근표 야구’를 선보이려 ‘겁나게’ 뛰고 있는 그를 만났다. 비가 내린 지난 16일, 사직구장에서 오랜만에 재회한 정수근은 1년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표정으로 기자 앞에 나타났다.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한층 여유롭고 편안해진 모습으로 말이다.
인터뷰 약속을 잡기 위해 정수근과 전화통화를 하면서 “요즘 행복하죠?”라고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정수근 왈,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라며 달뜬 목소리를 들려줬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야구장에 ‘출근’하기가 싫어서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도망가고 싶었던 그였다. 2군으로 내려가는 수모도 겪고 벤치 멤버로 후배들이 경기하는 걸 지켜본 적도 있었다. ‘도루왕’ 정수근은 롯데 이적 후 자취를 감췄고 ‘부산 갈매기’의 고장에서 정수근은 거의 ‘이방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그가 올 시즌 제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그것도 ‘롯데 1위(4월 16일 현재)’라는 엄청난 테두리 안에서. 비결이 궁금했다.
“잘 아시다시피 감독님 영향이 가장 크죠. 돈 벌며 야구하는 선수들에게 어떻게 해야 즐겁게 야구를 할 수 있는지 가르쳐주셨거든요. 야구장에선 선수들을 나무라지 않으세요. 플레이하면서 실수를 해도 최선을 다한 결과였다면 괜찮다고 용기도 주시고요. 사실 선수들은 운동하면서 야단맞는 데 더 익숙하잖아요. 처음엔 로이스터 감독의 칭찬 행진에 어리둥절하더라고요. ‘혹시 가식이 아닐까’ 의심도 했었죠(웃음).”
처음엔 가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가 훈련 시작하고 3일째 되던 날부터 감독의 진심을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분이라면 선수들에게 뭔가를 주실 수 있겠다’는 확신도 점점 더해졌다.
“미팅이 끝나면 항상 선수들에게 인사를 하시더라고요. ‘오늘도 잘 부탁합니다’라면서. 많이 당황스러웠는데 3일째 되니까 그냥 하는 인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선수를 존중해준다는, 선수는 존중받는다는 느낌이 외국인 감독과의 보이지 않는 장벽을 그대로 허물어트리더라고요. 솔직히 전 그때 감동받았어요. 이전 감독님으로부터 선수로 대우받지 못했던 아픔이 있었기 때문에 로이스터 감독님의 그런 모습이 평범하게 보이지 않았거든요. 저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선수들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래서일까. 정수근은 요즘 눈만 뜨면 야구장에 가고 싶어진다고 한다. 특히 홈경기를 앞두고선 묘한 설렘과 흥분이 야구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에 힘을 실어준다. 선수들 실력도 향상됐고 팀 분위기도 좋고 주장을 맡고 있는 자신도 신바람 내면서 야구할 수 있는 2008년 4월 지금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는 정수근이다.
“프로가 된 후로 주장은 처음이에요. 그동안 제가 주장을 맡을 만큼 모범적인 생활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웃음). 그런데 처음 주장을 맡고 팀도 살아나니까 주장이 은근히 재밌더라고요. 후배들이 시합 잘하고 좋은 플레이를 보여주면 게임 끝나고 문자를 보내줘요. ‘참 잘했다’ ‘고맙다’ 등등의 내용으로. 그럼 답장이 얼마나 근사하게 오는데요. 주장이라고 권위의식을 내세우고 싶지 않아요. 후배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 선배들의 어려움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중이에요.”
인터뷰하면서 자꾸 지난해 만났던 정수근의 모습이 떠올랐다. 야구 잘하고 팀 분위기가 살아나니까 사람을 이렇게 변화시킬 수 있구나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였다. 원래 흥도 끼도 많은 사람인데다 성적이 뒷받침되고 주위에서 비난보단 칭찬을 쏟아내니까 성격 개조는 물론 생활 개조까지 일시에 이룬 듯했다.
1995년 두산 유니폼을 입은 후 지금까지 과연 정수근의 전성기는 언제였을까. 도루왕을 4차례나 차지했었고 한국시리즈 우승도 2번이나 맛봤던 그는 자신의 전성기를 과거도 현재도 아닌 ‘미래’라고 여지를 남겼다.
▲ 사직구장 기둥에 붙어있는 제리 로이스터 감독 포스터(왼쪽)와 정수근 선수. | ||
지난해 시즌 개막 직전에 팀 내에서 굉장히 좋지 않은 일이 있었다. 야구가 싫어졌고 야구를 계속하는 데 대해 회의가 물밀 듯했었다고 한다. 일주일 동안 훈련을 거부하고 집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는데 당시 더 큰 아픔은 감독의 무관심이었다고.
