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학규 전 경기지사가 범여권 대권경쟁구도에 뛰어들었다. 사진은 지난 3월 9일 한국노총 행사장에서 만난 손학규 전 지사와 정동영 전 의장. | ||
손 전 지사의 탈당 소식을 접한 대부분의 범여권 주자들이 한나라당의 일부가 무너졌다는 점에서 한 목소리로 환영의 뜻을 전하면서도 ‘손학규 범여권 후보론’에 대해서는 선뜻 긍정적인 답을 내놓지 않고 있는 배경에는 대권 이해득실이 자리잡고 있다. 손 전 지사의 탈당 파장이 미동도 않던 범여권 대선지형을 흔든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그 파도가 자신들에게 닥쳐오는 것만은 어떻게 하든 막고 싶은 것이 속마음이다. 오히려 일부에서는 결단을 앞당기려는 움직임도 나타나 주목되고 있다.
손 전 지사의 대권경쟁 참여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활력과 동시에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는 범여권 대권주자들의 손익계산서와 대권 노림수를 살펴봤다.
통합신당 주도권 다툼 등으로 내홍을 거듭하고 있는 범여권은 손학규 전 지사의 탈당을 일제히 환영하고 있다. 한나라당 유력 주자인 이명박 전 서울 시장과 박근혜 전 대표가 주도하고 있는 대선 분위기를 범여권으로 돌릴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 분위기다. 실제로 범여권은 노무현 대통령의 탈당에 이어 3월말 열린우리당 핵분열 가능성이 설득력 있게 제기되는 등 계파간 갈등과 통합신당 주도권 싸움이 가열되면서 총체적 위기상황에 직면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의 지지율은 바닥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범여권을 통틀어 지지율이 한 자리수가 넘는 차기주자가 단 한 명도 없을 정도로 여론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범여권의 현실로 볼 때 손 전 지사의 탈당과 사실상의 범여권 대권경쟁 합류는 가뭄에 단비처럼 신선한 활력과 생동감을 불어넣어 주고 있는 형국이다. 특히 중도개혁 성향인 손 전 지사의 이탈을 계기로 한나라당을 수구·보수 집단으로 매도하며 ‘한나라당 대 반 한나라당’ 구도로 몰고 가려고 했던 범여권의 대선전략도 탄력을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열린우리당을 비롯한 범여권 제 세력과 대권주자들이 한 목소리로 손 전 지사 탈당을 환영한 이유이기도 하다.
범여권 주변에서는 벌써부터 ‘드림팀’이니 ‘빅매치’니 하는 가상 시나리오가 나돌고 있다. ‘드림팀’은 손 전 지사가 새로운 정치혁명을 주도할 파트너로 거론한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과 진대제 전 정통부 장관을 묶는 이른바 ‘손학규-정운찬-진대제 연대’를 일컫는다. 또 ‘빅매치’는 손 전 지사가 범여권 대선경선에 참여한다는 가정 아래 범여권 주자인 정동영·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 김혁규·한명숙 의원, 민생정치모임의 천정배 의원, 정운찬 전 총장 등이 오픈프라이머리라는 룰에 따라 대결을 펼친다면 경선 흥행은 물론 상당한 폭발력을 발휘할 것이란 시나리오다.
하지만 이러한 시나리오가 현실화될지 여부는 불투명하다. ‘드림팀’ 멤버로 거론되고 있는 정 전 총장은 손 전 지사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고 진 전 장관 역시 정치에 뜻이 없음을 천명하고 있다. 탈당 후 여론의 역풍에 시달리고 있는 손 전 지사도 당분간 중도개혁 성향의 제3지대 신당 창당에 주력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빅매치’ 역시 성사되기가 쉽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우선 기존의 범여권 대권주자들이 난색을 보이고 있고 독자 세력화를 모색하고 있는 손 전 지사의 참여 여부가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범여권 대권주자들의 반응은 차갑다. 김근태 전 의장은 20일 모 라디오에 출연해 “손 전 지사와 나는 중요한 역사적 고비에서 선택을 달리했다. 손 전 지사는 민자당에 참여했고 나는 정통 야당인 민주당에 참여했다”고 말해 손 전 지사와 분명한 선을 그었다. 천정배 의원도 21일 같은 라디오 프로에 출연해 “손 전 지사가 우리쪽 후보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돼서는 안 된다고 본다”고 주장했다. 정운찬 전 총장 역시 “손 전 지사와 인간적으로는 만날 수 있지만 정치적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는 정치적 만남을 갖지 않겠다”고 말해 손 전 지사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의중을 내비쳤다. 중도실용주의를 강조하고 있는 정동영 전 의장이 유일하게 ‘반한나라당’ 전선에서 손 전 지사와 협력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지만 속셈은 알 수 없다.
