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선을 4개월 앞둔 시점에서 제2차 남북정상회담 개최가 발표됐다. 한나라당 주도의 현 대권구도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사진은 지난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남북회담 당시 사진에 노무현 대통령을 합성한 것이다. 8월 말이면 이와 비슷 | ||
그동안의 대선 소사(小史)를 보면 ‘북풍’이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게 일반적 해석이다. 하지만 정치권은 2차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10월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답방설, 심지어는 남·북·미·중의 4자회담설까지 흘러나오면서 정상회담 후의 2차 지진에 더 주목하고 있다. 한반도 정세의 급격한 변화가 몰아쳐 더 파격적인 정국이 오게 될 경우 2차 정상회담에 떨떠름했던 여론에도 변화가 오게 될 것이라는 해석이다. 남북정상회담 개최와 대선의 2차 방정식을 풀어보았다.
2차 남북정상회담 개최는 국가적 어젠다가 총집결된 대형 이슈다. 12월 대통령 선거 정국에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정상회담이 대선 정국에 미칠 정치적 파괴력을 가늠해보는 것은 쉽지 않다. 또한 여야 가운데 누가 그 ‘과실’을 따게 될지도 불분명하다. 왜냐하면 정치판에 ‘북풍’ 변수가 약방의 감초이긴 했지만 그것이 꼭 선거 결과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의 예를 보면, 제1차 남북정상회담 개최 사실이 2000년 4·13 총선을 사흘 앞두고 발표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한나라당이 133석(48.7%)을 획득해 115석(42.1%)에 그친 민주당을 이겨 북풍이 큰 변수가 되지 못했음이 입증된 바 있다.
그리고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국민들의 가치관도 변하고 있음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언론사 여론조사에 따르면 <조선일보>와 갤럽 조사의 경우 이번 정상회담이 ‘대선에 영향을 줄 것’(40%)이라는 반응보다 ‘영향이 없을 것’(56%)이라는 반응이 더 높게 나타났다. <중앙일보> 조사에서는 정상회담 개최평가에 대해서는 80.5%가 잘된 일이라고 평가하면서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후 개최되는 회담시기에 대해선 대선이 4개월 남았고, 대통령 임기가 6개월 남았기 때문에 ‘시기가 부적절하다’는 주장에 대해 53.3%가 동의하고 44.4%가 동의하지 않았다.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이런 현상에 대해 “그동안 국민들이 북핵 위기를 거치면서 돌발 변수가 많은 남북관계에 대해 ‘감정적’인 접근보다는 ‘이성적’ 판단을 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정상회담 자체에 대해서는 정례적인 개최를 희망하며 찬성을 하고 있지만 그것의 정략적 이용 가능성에 대해서는 경계하려는 분위기가 강하다. 대북송금 특검에서 얻은 일종의 학습효과도 있다. 그래서 국민적 감동이 일어나 무조건 환영했던 1차 남북정상회담 때보다 이번 2차 회담에 대해서는 훨씬 절제된 반응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경향은 이번 대선 정국에 정상회담 개최 자체가 결정적인 변수가 되기 어렵다는 점을 미리 알려주는 시그널일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여론조사의 ‘기계적’ 분석을 벗어나 ‘정치는 생물이다’라는 명제 앞에 서면 정상회담 개최가 다르게 보일 수 있다. 특히 한나라당 일각에서는 2차 남북정상회담 개최 뒤의 제 2차 지진이 더욱 파괴적일 것으로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10월 빅뱅설’도 나온다. 한나라당의 정보통인 한 의원은 이에 대해 “1차 정상회담은 양국 정상의 만남 자체로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이번은 다르다. 정상회담 개최 자체에 대해서는 이미 전례가 있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그 신선함을 어필할 수 없다. 그보다 더 파격적이고 충격적인 제2의 카드가 있을 것으로 본다. 정보계통에서는 10월 들어 한반도에 획기적인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얘기가 계속 나오고 있다”라고 밝히면서 “노무현 대통령이 대선 4개월을 앞둔 상황에서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무리하게 정상회담 개최를 추진했다면 그것에는 분명한 로드맵이 있을 것으로 본다. 만약 정상회담이 ‘남-북-미-중’의 4자회담으로 이어져, 한반도 정전체제가 종전체제로 전환되는 것으로까지 성공한다면 노 대통령은 대박을 터뜨리는 셈”이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의 제2 카드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답방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한나라당 이규택 의원은 최근 “오는 8월 28일부터 30일까지 평양에서 회담을 하고, 10월 말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제주도를 답방해 정상회담을 한다는 설이 있다”라고 말했다.
