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월 24일 ‘미래창조대통합민주신당’ 창준위 발족식에 참석한 대선 주자들. 왼쪽부터 손학규 전 지사, 정동영 전 의장, 천정배 전 장관, 한명숙 전 총리.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현재 범여권 통합 후보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갖춰야할 한 가지 필요조건이 있다. 바로 호남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는 점이다. 지금 어느 후보도 호남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자신할 수 없다. 더구나 호남의 전통적인 맹주인 민주당이 대통합신당에 등을 돌리고 있고 호남의 정신적 대부인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의중도 아직은 오리무중이다. 호남을 잡지 못하면 대권은커녕 범여권 통합 후보도 바라볼 수 없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호남민심을 둘러싼 각 대선주자들의 경쟁은 더 치열해지고 있다.
역대 선거를 볼 필요도 없이 범여권 최후의 보루는 누가 뭐라 해도 호남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그렇게 지역주의로의 회귀라며 대통합을 반대했지만 결국 대권주자들이 선택한 것은 ‘호남 없이는 대권은 꿈도 꾸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결국 호남에서 이기면 범여권 대선 후보로 가는 8부 능선을 넘는 것 아니냐”는 소리가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범여권 대선주자들의 호남행 발길이 잦아지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손학규 전 경기지사,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 천정배 의원, 이해찬 전 총리, 한명숙 전 총리 등 범여권 각 주자들은 오래 전부터 호남 지역에 공을 들여왔다.
DJ가 떠난 이후 지금까지 호남의 맹주 자리를 놓고 싸워 온 것은 과거 민주당의 한화갑 전 대표와 정동영 전 의장이었다. 열린우리당이 정권을 잡고 민주당은 원내교섭단체도 만들지 못할 정도로 위축됐을 때만 해도 정동영 전 의장이 호남의 맹주로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선거에서 민주당이 잇달아 승리하며 호남의 민심은 민주당으로 회귀한 듯도 싶었다. 지금 호남의 민심은 주인을 찾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각종 여론조사 결과는 범여권 내 지지율 1위인 손학규 전 지사와 호남을 정치적 기반으로 해온 정동영 전 의장이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호남과 아무런 연고가 없는 손 전 지사가 현재로서는 호남의 맹주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호남의 민심 가운데 상당 부분은 한나라당 후보와 맞설 수 있는 범여권 주자라면 지지하겠다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다른 주자들도 가능성을 엿보며 호남에 대한 구애에 매달리고 있다.
오랫 동안 한나라당에 몸담아 왔던 손학규 전 지사의 경우는 더더욱 호남민심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입장이다. 손 전 지사는 지난 15일과 20일 자신의 지지모임인 선진평화연대 광주·전남, 전북 지역 출범식을 갖고 호남 민심 흡수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손 전 지사 측은 특히 광주·전남 지역 출범식 장소를 김대중 컨벤션센터로 정하고 연설문에도 남다른 공을 들이는 등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고 한다. 손 전 지사를 지지하는 광주지역에 거주하는 한 인사는 “손 전 지사가 이미 오래 전부터 호남 지역 표심을 얻기 위해 남다른 노력을 해왔던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또한 ‘반 한나라당 정서’가 강한 호남 지역 일각에서는 그의 한나라당 탈당 전력이 오히려 지지도를 높이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손학규 전 지사와 더불어 범여권 주자 자리다툼을 벌이고 있는 정동영 전 의장으로서는 호남민심만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표심이다. 전북 순창 출신인 정 전 의장은 그동안 호남지역에 절대적인 지지기반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현 상태대로라면 정 전 의장이 그리 여유롭지는 못한 입장이다. 정 전 의장은 손 전 지사와 경쟁관계에 놓여 있다. 통합민주당에서 동시에 ‘러브콜’을 받은 두 사람이지만 정 전 의장은 손 전 지사에 비해 후보 지지도에서 한참 뒤지고 있다. 더구나 여론조사 결과 두 주자의 지지층은 비슷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그가 믿고 있던 호남민심의 견고함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고 있다는 점이 정 전 의장을 불안하게 하는 요소다.
여론 조사를 살펴보면 호남민심이 정 전 의장보다 손 전 지사 쪽으로 돌아섰음을 보여주는 결과가 잇달아 나타나고 있다. 7월 21일 한국갤럽조사에서 광주·전라 지역 응답자들은 손학규 전 지사와 정동영 전 의장에게 각각 16.3%와 6.7%의 지지를 보낸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7월 22일 <한국일보> 여론조사에서도 호남지역에서 정 전 의장은 20.6%를 얻으며 손학규 전 지사(24.0%)에게 뒤처졌다. 앞서 18일 <서울신문> 발표 여론조사에서 역시 호남지역에서 손 전 지사가 26.4%를 얻어 정 전 의장(20.1%)을 앞섰다.
