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정치권 밖에 머물러 관망만 해오던 고 전 총리가 ‘국민통합신당론’을 들고 나온 것은 나름대로의 절박함에서 비롯됐다. 자신의 최대 자산인 지지율이 10%대로 추락한지 오래고, 지지기반이라 할 수 있는 호남의 민심 또한 조금씩 멀어져가고 있는 현실이 고 전 총리로 하여금 ‘통합신당 카드’를 빼들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게다가 열린우리당이 재보선 패배 후 정계개편론에 급피치를 올리자 고 전 총리도 이젠 행동할 때라고 생각한 듯하다.
지금까지 고 전 총리의 ‘대권플랜’은 열린우리당과 민주당, 희망연대, 국민중심당 일부가 통합해 신당을 만들고 자신이 여권의 단일 후보로 부상한다는 것이었다고 추측된다. 이 같은 구상은 아직도 유효할 뿐만 아니라 아직도 가장 바라는 상황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상황은 물 건너갔다. 이젠 ‘추대’를 바라기보단 적극적으로 정계개편에 뛰어들어 주도권을 잡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고 전 총리와 가까운 열린우리당 안영근 의원은 “그동안 고 총리가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의 영입대상 또는 통합의 대상이었다. 즉 객체로서 존재했지만 이젠 주체로서 나서겠다는 의미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조금 지나자 또 이야기가 다르다. 고건의 ‘독자신당’은 아니라고 한다. 고 전 총리의 김덕봉 공보특보는 “통합신당추진 선언 후 일부 언론에서 ‘고건신당’이라고 보도됐지만 잘못된 것이다. 독자신당을 추진하는 게 아니라 통합신당을 추진하는 것이다. 고 총리는 오너십 정당을 추구하지 않는다”라고 독자신당과는 분명한 선을 그었다. 민주당의 고건파로 통하는 이낙연 의원도 “고 총리가 통합신당에 원 오브 뎀(one of them)으로 참여하는 것일 뿐”이라며 독자신당의 시각에 경계를 나타냈다. 고 전 총리 측은 ‘정몽준 신당’ ‘이인제 신당’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해석된다.
그렇다고 고 전 총리가 열린우리당에서 논의하고 있는 오픈프라이머리(국민참여경선)에 참여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 김 특보는 “여당의 경선에는 관심 없지만 통합신당이 완성되고 범여권 차원에서 실시되는 경선에는 참여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고 전 총리가 원하는 ‘신당’이란 무엇인가.
고 전 총리가 구상하는 정계개편은 친노 세력을 배제한 열린우리당 통합파, 민주당과 희망연대 등의 외곽지지단체의 통합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국민의 신뢰를 상실했지만 139석이라는 현실적인 세를 가지고 있는 열린우리당, 12석에 불과한 ‘작은 집’이지만 호남의 대표성을 지니고 있는 민주당 그리고 여권 후보 중 가장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는 고 전 총리가 만나면 집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고 전 총리와 가까운 A 의원 측의 한 관계자는 “민주당 의원 대다수가 합류하고 여기에 7~8명의 의원만 더 보태면 원내 교섭단체는 금방 구성할 수 있다. 교섭단체가 결성되면 국고보조금이 나오니 그 자금으로 당을 유지하기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고 전 총리의 통합신당에는 암초가 너무 많다. 우선 항상 문제로 거론되는 자금과 조직의 열세다. 당초 정치결사체로 예상했던 ‘희망연대’가 정치색이 배제된 시민단체의 성격을 가지고 있어 이것이 정치적 세력으로 부상하기는 어렵다. 북촌포럼도 일부에서는 비관적으로 본다. 고 전 총리가 깃발을 세웠지만 세를 좌우할 현역 국회의원이 얼마나 참여할 지도 미지수다. 열린우리당 호남 의원들은 미동도 없다. 광주에 지역구를 두고 있는 양형일 의원 측은 “고 전 총리의 통합신당 얘기에 동요하는 호남 의원들은 없다”라고 전했다.
여기에 고 전 총리의 가장 큰 자산인 지지율도 하락 후 고착화되고 있다. 안영근 의원은 “무척 고민되는 부분이다. 연말까지 20%대의 지지율을 회복해야 되는데 반등의 기회를 찾기가 어렵다. 통합신당을 추진한다고 선언했으니 지지율에도 변화가 오리라고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고 전 총리가 통합신당 추진 선언한 후인 지난 8일 <중앙일보>와 ‘리서치앤리서치’가 공동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15.3%의 지지율을 얻어 여전히 3위였다. 이명박 전 시장은 28.3%, 박근혜 전 대표는 22.3%였다. 그러나 호남 지역 지지율은 지난주 37.4%보다 하락한 31.3%여서 고 전 총리가 깃발을 올렸음에도 호남의 민심은 싸늘했다. 이를 두고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여권 후보로 분류되지만 고 전 총리는 보수적인 인물이다. 상대적으로 개혁성향을 가진 호남 민심이 조금씩 등을 돌리는 것이다”라고 풀이했다.
뿐만 아니라 최근의 정치상황은 고 전 총리에게 더욱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저를 전격 방문했고 더 나아가 ‘영호남 신당설’까지 나오고 있다. 고 전 총리 측은 “전·현직 대통령이 만나 국정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긍정적”이라고 평했지만 정치권은 이를 두고 이른바 ‘DJ 변수’로 인해 고 전 총리 측에 불리할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호남을 확실한 지지기반으로 묶어 놓아야하는 고 전 총리 입장에서는 DJ의 움직임은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한다.
여기에 고 전 총리의 기웃거리는 포즈도 큰 약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북한 핵실험 후 국제공조를 강조하며 대북 포용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자세를 취했던 고 전 총리는 DJ-노 대통령 만남 후 가진 안동대 특강에서 ‘가을 햇볕론’을 주장하며 참여정부의 대북정책은 강도 높게 비난한 반면 DJ의 ‘햇볕정책’은 극찬해 또다시 줄타기가 시작된 것 아니냐는 소리를 듣고 있다.
신당의 깃발을 든 전 총리가 대권의 기나긴 여정 첫 발에서 헛물을 켜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이 같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진정한 대권주자로서 홀로 설 지 그의 행보 하나하나에 정치권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김지훈 기자 rapie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