여권이 제2의 카드를 기획하고 있다는 점은 남북정상회담 성사에 기여했다고 자부하고 있는 이해찬 전 총리의 입을 통해서도 확인되고 있다. 그는 최근 “9~10월 한반도에 큰 전환이 이뤄지는 전기가 마련될 것으로 본다”고 언급, 그 배경을 두고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정치권의 한 대북 소식통은 이에 대해 “이 전 총리는 올해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단독 면담하는 등 남북관계에 관한 한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최고위급의 정책 결정권자다. 그런 그가 10월에 한반도 정세에 획기적인 변화가 올 것임을 시사하는 것은 여권에서 모종의 빅 카드를 준비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으로 해석된다”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이 전 총리가 여권의 대선 후보로서 흘린 ‘큰소리’일 수 있다고 해석하지만 그의 여권 내 정치적 위상과 정보접근 능력을 감안하면 10월 변화설이 신빙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권이 제2의 카드를 기획해 남북관계에 진전을 이룬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정치적 역풍을 맞아 오히려 대선의 악재로도 작용할 수 있다는 해석도 있다.
2차 남북정상회담 개최는 대선 판도뿐만 아니라 현재의 정치 지형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먼저 노무현 대통령은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레임덕 방지와 여권 후보 선출 영향력 행사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고 할 것이다. 여권의 한 보좌관은 “노 대통령은 4개월만 있으면 정권을 넘겨줘야 한다. 역대 대통령의 예로 보면 이 시기쯤 되면 거의 식물 대통령 수준 아니었는가. 노 대통령은 역대 최저 수준의 지지율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9회말에 남북정상회담의 히트를 날렸다. 발표 직후 그의 지지율도 올라간 것으로 조사됐다. 노 대통령으로선 자신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현직’이라는 점을 범여권에 상기시켰다. 그의 정국 장악력에 힘이 붙으면서 범여권 주자들도 대통령과의 관계설정을 고민할 수밖에 없게 됐다”라고 말했다.
대선 4개월을 앞두고 대통령이 여권 주자의 눈치를 보는 게 아니라 대선 후보들이 지는 태양의 그늘에 계속 가려져 있어야 하는 아이로니컬한 상황을 노 대통령이 계속 만들고 있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정상회담 개최를 ‘무기’로 차기 대선 후보 선출에도 영향력을 미칠 것이다. 앞서의 보좌관은 이에 대해 “노 대통령은 이번 대선을 자신이 주도한 구도에서 치르려고 할 것이다. 그 ‘장’이 바로 정상회담이다. 현재 여권의 대선 후보들 모두가 정상회담 ‘특수’를 최대한 누리려고 노 대통령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단 노 대통령의 의도가 들어맞고 있는 셈이다”라고 밝히면서 “친노주자들이야 당연히 노 대통령의 정책을 계승하기 때문에 정상회담 정국을 이용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손학규 전 경기도 지사 등과 같은 비노주자들은 사정이 좀 다르다. 대선 구도가 남북정상회담 국면으로 전환되면 참여정부 및 노 대통령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는 기존 전략이 효과를 발휘하기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에 정상회담 국면 전개가 꼭 좋은 환경만은 아닐 수 있다. 노 대통령은 비노주자들도 어쩔 수 없이 자신이 만든 대선 구도로 들어올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럴 경우 노 대통령은 비노주자들에게까지 후보 선출의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라고 말했다.
