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동익 전 대한의사협회장이 녹취록과 관련해 지난 24일 국회 보건복지위에 출석해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 ||
‘장동익 녹취록’ 파문은 장 전 회장 발언의 진위 여부를 떠나 그동안 물밑에서 진행됐던 국회와 이익단체의 검은 커넥션이 수면 위로 부상했다는 점에서 적잖은 파장을 예고하고 있다. 한국사회의 대표적인 이익단체인 의협의 대국회 로비 관행이 여과 없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또 이러한 로비 행태는 비단 의협뿐만이 아니라 국회와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는 각종 이익단체와 기업체, 국회 피감기관 등에서도 오랫동안 관행처럼 지속돼 왔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을 더해주고 있다.
따라서 검찰을 중심으로 한 사정기관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각종 이해집단의 대국회 로비 관행을 뿌리 뽑는다는 방침이어서 대선정국을 앞두고 있는 정치권에 적잖은 파문을 불러올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의협 로비 의혹 사건을 집중 수사하고 있는 검찰은 국회 보건복지위와 복지부, 의협을 1차 타깃으로 삼고 조만간 장 전 회장 등 핵심 관련자들을 차례로 소환 조사할 계획이다. 검찰은 특히 장 전 회장이 사용한 돈의 사용처가 불분명하고 과거 집행부 또한 수십억 원에 달하는 비자금을 조성한 의혹이 제기되고 있어 이러한 검은 돈이 정·관계에 유입됐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면서 수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실제로 <일요신문>이 입수한 2006년 정치후원금 공개대상기부자(연간 120만 원 초과) 명단에 따르면 후원자 직업란이 병원장,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 등으로 표기된 것은 무려 100여 건에 후원금액은 3억 2000여만 원을 상회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의협의 집중 로비 대상으로 지목받고 있는 국회 보건복지위에 소속된 의원 중 7명이 의료계 인사들로부터 후원금을 받았고 장 전 회장으로부터 1000만 원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정형근 한나라당 의원은 의료계 인사들로부터 2600여만 원의 후원금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장 전 회장이 집중 로비를 벌였다고 발언한 보건복지위 법안소위 소속인 양승조 열린우리당 의원과 의사 출신인 안명옥 한나라당 의원은 의료계 인사로부터 각각 300만 원의 후원금을 받았다.
검찰은 이런 후원금 내역을 바탕으로 후원금의 대가성 여부와 의협의 후원금 편법 집행 의혹 등을 철저히 규명한다는 방침이다. 검찰은 또 장 전 회장이 재임기간에 정치권 인사들을 폭넓게 접촉했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수십억 원대의 의협 비자금 용처를 파헤치는 데 수사력을 집중할 계획이다.
실제로 의협의 2005년 예산 회계감사 관련 서류 등에 따르면 의협의 비자금 중 상당 부분은 유흥 접대나 골프 접대 등에 쓰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에 따르면 2003년부터 2005년까지 3년간 사용된 술값이 무려 4억 6800만 원이며 골프 등의 명목으로 쓴 법인카드도 4억 2000만 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증빙자료가 불충분하거나 아예 근거자료 없이 사용한 금액도 21억 원이 넘는 것으로 나타난 것으로 알려졌다.
▲ 장 전 회장의 대화 내용 중 일부. | ||
검찰 주변에서는 보건복지위원 뿐 아니라 중진인 열린우리당 L 의원과 한나라당 K 의원 등 의료계와 친분이 두터운 거물급 인사가 포함된 이른바 ‘의협 로비 리스트’ 명단이 나돌고 있는 실정이다.
검찰과 사정기관은 의협 로비사건뿐만 아니라 이왕 대국회 로비 실태가 드러난 만큼 로비 의혹이 끊이질 않고 있는 다른 상임위와 정치인들에 대한 내사에도 적극 나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실제로 국회 주요 상임위 주변에서는 피감기관과 기업체, 이익단체 등 이해관계가 물려 있는 집단의 전방위 로비 행태가 은밀하고도 관례처럼 진행돼 왔던 게 사실이다. 이들 집단들은 원활한 국정감사와 소속 집단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법안이 계류 중일 때, 또 대기업 총수 일가의 증인 문제가 불거질 때 각각 해당 상임위를 대상으로 집중적인 로비를 벌여왔다.