“버려진다는 기분이었어요. 날 데려가지 않으시려는구나 싶었고요. 참담했어요. 정수근이 맛이 가는 듯했죠. 제가 이전 감독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데 대해 비난이 뒤따른다는 거 알아요. 그런데 저라도 이런 얘기 안 하면 감히 누가 하겠어요. 전 따뜻함을 원했어요. 말 한 마디라도 따뜻함을 느낄 수 있길 바랐어요. 하지만 처음부터 절 ‘안경’을 쓰고 보셨어요. 그런 분 앞에서 제가 아무리 예쁜 짓을 해도 미워 보일 수밖에 없었겠죠.”
정수근의 말을 듣고 있다가 이렇게 공격을 해봤다. “감독 입장에선 정수근이란 선수가 다루기 쉬운 선수는 아니지 않은가”라고.
“오히려 전 다루기가 굉장히 쉬운 선수예요. 이전 김인식 감독님처럼 ‘수근아 잘 하고 있지? 열심히 해라’라고 약간의 관심만 보여도 전 그 말 한 마디에 목숨 거는 스타일예요. 롯데로 팀을 옮기고 나서 많이 외로웠어요. 제 자신에게 화도 났고 많은 기대를 하고 있는 팬들에게 미안하기도 했고. 성적을 내지 못하는 고액 연봉자의 비애를 아세요? 그 기분 말로 표현하기 어려워요.”
한창 인터뷰에 빠져 있는 정수근에게 사생활과 관련된 질문을 해도 되느냐고 물었다. 정수근이 ‘오케이’라면서 ‘어떤 질문도 솔직하게 대답하겠다’고 한발 더 앞장 서 나갔다. 사생활 부분에서 기자와 주고 받은 내용을 그대로 옮겨본다.
“얼마 전 잠실야구장에서 아들 호준이랑 다정하게 사진 찍은 모습을 봤어요. 그 사진을 보며 ‘이렇게 아들을 사랑하면서도 왜 이혼을 했을까’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주 ‘쎄게’ 물어보시네. 물론 아들을 위해서 이혼만은 피하고 싶었죠. 안 하려고 노력하고 또 노력했어요. 그러다 결국 이렇게 된 거예요. 아이 생각만 하면 가슴이 너무 아파요. 그래도 내색하지 않고 씩씩하게 커 나가는 모습이 여간 대견스럽지 않아요.”
“아이도 알아요? 엄마 아빠가 같이 살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
“알아요. 엄마 아빠 헤어진 거 다 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호준아! 우린 죽어도 아빠랑 아들 사이야. 넌 영원한 내 아들이라는 사실 절대 잊지 말라고요. 다행히 아이가 잘 받아들인 것 같아요. 걱정은 많이 돼요. 혹시 부모의 이혼으로 인해 우리 아들이 다른 친구나 학부모들로부터 손가락질 받진 않을까 싶어서. 시간 날 때마다 항상 같이 있으려 하고 서울 원정 가면 숙소로 데리고 와서 같이 자기도 하는데 호준이의 학교 생활을 보지 못하는 게 너무 안타까워요. 소풍도 따라가고 학교 행사에도 모습을 비추면 너무 좋아할 텐데 말이죠.”
정수근은 가끔 이혼을 후회한 적도 있다고 고백했다. 자신이 좀 더 가정에 충실하고 아내를 챙기고 자상하게 보살폈다면 이런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란 말도 덧붙였다.
“선수들이 기댈 곳은 가정, 가족밖에 없어요. 그 가정이 깨진다면 누구보다 선수의 책임이 커요. 그 부분에선 전처에게 굉장히 미안해요. 소홀했던 부분, 당연히 이해해줄 거라고 바란 부분들이 있었거든요. 전 진심으로 그 사람이 잘 되길 바라요. 시간이 지나면 좋은 사람 만나서 새 가정을 꾸리겠죠. 그렇게 된다면 진심으로 축하해 줄 겁니다. 참, 이 얘긴 꼭 하고 싶어요. 운동선수 와이프가 일반인의 아내보다 10배는 더 힘들어요. 그래서 운동선수에게 시집올 때는 생각 잘 하고 오시라고요. 딱 10배니까(웃음).”
마지막으로 롯데가 가을에도 야구할 수 있는 확률을 몇 %로 보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정수근이 다짐하듯 꺼내든 카드는 100%였다.
“전 더 욕심이 나요. 비단 가을에만 야구하는 게 아니라 우리 팀 실력이라면 한국시리즈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보거든요. 중간에 부상 선수만 나오지 않는다면 충분히 해볼 만하다고 생각해요. 그만큼 자신도 있고요.”
정수근의 얘기는 결코 ‘방송용 멘트’가 아니었다. 정말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그래서인지 이렇게 정리가 된다. 정수근의 야구는, 또 인생은 ‘네버 엔딩 스토리’였다 라고.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