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아직도 곳곳에 지뢰는 남아있다. 경선 룰이 확정되었다고 해도 그후 이 전 시장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간의 갈등이 심각해지고 판세가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간다고 판단될 경우 새로운 변수가 발생할 수도 있다. 실제로 경선 후보로 등록하기까지는 모든 문제가 타결됐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일단 논란을 빚었던 경선 룰에 합의까지 한 마당에 어느 주자도 특별한 변수가 없이 유·불리만으로 경선을 거부하기 힘든 상황이 돼 버렸다는 것이 당내 분위기다.
그런 가운데 손학규 전 경기지사가 경선 불참을 시사함으로써 한나라당 대권 경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당면과제는 손 전 지사의 탈당을 막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누가 손 전 지사와 손을 잡느냐가 경선판도를 결정지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작은 대선’으로 불리는 한나라당 경선 전쟁은 이제 제2 라운드로 접어들고 있다. 이 장면에서 가장 유심하게 살펴볼 관전 포인트는 박 전 대표와 손 전 지사가 ‘묵시적 연대’를 통해 ‘1위 타도’를 이룰 수 있는지의 여부다. 한나라당 경선 전쟁 제2 라운드의 쟁점들을 짚어보았다.
도저히 결론이 날 것 같지 않던 한나라당의 경선 방식 선정 논란이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말 한마디로 얽힌 실타래가 풀렸다. 이 전 시장은 지난 3월 16일 당내 대선 주자 진영간 논란이 되고 있던 경선 룰과 관련, “당의 결정에 따를 것”이라고 전격 선언했다. 이 전 시장은 이날 춘천 강원도청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경선 시기와 방법과 관련해 저는 특정한 방안에 매달리지 않고 당 지도부와 경선준비위원회에 모든 결정을 일임하겠다”하고 밝혔다.
이 전 시장의 이 같은 발언은 당이 제시한 것으로 알려진 ‘경선 시기 8월, 선거인단 20만 명 중재안’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돼 장기간 끌어오던 경선 룰을 둘러싼 당내 협상이 극적 타결을 볼 수 있는 숨통을 터준 셈이었다.
이 전 시장이 전격적으로 경선 방식 수용 의사를 밝힌 배경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먼저 치밀한 계산 하에 전국 대의원들의 조직표에 대한 분석을 끝낸 뒤에 자신감을 표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전 시장 측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그동안 조직 담당 관계자들이 여러 차례의 시뮬레이션을 통해 대의원 분포를 면밀하게 분석한 것으로 안다. 대의원 확보 작전은 이미 ‘6월 경선’에 맞추어 치밀하게 몇 달 전부터 진행 중이었다. 각 지역을 지지, 박빙, 열세로 나누어 몇 차례 검토해본 결과 우리가 대의원 싸움에서도 우세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회의에서 참모들이 이 전 시장에게 ‘자신 있다. 언제 경선하든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전달한 것으로 안다. 대의원 확보에 반신반의하던 이 전 시장이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해 본 결과 ‘이제 가도 되겠다’고 판단해 이번에 경선 룰에 아무 조건 없이 합의해준 것이다. 현재 구도에서는 어떤 방식이어도 우리가 경선에서 이길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 전 시장 캠프의 지방 조직을 맡고 있는 재선의 L 의원도 이와 비슷한 견해를 밝혔다. L 의원은 기자에게 “현재의 대의원 여론조사는 이-박 대결이 박빙으로 나오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 전 시장의 ‘의중’이 완전히 여론조사 결과에 반영이 안 된 측면이 있다. 아직은 현역 의원이나 지구당 위원장들이 적극적으로 대의원들을 설득하지 않고 있다. 대의원들의 선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그들이 바닥 조직을 가동해 대의원들을 집중 공략한다면 대의원 표심도 대세론으로 돌아설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이 전 시장은 자신감과 함께 현재의 대선 구도를 깨지 않겠다는 의도도 경선 방식 전격 수용의 배경이 되고 있다. 