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현직 대통령의 회동이 정계개편 정국을 격랑으로 빠뜨리고 있다. 서울 마포구 김대중도서관 전자방명록에 지난 4일 노무현 대통령이 김대중 전 대통령을 방문한 뒤 작성한 글귀가 남아 있다. 연합뉴스 | ||
‘DJ-노무현 회동’은 곧바로 엄청난 후폭풍을 만들어 냈고 이 후폭풍이 정치권을 강타하자 청와대 측은 “전·현직 대통령의 만남을 정계개편과 연결시키는 보도는 소설”이라며 애써 태연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정치 분석가들도 전·현직 최고권력자인 두 사람이 부부동반을 한 채 정계개편 등 민감한 정치현안 문제와 관련해 의견을 주고받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데 무게감을 두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살아있는 권력을 쥐고 있는 노 대통령과 호남의 정신적 지주인 DJ의 만남은 그 자체만으로도 상징적인 의미가 있고 파괴력 있는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게 정치권 관계자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범여권 대권주자들은 물론 열린우리당 내 제 계파들이 두 사람의 회동을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며 정계개편 주도권 장악에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시각을 뒷받침하고 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그동안 소원했던 두 사람의 관계에 비춰볼 때 ‘대권 밀약’ 내지는 모종의 ‘연대’를 담보로 회동이 이루어졌을 것이란 의혹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두 사람의 회동이 사전 조율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정치적 목적을 배제한 순수한 만남이었는지 여부는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지만 그 여파는 강력하며 상당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분당정국에 직면한 열린우리당과 정계개편 가시권에 진입한 범여권 진영은 두 사람의 회동을 기점으로 전략 수정에 나서는 등 더욱 복잡한 기 싸움에 돌입한 형국이다. 정계개편 정국을 강타한 ‘DJ-노무현 회동’의 후폭풍을 진단해 봤다.
열린우리당을 비롯한 여야 정치권이 ‘DJ-노무현 회동’ 후폭풍 늪에 깊이 빠져들고 있지만 정작 청와대와 동교동은 이러한 상황을 즐기고 있는 분위기다. 예전 같으면 반박 성명을 내는 등 파문 확산을 차단하기 위해 분주한 움직임을 보였을 법도 한데 의외로 차분하다.
정치권 일각에서 두 사람의 연대설이 제기되자 청와대 측이 ‘소설’이라고 반박했을 뿐 7일 내부 회의에서는 더 이상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기로 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히려 회동 이후 노 대통령은 7일 광주를 방문했고 다음날(8일)에는 DJ가 부산을 방문하는 등 일부 비판적 시각을 우롱하듯 거침없는 행보를 걷고 있다.
북핵 사태와 정계개편 정국과 맞닥뜨리며 한때 코너에 몰린 듯하던 두 사람이 의기투합해 정국의 흐름을 재장악하고 상생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도 감지되고 있다.
이와 관련 여권의 한 고위관계자는 “2003년 민주당 분당 과정에서 서로 등을 돌린 두 사람이 북핵 해법이란 국가적 과제와 정치권 새판짜기라는 현안을 놓고 관계 복원에 나서고 있는 것 같다”며 “여권과 호남권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이 협력할 경우 그 시너지 효과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두 사람의 회동 후폭풍은 범여권을 뒤덮고 있다. 대권주자 진영을 비롯해 정계개편 밑그림을 그리고 있는 제 계파들은 두 사람 회동이 미칠 파괴력을 예의주시하며 이해득실에 분주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특히 친노세력의 발빠른 행보가 눈에 띈다. 정계개편 방향과 관련해 ‘헤쳐모여식’ 통합신당론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친노세력들은 여전히 ‘당 사수’를 명분으로 재창당론을 고수해 왔다.
하지만 DJ와 노 대통령의 회동 이후 일부 친노세력은 보다 큰 틀에서 정계개편이 이뤄져야 한다는 새로운 통합신당 모델을 제시하고 나섰다. 노 대통령의 핵심 측근으로 PK(부산 경남) 인맥을 대표하고 있는 김혁규 의원이 선봉을 맡았다.
▲ 김혁규(왼쪽), 문희상 | ||
이는 그동안 여당 내부에서 논의돼 왔던 ‘통합신당론’과 ‘재창당론’을 뛰어 넘어 전·현직 대통령이 가세한 ‘그랜드 통합신당론’으로 향후 정계개편 과정에서 적잖은 파문을 예고하고 있다.
김 의원 측 관계자는 10일 기자와 전화통화에서 “당내 통합파들이 주장하고 있는 정계개편 방향은 고건 전 총리와 호남을 염두에 둔 것으로 이는 ‘도로 민주당’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게 김 의원의 지론”이라며 “노 대통령도 이러한 지역구도 회귀를 반대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뿐인데 기자가 확대 해석한 것 같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또 청와대나 친노세력과의 조율 여부를 묻는 질문에 “김 의원 스스로 ‘영호남 통합신당’이란 용어를 쓰지 않았고 내부적으로도 논의가 되지 않은 부분인데 사전 조율이 있을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했다.
