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월 7일 노무현 대통령이 안동 하회마을을 방문해 하회탈을 써보고 있다. | ||
범여권의 정치인들에게 “노 대통령이 범여권의 차기 대통령 후보로 누구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으냐”고 질문하면 되돌아오는 답변이다. 범여권이 사분오열되고, 대선주자들의 지지율이 바닥을 기는 상황에서 ‘승부사’인 노 대통령이 아무런 계산 없이 관전자로서 만족할 것으로 믿는 정치인은 거의 없다. 하지만 누구도 함부로 이름을 올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노 대통령의 복심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
‘노심’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차기 대선에서 노 대통령의 영향력을 가늠해 볼 필요가 있다. 노 대통령과 청와대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게 있다. 임기 마지막까지 원칙과 소신에 따라 국정을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역대 대통령들도 임기 말에 접어들어 비슷한 다짐들을 해왔다.
김영삼(YS) 김대중(DJ) 두 대통령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YS와 DJ는 임기말 권력누수를 막지 못했다. YS는 아들 현철 씨 스캔들로, DJ도 자식들이 관련된 이른바 ‘게이트’ 파동으로 급속히 국정 장악력이 쇠퇴하는 과정을 밟았다. DJ 때는 다소 정도가 덜했지만 인기가 급락한 임기 말의 대통령과 차별화를 시도하는 여당과 차기 대선후보들의 움직임도 권력누수의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청와대는 “현 참여정부에서 ‘게이트’는 없다”고 수차례 강조해 왔다. 노 대통령이나 측근·친인척이 연루된 권력형 비리사건은 걱정할 것 없다는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실제로 한나라당을 비롯한 야당들도 참여정부는 과거 정권과는 다른 것 같다는 입장이다. 한나라당의 정보통인 한 의원은 “이 정부 들어 권력형 비리 문제에 관한 한 (역대 정권과 비교해) 확실히 나아진 것 같다”고 말했다.
앞으로 남아 있는 정국일정도 노 대통령 편으로 볼 수 있다. 농업·서비스 등 일부의 반발이 거세긴 하지만 한미 FTA에 대한 국민 만족도와 지지도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절반이상의 지지를 받고 있다. 덩달아 노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도 각종 조사에서 30%대로 지난 1월에 비해 2배 이상 높아졌다. 남북정상회담 개최 가능성과 함께 북미 관계정상화 등은 노 대통령의 의지에 따라서는 대선정국의 흐름을 얼마든지 뒤흔들 수 있는 사안이다. 노 대통령의 일거수 일투족에 범여권은 물론 한나라당이 눈을 떼지 못하는 이유이다.
이런 노 대통령의 차기 대선 영향력을 정치권에서는 “특정 후보를 당선시킬 수는 없더라도, 낙선시킬 수는 있다”는 말로 표현한다. 현재까지 청와대 참모진과 범여권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차기 범여권 대선후보에 대한 노 대통령의 ‘복심’은 두 갈래 정도로 파악되고 있다. 최근 열린우리당 내부에서 흘러나왔던 ‘영남 후보론’과 ‘지역연대 후보론’이 그것이다.
영남 후보론은 청와대 참모진 가운데 ‘부산파’와 열린우리당 친노그룹이 진원지라는 설이 유력하다. 노 대통령이 지역주의 극복을 ‘마지막 정치과제’로 상정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노 대통령이 이를 위해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다시 한번 개혁세력의 영남진입을 시도할 것이라는 데 근거를 둔 게 영남 후보론이다. 정치권에서는 범여권 대선후보의 영남 득표율이 25% 아래로 밀리면 당선이 힘들다고 보는 게 정설로 돼 있다. 그래서 영남권 30% 지지는 범여권에서 대선승리의 ‘필요충분조건’으로 자주 거론된다.
한나라당의 유력 대선주자인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박근혜 전 대표가 모두 영남출신이라는 점도 범여권 영남후보론의 이유로 꼽히고 있다. 이른바 ‘맞불작전’이다. 영남후보에는 영남후보로 맞서야 영남 득표 30%가 가능하다는 논리이다.
영남후보로는 경남도지사 출신인 김혁규 의원,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 김두관 전 행정자치부 장관 등을 꼽을 수 있다. 한때 정치권에서는 ‘노심’이 김 의원에게 있다는 설이 유포된 적이 있었다. 김 의원이 친노그룹인 의정연과 영남의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김 의원 측은 물론 범여권 내부에서도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다. 특히 노 대통령이 “실물경제 좀 안다고, 경제공부 좀 했다고…”라며 차기 대권후보의 자질을 거론한 직후 김 의원 측에서는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는 분위기가 강해지고 있다. 김 의원은 재미 실업가 출신이다.