현재 지지율 부동의 1위를 달리고 있는 이 전 시장이 판세를 흔들 여지가 있는 공연한 부스럼을 만들지 않기 위해 양보를 한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 전 시장을 지지하는 한 초선 의원은 이에 대해 “손학규 전 지사를 어떻게든 경선에 끌어들이기 위해 결단을 내린 것이다. 우리로서는 어떻게든 그를 설득해 경선에 참여시켜 한나라당의 단결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번에 이 전 시장이 양보를 한 것도 당의 단합을 위한 대결단이다. 그런데 손 전 지사가 경선 불참을 선언, 당의 분열에 대한 국민들의 실망감과 대선 승리에 대한 불안감이 증폭되면서 이 전 시장의 지지율에도 변화가 오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전 시장 캠프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정치권의 또 다른 전략 관계자는 “현재 이 전 시장의 압도적 지지율을 볼 때 그로서는 대선 승리로 가는 길에 웬만해선 악재를 만들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른바 ‘상황 관리론’이다. 무리수를 둘 필요가 없다. 이렇게 서서히 위험 요소를 줄여가면서 ‘더 이상 대안이 없다’는 국민적 공감대와 함께 대세론을 더욱 굳혀나가려는 게 이 전 시장의 전략이다. 현재 캠프 내부와 지지 의원들 사이에서는 ‘빨리 대세론을 굳힐 수 있는 방법을 찾자’는 공감대가 더욱 확산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라고 밝혔다. 여기에는 후보 검증 노이로제에 걸린 이 전 시장의 현실적 판단도 깔려 있다는 분석도 있다. 이 전 시장으로선 경선룰과 관련한 갈등이 계속될 경우 검증 공세도 가열될 수밖에 없다고 보고 한시라도 빨리 한나라당의 후보가 되어 안팎의 후보 검증 공세에 대한 당의 공식적인 보호를 받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전 서울시장이 경선 룰과 관련한 논란을 해소하기 위해 당 지도부와 경선준비위의 결정을 전적으로 따르겠다고 한 데 이어 박근혜 전 대표도 ‘당원동의’라는 전제를 깔기는 했지만 ‘8월 20만 명’ 안 수용의사를 밝힘에 따라 경선 룰 협상은 극적인 타결을 보게 될 가능성이 커졌다. 박 전 대표로서는 이 전 시장이 양보를 한 상황에서 자신의 입장을 과도하게 반영하려 할 수는 없다고 보고 일단 크게 손해 보지 않는 선에서 타협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손 전 지사가 경선 불참을 선언함으로써 당내 경선은 새로운 양상을 보일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이 전 시장은 손 전 지사의 불참이 현재 구도를 뒤흔들 수 있다고 우려할 수밖에 없으며 박 전 대표는 어떻게하든 손 전 지사와의 연합으로 이 전 시장의 아성을 공격하려 할 것이 분명하다.
즉 이명박 전 시장이 상황 관리론으로 서서히 대세론을 굳혀 가는 것에 대해 박근혜 전 대표와 손학규 전 지사가 어느 정도까지 ‘연대’해 그 성을 깨뜨릴 수 있느냐에 따라 경선 구도도 또 다시 급변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정치권의 한 전략 컨설팅 관계자는 이에 대해 “현재의 지지율을 보면 박 전 대표의 경우 뚜렷한 해법이 보이지 않는 상태다. 무엇보다 먼저 현재의 이명박 1위 독주 체제를 깨야 한다. 여기에 손 전 지사와의 연대 필요성이 제기된다. 두 사람의 코드가 맞지 않지만 경선 승리를 위해선 묵시적 연대 내지 공개적 연대를 통해 현재의 경선 구도를 흔들어놓고 난 뒤 차후를 모색해볼 수 있다”고 밝혔다.
현재 박-손 양 진영의 ‘묵시적’ 연대는 이 전 시장을 공격하는 데서도 확인된다. 박 전 대표는 경남대 특강에서 “요즘 일부에서 공천을 미끼로 사람들을 회유하고, 조직을 만들고, 사람을 동원하기 위해 금품을 살포하고 있다는 얘기가 곳곳에서 들리고 있다”며 구태가 횡행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손 전 지사도 “의원들이 ‘내가 잘나서 국회의원 됐습니까. 공천 때문에 됐죠’라고 하소연하고 있다. ‘(다른 진영에서) 너 여기 서지 않으면 공천 안 줘’라고 한다는 얘기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손 전 지사의 비서실장인 박종희 전 의원은 한술 더 떠 “한나라당은 대세론에 집단 마취돼 2002년 패배의 길을 그대로 밟고 있다. 국회의원 공천권을 갖고 있는 최고위원들은 특정후보의 선거 참모노릇을 하며 당원들을 줄 세우고, 금품살포나 향응은 이회창 후보 시절보다 더욱 심각하다. 금품살포는 누가 누구에게 줬다는 구체적인 근거가 있고 내용이 아주 심각하다. 후보캠프 쪽에서 지구당 사람들에게 1000만 원 내외가 전달됐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박 전 의원은 그에 대한 구체적 증거는 대지 못했지만 당사자들에게 직접 들은 내용이라고 주장했다.