참여정부 초대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낸 문희상 전 의장도 9일 한 일간지와 인터뷰를 통해 “노 대통령과 영남 개혁세력을 빼고는 재집권할 수 없다”며 영호남 통합신당 추진 가능성을 언급했다. 그는 또 “재창당론과 통합신당론은 선후의 문제일 뿐이고 현실적으로 통합신당이지만 법률적 절차로는 재창당이 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친노세력들은 나아가 조기 전당대회를 관철시켜 새 지도부를 중심으로 당의 진로 문제를 결정해야 한다는 데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현재의 대의원과 기간당원 분포를 감안하면 친노세력을 대변할 새 지도부 구성이 가능할 것이란 강한 자신감이 묻어 있다. 또 노 대통령과 DJ의 회동 이후 당내 정계개편 논의 과정에서 노 대통령이 한 축을 형성하게 됨에 따라 그 과실을 최대한 활용하겠다는 나름의 전략도 내포돼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노 대통령은 9일 친노직계인 백원우 의원을 통해 정계개편 3대 원칙을 공개하는 등 정치권 새판짜기 움직임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노 대통령의 구상이 가감없이 전달됐는지 여부는 불투명하지만 노 대통령은 △도로 민주당 반대 △탈당 불가 △전당대회 결과 승복 등을 3대 원칙으로 제시해 새로운 논란의 불씨를 지피고 있다.
여기에 친노세력들은 노 대통령이 정계개편과 차기 대선정국을 겨냥한 협력 파트너로 DJ를 선택했다는 사실에 고무된 반응을 보이고 있다. DJ가 갖고 있는 상징적 의미와 정치적 영향력을 감안하면 범여권 차기주자나 통합신당을 주장하는 제 계파들도 노 대통령에게 함부로 반기를 들지 못할 것이란 계산 때문이다.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최근 국회 대정부 질문 등을 통해 노 대통령과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우고는 있지만 그 칼날도 조금은 무뎌져 가는 양상이다.
▲ 정동영(왼쪽), 김근태 | ||
갈수록 대권입지가 좁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또다시 새로운 암초를 만난 정동영(DY) 전 의장과 김근태(GT) 의장 진영도 쓰라린 속을 달래며 해법 찾기에 주력하고 있는 모습이다.
특히 친노세력들은 “현 지도부는 정계개편을 주도할 명분도 능력도 없다”며 GT를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DY와 GT가 열린우리당 지분을 양분하고 있는 최대 계파 수장이지만 갈수록 수세에 몰리고 있는 게 현실이다.
양측은 “소나기는 일단 피하고 보자”며 자세를 낮추고 있지만 일부 강경론자들은 “더 이상 밀리면 끝장”이라며 특단의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당내 재야파 모임의 한 초선의원은 “DY와 GT가 힘을 합치면 동참할 의원이 족히 60~70명은 될 것”이라며 “계속 밀리면 당권도 대권도 물건너 갈 것”이라는 불만을 토로했다.
이 의원은 또 “DY와 GT 모두 대권을 꿈꾸고 있는 만큼 중장기적 전략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며 “DJ와 노 대통령이 과거와 현재 권력이라면 두 사람은 미래 권력을 담보로 일전을 불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친노파 대권주자인 천정배 의원은 당초 통합신당론을 지지하는 입장을 보였지만 최근에는 진일보된 대통합론을 기치로 내걸고 있다. ‘노 대통령과의 선긋기’ 카드로 주도권을 쥐겠다는 포석이었지만 예상치 못한 ‘DJ 변수’가 부상하자 다소 유연한 입장으로 선회하고 있는 분위기다.
통합신당론을 주창했던 당내 제 계파들도 다소 변화된 스탠스를 유지하고 있다. 호남세력의 좌장격으로 대표적인 통합론자인 염동연 의원은 8일 통합파 의원 23명과 오찬모임을 갖고 “정통성 없는 비대위가 통합신당을 추진하는 것도 문제가 있고 내실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불을 붙이기로 했다”며 친노세력이 주장하고 있는 조기 전대론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당내 초선의원 모임인 ‘처음처럼’도 7일 저녁 모임을 통해 “통합논의가 하드웨어적 논의에서 콘텐츠와 정책에 바탕을 둔 정체성 논쟁으로 옮겨가야 한다는 데 공감대를 이뤘다”며 조만간 처음처럼 차원에서 공식적인 문제 제기를 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탈계파 초선모임인 ‘국민의 길’도 최근 모임을 갖고 “특정지역이나 정파를 배제하지 말자는 게 우리의 입장”이라며 기존 통합신당론에서 대통합론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12월께 독자신당을 창당하겠다”며 대권 승부수를 던진 고건 전 총리 측은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상태다. 소심하다는 비판을 벗어던지기 위해 작심하고 던진 카드인데 두 사람이 던진 연합 카드에 눌려 출항하자마자 암초에 부딪힌 형국이다.
이처럼 DJ와 노 대통령의 회동 이후 여당 내 정계개편 논의 과정에서 변화의 기류가 감지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통합신당론과 재창당론으로 양분돼 왔던 여당 내 정계개편 방향이 ‘DJ-노 대통령 회동’ 이후 제 계파들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히면서 ‘춘추전국시대’로 급변하고 있는 형국이다. 노 대통령으로서는 의도된 것이든 전혀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제풀에 놀라 허둥대는 것이든 이러한 모습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띠고 있는지도 모른다. DJ로서도 전혀 손해 볼 것이 없는 일이다.
아무튼 정국은 과거와 현재 권력을 상대로 힘겨운 전쟁을 벌여야 하는 잠룡들의 세력 경쟁이 더욱 치열하게 전개될 수밖에 없는 형국으로 나가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