경남 남해 출신으로 ‘리틀 노무현’이라 불리는 김 전 장관은 ‘민심 대장정’을 통해 내공을 키우고 있지만 여의도 정치를 모른다는 취약점을 가지고 있다. 범여권에서 그는 이미 잊혀지고 있는 느낌이다.
범여권의 상당수 의원들은 그래서 경북 경주 출신인 유 장관의 움직임을 더 주목하고 있다. 그는 노 대통령이 후보시절 당내 입지가 흔들릴 때 노 후보 사수대를 자처했고 이후에도 열린우리당의 개혁세력을 이끌면서 노 대통령을 끊임없이 지원해왔다. 부산 출신 청와대 참모인 A 씨는 “유 장관에 대한 대통령의 신뢰가 이해찬 전 총리 못지 않다”고 전했다.
A 씨는 “유 장관은 한나라당 세력과 확실하게 맞설 수 있는 논리와 정치적 추진력을 갖추고 있다. 노 대통령이 눈여겨볼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며 “일부에서는 그의 튀는 언행을 문제 삼지만 표현이 아니라 내용이 틀린 경우가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반대세력도 만만치 않다. 열린우리당의 B 의원은 “노 대통령으로서는 유 장관을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안티(반대세력)가 너무 많다. 지지율도 나오지 않는데…”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안티는 그만큼의 마니아를 낳는다는 정치공학을 놓고 보면 유시민 후보 가능성은 여전히 살아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지역연대 후보론은 노 대통령이 특정 후보군을 두고 자율경쟁을 통해 최후의 강자가 자연스럽게 범여권 후보로 부상하도록 하는 일종의 대선 상황관리자로서의 역할에 머물 것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이미 열린우리당을 떠났고 임기 말에 접어든 노 대통령이 특정 후보를 심중에 두고 있다 하더라도 이른바 ‘낙점’은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노 대통령의 스타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지역연대 후보론이 고개를 들고 나오기 시작한 시점이 문재인 씨의 청와대 비서실장 기용 직후라는 것도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문 비서실장은 지난해 5·31지방선거 당시 ‘부산정권 발언’ 파문의 주인공. 그만큼 범여권 내 비영남권의 견제도 강하다. 청와대 부산파 참모진과 영남권 의원들 사이에서 영남후보론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에서 문 실장이 등장한 것이다. 열린우리당 정동영 김근태 두 전 의장, 민생정치모임 천정배 의원,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 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 등 범여권 대선주자들로서는 달가울 리 없는 장면이다.
이런 기류는 범여권의 주축인 호남세력의 움직임에서도 읽을 수 있다. 열린우리당의 친노 직계로 분류되는 C 의원은 “범여권으로서는 호남을 무시할 수 없다. 노 대통령의 고민도 거기에 있을 것”이라며 “DJ가 노 대통령의 연임제 개헌론에 대해 ‘정·부통령제가 빠져 아쉽다’고 한 점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고 귀띔했다. 최근 DJ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정·부통령제 개헌이 영·호남 지역주의 해소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런 내용을 종합해 보면 지역연대 후보론은 노심이 영남후보론으로 기울고 있다는 얘기가 나돈 데 따른 역작용의 산물이라는 측면이 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분오열의 상황에 빠진 범여권을 하나로 묶기 위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열린우리당의 D 최고위원은 “현재 범여권 주자들이 단독으로 한나라당 후보를 뛰어넘는 구도로 가기에는 벅찬 게 현실이지 않느냐”면서 “때문에 이제는 지역별 대표주자들이 경쟁을 통해 선출된 대표이사(대선후보)를 정점으로 뭉쳐 한나라당을 깨는 방법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역연대 후보론의 실체는 PK의 김혁규 의원과 김두관 전 장관, TK의 유시민 장관, 전남의 천정배 의원, 전북의 정동영 전 의장, 충청의 정운찬 전 총장, 수도권의 김근태 의원과 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 그리고 한나라당을 탈당한 손학규 전 지사가 지역별 대표성을 갖고 반 한나라 공동전선을 형성한 뒤 경쟁을 거쳐 후보를 낸다는 것이다. 정치권 일각에선 노 대통령의 복심이 바로 이 지점까지 와 있다고 보고 있다. C 의원은 “대통령도 한나라당 두 후보 지지율이 70%를 넘는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며 “대통령이 분명히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적전분열의 위험까지 감수하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노무현 디스카운트’(노 대통령이 나서면 오히려 지지도가 떨어지는 현상)를 말하지만 현직 대통령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다. 통합정당이 서고 나면 어떤 식으로든 노 대통령의 의중이 드러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노심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시기가 통합신당 창당 이후가 될 것이라는 뜻이다.
정기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