그러나 정 전 의장은 최근 광주·전라 지역 거주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23.8%로 13.6%를 기록한 손 전 지사에 비해 앞섰다(조인스 풍향계 7월 26일 발표 주간 조사). <문화일보> 7월 정기여론조사에서도 정 전 의장이 광주·전라 지역에서 24.8%의 지지를 얻어 손 전 지사(18.3%)에 비해 앞서 근래 다른 여론조사와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그럼에도 정 전 의장의 확고한 지지층이었던 호남민심이 큰 변화를 맞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더구나 6월 말 <내일신문>에서 실시한 ‘호남지역 대선민심 조사’ 에서는 범여권 대선주자로 ‘호남이 지지하는 비호남 출신이 되어야 한다’(61.4%)는 의견이 호남 출신(28.0%)보다 많았다. 정 전 의장이 호남 출신이라는 이점이 오히려 악조건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에 대해 한 정치컨설팅 관계자는 “여론조사마다 결과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처럼 호남민심의 향방은 당분간 흔들릴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호남표심을 얻기 위한 경쟁도 치열해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정동영 전 의장과 더불어 전남 신안 출신인 천정배 전 장관 역시 호남을 집중적으로 겨냥하고 있다. 하지만 천 전 장관은 정 전 의장에 비해서도 지지율이 매우 미약하다. 전체 후보군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뿐 아니라 범여권 주자 중에서도 1% 미만의 열악한 지지를 받고 있는 상황. 하지만 호남표심에 대한 경쟁에서는 천 전 장관 역시 양보할 수 없는 상황이다. 특히 그는 근래 들어 손 전 지사의 호남지지가 높아지고 있는 점을 겨냥해 손 전 지사에 대한 공격 수위를 높이고 있다.
지난 7월 19일 광주를 방문한 천 전 장관은 손학규 전 지사를 염두에 둔 날선 발언을 잇달아 내놓았다. 김대중 컨벤션센터에서 가진 지지선언식에서 그는 “(자신은) 광주의 학살자 전두환이 주는 판·검사 임명장을 받을 수 없어 변호사를 했다”며 손 전 지사를 빗대 공격했다. 천 전 장관은 앞서 손 전 지사가 광주를 찾아 “5월 광주정신을 잊지 않고 있다”고 발언한 것에 대해 그는 “전두환·노태우가 만든 당에 들어가는 게 광주정신이냐”고 비판하기도 했다. 천 전 장관은 호남 지역에서 ‘비호남 출신을 내세워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강하게 맞서고 있다. 이날 천 전 장관은 “호남 주민이 호남 출신 대선후보는 안 된다는 패배의식에서 깨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며 “능력이 되면 밀어 달라. 호남이라서 안 된다는 말만은 하지 말아 달라. 목숨이라도 바쳐서 완수하겠다”는 각오를 밝히기도 했다.
천 전 장관뿐 아니라 그의 지지 의원들도 손 전 지사에 대한 견제에 나서고 있다. 호남에서만큼은 누구에게도 밀릴 수 없다는 각오인 것이다. 김희선 의원은 손 전 지사에 대해 “최악의 본선후보”라고 깎아내리며 “만약 TV토론에서 5·18을 반대, DJ반대, 광주학살, IMF, 차떼기정당, 햇볕정책이 퍼주기라는데 14년 동안 동의하다 이제 돌아와서…‘한나라당 후보’들만 세워놓고 토론회 할 것이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천 전 장관은 당분간 자신이 호남 지역의 지지를 받아야 하는 당위성을 내세우며 손 전 지사에 대한 견제를 동시에 해나가겠다는 계획이다.
친노 후보들의 호남 공들이기 작업도 주목된다. 특히 이해찬 전 총리와 한명숙 전 총리는 DJ와의 연계 이미지를 알리는 것에 주력하고 있다. 이들은 타 주자에 비해 ‘친노 이미지’를 안고 가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좀 더 불리한 상황에 놓여있는 게 사실이다. 이해찬 전 총리가 자신을 친노 후보로 묶는 것에 대해 불만을 드러내며 ‘친DJ’ 후보로 알리려고 하는 것 역시 호남표를 의식한 때문이다.
한명숙 전 총리 역시 잇달아 호남을 방문하면서 대권행보를 가속화하고 있다. 지난 5·18 기념식에 이어 7월에 호남민심투어를 다녀왔던 한 전 총리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 <화려한 휴가> 개봉에 맞춰 지난 26일 또 한 번 광주를 찾았다. 또한 한 전 총리 역시 DJ와의 교분 쌓기에 남다른 공을 들이면서 호남표심을 구하고 있다.
또 하나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민주당이다. ‘미스터 쓴소리’ 조순형 의원의 출마 선언으로 기세를 높이고 있는 민주당은 조 의원과 이인제, 추미애, 김영환, 신국환 등 전·현직 의원과 최근 가세한 김민석 전 의원을 중심으로 독자경선을 실시한다는 입장이다. 민주당의 독자적인 경선은 대통합신당의 경선과 양립할 수 있다. 호남 민심을 어수선하게 할 수밖에 없는 요인이며 본선에서도 갈라선다면 문제는 복잡하다.
현재로서는 범여권 주자들의 호남구애 작전이 누구의 승리로 끝나게 될지는 예측하기 힘들다. 여기엔 결국 노 대통령의 ‘전략’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입김’이 적지 않게 작용할 공산이 크다는 것이 정치권의 해석이다. 하지만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전망하기도 했다.
“호남지지자들의 ‘충성도’가 이전보다 많이 약해진 게 사실이다. 여론조사 추이를 살펴봐도 이를 알 수 있다. 그만큼 호남표가 분산될 가능성도 높다. DJ의 의중이 담긴 것으로 보이는 김홍업 의원의 탈당으로 인해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자들도 세가 나뉠 것이다. 결국 범여권 단일후보가 되는 것이 호남 민심을 얻는 것이 될 공산이 크다. 그런 점에서 호남은 범여권으로서는 누구 하나가 모두 가지기에 벅찬 곳인지도 모른다.”
조성아 기자 lilychic@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