특히 기업체의 대국회 로비 실태는 상상을 초월한다. 국내 주요 대기업은 막강한 자금력과 정보력, 학연 지연 친분 등 인재풀을 총동원해 전방위적인 로비 활동을 벌이고 있다. 매년 국정감사 시즌이 되면 이들 대기업 정보팀은 국회에서 상주하면서 해당 상임위 동정을 체크하는 등 정보전쟁을 방불케한다. 정무위나 재경위 등 재벌 관련 국회 상임위가 해마다 재벌총수나 그 일가를 국정감사 증인으로 채택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국감 증인으로 출석한 재벌총수는 손으로 꼽을 정도다. 국회 주변에서는 오래전부터 ‘재벌총수 국감증인 무용론’이 제기되고 있고 ‘재벌에 약한 국회’라는 비아냥이 거세지고 있을 정도로 대기업의 대국회 로비력은 막강하다.
대기업들은 법인의 후원금 기부가 금지된 이후 해당 상임위 소속 의원들에게 직원이나 가족 명의를 이용해 로비 차원의 후원금을 기부하는 불법을 자행하고 있다. 실제로 문석호 열린우리당 의원은 지난 2005년 12월 김선동 회장의 지시를 받은 에쓰오일 직원 546명으로부터 1인당 10만 원씩 모두 5460만 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선고유예(징역 8월)를 선고받고 현재 항소심이 진행중이다.
S기업은 지난해 자사의 기업활동을 규제하는 법안이 국회 상임위에 상정되자 법안 저지를 목적으로 해당 상임위 소속 의원들에게 회사 직원과 가족들을 총동원해 1억 5000여만 원을 불법 후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S기업으로부터 불법 후원금을 받은 의원은 열린우리당 P(5000만 원)·S(3000만 원)·K(2000만 원) 의원과 한나라당 L(3000만 원)·A(2000만 원) 의원 등 모두 5명인 것으로 <일요신문> 취재 결과 확인되고 있다. 또 일부 금융계는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법안 처리를 조건으로 직원 500명을 동원해 S 의원에게 5000만 원을 불법 후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소액 기부자는 명단을 공개하지 않을뿐더러 10만 원을 후원할 경우 연말정산을 통해 전액 환급 받을 수 있는 점을 기업들이 악용해 대국회 로비 방법으로 적극 활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앞서 사행성 게임 바다이야기와 관련해서도 대정치권 로비가 문제된 바 있다. 그러나 당시에도 수사 결과는 언제나처럼 미적지근했다는 것이 정치권 주변의 이야기다.
검찰과 사정기관은 의협 로비의혹 사건을 계기로 기업체 등의 대국회 로비 실태를 전방위적으로 점검하는 동시에 위법행위가 적발될 경우 엄벌에 처한다는 의지를 다지고 있지만 아직 단정하기는 이르다.
국회 보좌관 생활을 10년 넘게 한 열린우리당의 한 보좌관은 20일 기자와 전화통화에서 “피감기관과 기업체 등이 관련 상임위 소속 의원들에게 후원금 명목으로 로비를 벌이고 있는 게 현실”이라며 “검찰과 사정기관이 국회의원 후원금에 대한 대대적인 실사에 돌입할 경우 ‘불법 후원금’에 자유로운 의원은 소수에 불과할 것”이라고 전했다.
의협의 정·관계 로비 의혹 사건이 대형게이트로 비화될 조짐이 일고 있는 가운데 검찰과 사정기관은 대국회 로비 실태에도 메스를 들이댈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장동익 녹취록’ 파문으로 불거진 대국회 로비 의혹 사건의 불똥이 어디까지 번지게 될지 여의도 정치권이 검찰 수사 추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