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3월 탈당 기자회견 직후 손학규 전 지사. | ||
탈당 이후 한동안 김지하 시인 박형규 목사 등과 같은 재야인사, 문화인들과의 만남을 제외하고는 정중동의 행보를 보이던 손 전 지사가 최근 발걸음을 재촉하고 나섰다. 매서운 시베리아 벌판에 나선 그가 새로운 정치세력을 규합해 대권의 꿈을 이어갈 수 있을지 앞으로의 몇 주가 그 가능성을 말해 줄 고비로 보인다. 새롭게 그리고 보다 강하게 ‘손풍’을 일으키고픈 그의 바람이 실현될 수 있을까.
“모종의 계획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 얘기할 단계는 아니다. 차차 보이게 될 것이다.”
손학규 전 지사 캠프의 한 관계자는 향후 손 전 지사의 ‘정치적 행보’에 대해 말을 아끼면서도 무언가 암시하는 듯한 발언을 내비쳤다. 하지만 정치권에서 손 전 지사의 상황에 대해 낙관적으로 전망하는 이는 많지 않다. 한 여당의 중진 의원은 “성공하면 한국의 정치사에 길이 남을 사건이겠지만 현재로서는 무모해 보이는 게 사실”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손 전 지사가 탈당 이후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벤처산업이 몰려 있는 구로 디지털단지였다. 그는 이곳 방문에 대해 자신의 정치실험과 벤처산업의 도전정신을 비유하기도 했다. 스스로의 평가대로 손 전 지사의 탈당이 성공률 5%에 이른다는 벤처의 모험정신에 비견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손 전 지사의 주변 상황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동아일보>가 지난달 29일 조사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손 전 지사는 대선후보 선호도에서 6.0%를 얻어 탈당 전인 2월 조사(6.2%) 때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탈당에 대해서는 열린우리당 지지층도 49.0%가 ‘잘못한 일’(전국 60.9%)이라고 평가해 ‘잘한 일’(40.8%·전국 23.4%)이라는 의견보다 많았다. 다만 범여권 대선후보 선호도에서 2월 조사(16.6%)보다 오차범위에서 소폭 상승한 18.2%를 기록해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19.2%) 등을 제친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더구나 정치권의 반응은 싸늘하다. 열린우리당 내에서 상대적으로 ‘잠재적 우군’으로 분류됐던 김부겸 김영춘 송영길 임종석 등 재선의원들의 미지근한 반응은 손 전 지사를 우울하게 만들고 있다. 이들 재선 의원들은 지난달 29일 손 전 지사 문제 등을 의논하기 위해 여의도 모처에서 모였지만 서로 다른 정치적 견해만 재확인하고 헤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모임에 참석했던 한 의원은 “김영춘 의원의 경우 당장 탈당하는 모습은 보기 좋지 않으니 김부겸 의원도 당에 남아서 손 전 지사를 돕고 임종석 의원도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을 만나가면서 상황을 보자고 제안했다”고 전했다.
▲ 정운찬 전 총장. | ||
손 전 지사는 탈당에 즈음해 이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답안을 만들어 둔 것으로 보인다. ‘범여권’으로 불리는 야권의 여집합 속에서 ‘여도 아니고 야도 아닌’ 제 3지대를 무대로 삼겠다는 것. 하지만 그가 내심 기대하고 있던 ‘전진코리아’도 쉽게 ‘적극 지지’하고 나설 것 같지는 않다. 전진 코리아의 한 관계자는 “손학규 전 지사를 포함해 모든 범여권 후보들과 함께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가능성이 큰 쪽에 올인하겠다는 계획이다.
손 전 지사가 가장 바라는 바는 자신을 중심으로 해서 범여권을 하나로 모으는 구도일 것이다. 그가 지난 3일과 4일 연이서 범여권 잠룡으로 손꼽혀온 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을 만난 것도 이들과의 연대 및 교류를 염두에 둔 제스처였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곳은 움직일 공간이 크지 않다. ‘외줄타기’에 비유될 정도로 좁은 무대다.
이러한 상황에 최근 정운찬 전 총장과 정동영 전 의장 등 잠재적인 손 전 지사의 라이벌인 범여권의 주요 인사들이 잇따라 호남을 방문한 것은 손 전 지사에게 경계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더구나 정 전 총장은 4일과 5일 광주에서 열린 특강에서 연이어 햇볕정책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아직까지도 마땅한 범여권 주자가 없다는 것이 손 전 지사에게 그나마 낙관적인 점이다. 결국은 이들이 한 곳에서 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손 전 지사는 지금 그때를 위해 칼을 갈고 있는 것이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앞으로 손 전 지사와 정 전 총장이 범여권 후보로 경쟁을 펼친다면 향후 한나라당 빅2의 상황과 비슷하게 흘러갈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이미 흥행요소를 잃어버린 이명박, 박근혜 두 후보의 드라마보다 훨씬 재미가 더할 것이다”고 전망한다. 또한 “그 시점이 바로 한나라당 대권후보들의 지지율 거품이 꺼지는 시점이 될 것”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과연 손학규 전 지사가 시베리아 벌판에서 돌아와 흥행 드라마를 만들어 낼 수 있게 될까.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손학규의 반전 드라마’가 어떻게 펼쳐질지 주목된다.
조성아 기자 lilychic@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