‘박-손’ 양측은 최근 들어 부쩍 ‘줄세우기’ ‘세몰이’ ‘회유’ 등이란 용어를 쓰며 서로 ‘입’을 맞추고 있다. 직접 거명을 하지는 않고 있지만 지지율 1위인 이명박 전 서울시장을 겨냥하고 있다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앞으로 두 사람의 이런 ‘묵시적’ 연대는 더욱 빈번할 것이라는 게 일반적 분석이다.
앞서의 정치 컨설팅 관계자는 이에 대해 “박 전 대표가 역전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손 전 지사에게 ‘화해의 손길’을 전격적으로 내밀 가능성이 크다. 특히 박 전 대표 측은 경선에서 승리하더라도 본선 과정에서 이 전 시장의 활발한 지지가 없을 가능성에 대비해 손 전 지사에게 더욱 적극적인 화해의 손길을 내밀 가능성도 있다”고 밝혔다.
박 전 대표는 손 전 지사와의 연대를 통해 중도개혁세력으로 외연을 확대, 극보수의 이미지를 탈색시킬 수 있게 된다. 손 전 지사의 텃밭인 수도권에서의 지지율 제고라는 시너지 효과도 있다. 손 전 지사로서도 ‘정치적 사망’으로 인식되는 탈당보다는 현실적 카드를 쥘 수 있다. 박 전 대표와의 연대를 통해 차기 정부 초대 총리 또는 당권을 보장받을 경우 차기를 기약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양측은 그동안 그 가능성을 일축해 왔다. “현실성이 없다”는 것이다. 박 전 대표 측은 “원칙을 강조하는 박 전 대표가 연대를 통해 세를 확장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손 전 지사 측도 “단순히 정치권에 떠도는 얘기에 불과하다”며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두 사람의 연대 성사의 핵심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망령’에 달려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한나라당의 한 재선 의원은 “지난 2년 반 동안 박근혜 전 대표를 가까이서 모실 수 있었다. 그는 회의를 할 때 굉장히 합리적이고 자유로운 분이다. 아랫사람들의 자율성을 잘 존중해준다. 그런 그가 막상 자신의 권위를 손상하는 발언을 듣거나, 특히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밝힐 때 거의 히스테리 수준으로 반응하는 것을 보고 굉장히 놀란 적이 있다. 만약 그가 손 전 지사와 연대를 하겠다고 하면 손 전 지사가 분명히 부친 박 전 대통령과 관련한 과거사에 대해 분명히 짚고 넘어가자고 요구할 것인데 박 전 대표의 고집을 볼 때 그런 제안을 수용할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고 본다. 여기에 ‘손-박 연대론’의 허점이 있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그런데 박 전 대표가 부친의 그림자를 뛰어넘는 대결단을 보여준다면 그 파괴력은 상당할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7년 대선 당시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의 DJP연대로, 노무현 대통령은 2002년 대선에서 정몽준 의원과의 연대를 통해 권력을 쟁취한 바 있다. 모두 개혁과 보수의 조합이라는 특성을 갖고 있다. 이런 점에서 ‘박-손 연대’도 보수와 개혁의 결합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한나라당의 경선 전쟁은 이제 이런 가능성을 안은 채 제2라운드로 접어들고 있다. 그리고 그 구도는 ‘이명박 대 박-손 동맹’의 싸움으로 급변할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그런데 이런 구도의 최대 변수는 바로 손 전 지사의 정치행보다. 그가 ‘봉정암 구상’ 뒤 전격 탈당을 감행한다면 이런 구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손 전 지사가 범 여권의 오픈프라이머리에 전격 참여하거나 제 3세력 창당론으로 독자행보를 벌인다면 한나라당의 경선 구도는 여권의 정계개편과 맞물려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 전망이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