▲ 지난 8일 남북정상회담 발표에 대해 한나라당 지도부와 예비대선후보들이 입장을 밝히고 있다. 사진제공=한나라당 공보실 | ||
여권 관계자들은 “채 한달도 남지 않은 범여권 예비 경선은 물론 본선 무대에서도 평화 문제가 표심의 향방을 좌우할 수 있는 ‘키워드’의 하나가 될 것”이란 인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각 캠프는 경선 전략을 수정해 평화 및 남북문제와 관련된 긴급토론회 또는 정책발표회를 마련하거나 현장 방문을 계획하면서 ‘평화 전도사’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비노주자들의 참여정부 비판 공세 속에서 수세에 몰렸던 친노주자들로서는 국면 전환의 중요한 전기를 맞았다고 판단하는 분위기다. 여권에게 정상회담 개최는 지지율 제고와 대선 승리를 위한 ‘전가의 보도’쯤으로 해석되는 분위기다. 하지만 일각에서 “민족사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이번 회담을 너무 정략적으로 이용하려고 할 경우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경고의 목소리 때문에 노골적인 정상회담 이벤트 조성은 피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한나라당은 정상회담 정국을 ‘심각하게’ 보고 있다. 한나라당은 정상회담 개최발표가 있자 즉각적으로 반대의사를 밝혔다가 ‘조건부 찬성’과 태스크포스팀을 중심으로 한 의제 설정에 대한 적극적 참여 의사를 밝히는 등 오락가락 행보를 보인 바 있다. 이를 두고 당 내부에서도 “한나라당이 남북관계에 대한 원칙이 있다기보다 대선 정국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고민하다보니 무조건 반대에서 한발 물러선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한나라당의 한 초선 의원은 또한 “빅 투의 지지율이 여권의 후보들 모두의 지지율을 합쳐놓은 것보다 몇 배는 더 높음에도 여권이 깔아놓은 판 위에서 움직여야 한다는 게 난센스 아닌가. 국민 여론을 보면 정상회담을 무조건 반대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적극 찬성하자니 여권 지지율만 끌어 올려주는 셈 아닌가. 대선이 정상회담 국면으로 진행되면 우리 후보는 철저하게 국외자일 수밖에 없다. 대선의 이슈 주도권을 뺏기게 되면 승리도 쉽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한다.
그러나 남북정상회담 이후 실제로 남·북·미·중의 4자회담이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답방이 이루어진다거나 새로운 남북 현안이 돌출되어 여론이 냉전세력과 평화세력 또는 통일과 반통일 세력으로 양분되는 경우가 생길 경우 한나라당이 냉전세력이나 반통일세력으로 구분되는 상황이 온다면 대선 결과도 알 수 없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도 없지 않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범여권은 분명 이런 상황으로 몰고 가려 할 것이며 남북문제에 약점을 가지고 있는 한나라당은 어떻게 하든 이런 상황을 막아야 승산이 있을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기도 하다.
정상회담은 며칠 남지 않은 한나라당 경선 흥행에도 ‘악재’가 되고 있다. 한나라당은 정권 재창출 가능성이 가장 높은 후보가 경선에서 선출되면 그 여세를 몰아 대세론을 더욱 강화시킬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정상회담 뉴스에 밀릴 것이 뻔하다. 또한 남북문제의 진전 여부는 경선에서 뽑힌 한나라당 후보의 화려해야 할 행보에 그림자를 드리울 것이 분명하다. 경제회생 등의 민생 문제를 주요 이슈로 생각하고 있는 한나라당으로선 그들의 ‘약점’인 평화 이슈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대선 결과도 달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