그 중에서도 특히 대권출마 여부를 놓고 장고를 거듭하고 있는 정운찬 전 총장 진영은 손 전 지사의 갑작스런 여권행 열차 예매로 다급해 하는 분위기다. 당초 정 전 총장 측은 범여권의 통합신당 추이를 지켜보면서 몸값을 최대한 끌어올린 후 8월이나 9월쯤 대권 출마를 선언할 계획을 세웠던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정 전 총장 측은 손 전 지사가 예상치 못한 깜짝 카드를 꺼내든 만큼 출마 선언을 앞당기는 쪽으로 전략을 급선회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정 전 총장의 한 측근은 22일 기자와 전화통화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 때 광주 망월동 묘역에서 대권출마를 공식 선언하는 방안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고 일부 측근들은 4·25 재보선 직후 ‘조기 출마론’을 주문하고 있다”고 전했다.
정 전 총장도 대권출마 결심을 굳힌 듯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그는 22일 서울대 국제대학원 공개 강연회에서 한국 사회 개혁에 대한 의지와 현 정부 정책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는 등 대권행보로 오해할 수 있는 격한 발언을 쏟아냈다. 강연을 마친 뒤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는 “결심이 서면 내 길을 가겠다. 끝이 어떨지는 누구도 모른다”고 언급해 대망론 속내를 어느 정도 드러내 보이기도 했다. 또 23일에는 연합뉴스와의 회견에서 ‘정치참여 결단의 시기를 신학기가 끝나는 5월말 이후로 보면 되느냐’는 질문에 “이번 학기를 끝내겠다고 한 말은 제 결단시기와 연결시킬 문제는 아니다”면서 “(학기가 끝나는) 5월말 이후에 결정하겠다고 말한 적은 없다”고 덧붙였다.
탈당이냐 잔류냐를 놓고 막판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고 있는 정동영·김근태 전 의장도 손 전 지사의 등장으로 인한 이해득실을 따지고 있는 분위기다. 정 전 의장은 조건부 연대론에 김 전 의장은 차별화에 각각 무게를 두고 있지만 자신들의 최종 거취와 열린우리당 분열 정국 추이에 따라 손 전 지사와의 관계 및 대권 전략을 재수정한다는 내부 방침을 세워놓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범여권 대권주자들의 셈법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황에서 오는 30일쯤 협상안이 타결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는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문제는 열린우리당 분화를 부추기는 동시에 대권주자들의 결단을 앞당기는 기폭제가 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실제로 정·김 전 의장과 천 의원, 정 전 총장 등 범여권 내 대부분의 차기주자들은 “정부가 시간에 쫓겨 협상을 졸속으로 진행하고 있다”며 한미 FTA 타결 기조를 유지하고 있는 노 대통령과 정부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다. 노 대통령과의 차별화를 시도하면서 정국 주도권 장악을 노리는 차기주자들이 FTA 문제를 정치 쟁점화 해 자신들의 거취 문제를 결정짓는 데 불쏘시개로 활용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와 관련 21일 기자와 만난 열린우리당의 한 고위관계자는 “그동안 탈당 명분을 찾고 있었던 당내 일부 대권주자와 탈당 세력들이 한미 FTA 협상 결과를 지렛대로 거사를 단행할 가능성이 높다”며 “협상안 타결 시점인 3월말 이후 열린우리당 내 계파 갈등은 최고조에 달하면서 대규모 추가 탈당 등 극심한 내홍을 겪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동안 여권 주변에서 나돌았던 ‘3말 4초 거사설’이 현실화 될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는 듯한 발언으로 해석된다.
정치권에서는 정동영 전 의장의 3월말 탈당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여기에 10~20여 명의 의원들이 따라 나갈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이미 앞서 탈당한 세력들과 손을 잡을 것이며 이렇게 될 경우 여권의 중심은 열린우리당에서 탈당파로 움직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범여권은 중심이 없이 몇 개의 집단으로 분화하는 것이며 손 전 지사의 움직임에 따라서는 더욱 복잡한 양상을 보일 수밖에 없다. 결국 손 전 지사 탈당으로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는 범여권 대선지형은 한미 FTA 결과물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정·김 전 의장의 최종 선택에 따라 또 한 차례 폭풍우가 몰아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또 범여권 주자들과 손 전 지사는 당분간 자신들을 중심으로 한 독자노선 구축에 총력을 기울이면서 향후 통합신당 작업이 본격화되면 상호 전략적 연대 내지는 범여권 후보 단일화를 모색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결국 손 전 지사의 한나라당 탈당은 범여권 대권주자들의 결단을 재촉하는 쪽으로 몰아가는 형국이 되고 있다. 범여권 대권주자들로서도 손 전 지사의 탈당을 마냥 환영하며 즐길 수 있는 형국은 아닌 것이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