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8일 노무현 대통령이 문재인 청와대 비서실장, 한덕수 국무총리와 함께 한미FTA협상 유공자 격려 오찬장으로 가고 있다. 뒤에 보이는 사람이 변양균 정책실장. 청와대사진기자단 | ||
정치권 주변에선 벌써부터 이번 사건들이 노 대통령의 레임덕을 알리는 도화선 역할을 할 것이란 말이 나돌고 있을 정도다. 여기에 한나라당은 특검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총공세를 준비하고 있어 대선정국 주도권 싸움과 맞물린 17대 마지막 정기국회는 그야말로 사생결단식 대혈투를 예고하고 있다.
“수사가 미진하면 당력을 기울여 특검을 추진하겠다.”
가짜학위 파문과 수뢰 연루 의혹을 받고 있는 변양균 실장·정윤재 전 비서관 사건을 겨냥한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의 일성이다. 지난달 30일 지리산 가족호텔에서 열린 한나라당 합동연찬회 자리에서 강 대표는 “정권 말기에 청와대와 공직사회의 기강이 무너지고 권력형 비리가 기승을 부리는 조짐을 보이다 슬슬 곪아 터지고 있다”며 “현 정권이 그때그때를 모면하기 위해 수사에 개입하면 과거 ‘옷로비’ 사건처럼 정권 차원의 창피를 당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신정아 씨 사건과 관련해서는 “이 문제에 청와대 수석, 더 나아가 범여권의 대권후보까지 관련돼 있다는 설이 들린다”며 대형 권력형 비리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한나라당은 정 전 비서관 관련 의혹도 ‘권력형 비리’로 규정하고 검찰 수사 추이를 지켜본 뒤 미진할 경우 특검 추진을 검토하기로 결정한 상태다.
한나라당의 특검 카드에 대해 청와대는 이를 정치공세로 일축하고 있지만 내부 분위기는 심란하기만 하다. 두 사건의 실체적 진실은 검찰 수사를 통해 드러나겠지만 정치공세가 장기화될 경우 10월 정상회담이나 대선정국에 악재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나라당과 정치권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각종 의혹 중 일부라도 사실로 밝혀질 경우 참여정부의 도덕성은 송두리째 흔들릴 수밖에 없고 노 대통령은 극심한 레임덕에 직면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노 대통령이 그동안 낮은 지지율과 여야를 망라한 차기주자들의 정치공세도 아랑곳하지 않고 할 말을 다 하면서 꿋꿋하게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은 다름아닌 ‘게이트 없음’을 기조로 한 ‘도덕성’이었다. 정권을 유지하는 근본 뿌리였던 만큼 친인척을 비롯한 측근, 고위 공직자들이 연루될 소지가 있는 권력형 비리를 차단하기 위한 감시를 철저히 해 왔던 게 사실이다. 임기를 1년여 앞둔 올 초부터 청와대 민정팀을 정점으로 감사원, 국세청, 검·경 등 사정기관을 총동원해 암행감찰을 지속적으로 실시해 온 사실이 <일요신문> 취재 결과 드러나기도 했다(769호 참조).
하지만 ‘열 포졸이 도둑 한 명 못 잡는다’는 속담처럼 아무리 노 대통령의 의지가 강하다고 해도 현 정권 또한 임기말 측근 비리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할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노 대통령의 핵심 측근인 변 실장과 정 전 비서관이 권력형 비리 사건에 연루된 의혹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관측을 뒷받침하고 있다.
여기에 연말 대선을 앞두고 권력기관의 줄서기 현상도 본격화될 조짐이 일고 있다. 국내외 정보를 총괄하고 있는 국가정보원의 내부 문건이 노출되는가 하면 정부 부처에서 작성한 ‘경부운하 보고서’가 유출되기도 했다. 최근(30일)에는 국세청이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와 그 친인척들에 대한 재산검증을 벌였다는 의혹이 불거져 ‘권력핵심 배후설’을 둘러싼 정치 공방전으로 비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임기를 6개월여 남겨둔 노 대통령이 내우외환에 시달리며 총체적인 위기상황에 몰리고 있는 형국이다. 권력기관이나 정부 부처 공직자들의 정치권 줄서기 행태와 맞물려 공직기강이 흔들리고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임기 말 권력누수 현상으로 받아 넘긴다 해도 측근비리 등 권력형 비리는 그 차원이 다르다. 지루한 정쟁으로 인한 국정 혼선은 차치하더라도 민심이 등을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 정윤재 전 비서관. | ||
더구나 정 전 비서관의 수뢰 연루 의혹은 점점 커지고 있다. 정 전 비서관 사건과 관련해 “문제될 것이 없다. 무분별한 의혹 부추기기다”라는 입장을 고수해 왔던 청와대 측이 “부적절한 처신이었다”며 다소 수세적인 입장으로 선회한 것도 심상치 않은 여론을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지금 ‘정윤재 사건’은 권력 핵심의 입김이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새로운 정황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실제로 부산 지역 건설업자인 한림토건 김상진 씨로부터 세무조사 무마 청탁을 받고 뇌물(1억 원)을 수수한 혐의로 구속된 정상곤 전 부산지방국세청장과 정 전 비서관, 김 씨 사이에 드러나지 않은 검은 커넥션이 있었을 것이란 의혹이 확산되고 있다.
정치권은 정 전 청장이 뇌물 수수 혐의를 순순히 자백한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뇌물 수수액이 1억 원 이상일 경우 특가법이 적용돼 최고 무기징역의 중형을 선고 받을 수 있고 범죄 입증이 쉽지 않은 현금으로 뇌물을 받았음에도 범죄 사실을 털어 놓은 배경에 의혹의 눈길이 쏠리고 있는 것이다. 사건 파장을 차단하기 위해 도마뱀이 꼬리를 자르는 것과 비슷한 고육책 내지는 뭔가 믿는 구석이 있었을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지난 7월 16일 사기 등 혐의로 구속된 김 씨가 11일 만인 같은달 27일 구속적부심을 통해 쉽게 석방된 배경도 석연치 않다. 공사계약 서류를 위조해 거액을 대출받아 가로챈 혐의로 부산지검에 구속된 김 씨의 범죄 수법이나 피해 규모 등을 감안하면 쉽게 풀려날 사안이 아니라는 게 법조계 관계자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권력 실세 비호설이 나돌고 있는 배경이기도 하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김 씨가 정 전 청장에게 1억 원을 건넨 사실에 미뤄 정 전 비서관도 모종의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실제로 두 사람은 수년 전부터 알고 지내온 사이로 수차례 골프회동을 갖는 등 친분을 쌓아 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김 씨가 국세청의 조직적인 비호를 받으면서 금융 대출과 재개발사업 추진 과정에서 각종 특혜를 받은 것으로 드러나면서 이른바 ‘정윤재-김상진 커넥션’ 의혹도 증폭되고 있는 실정이다.
김 씨는 지난해 7월 정 전 비서관을 통해 정 전 청장을 소개받은 뒤 세무조사 무마는 물론 자신의 탈세비리를 제보한 사람의 실명을 넘겨받기도 했다. 탈세비리 제보자 신분을 철저하게 보호하고 있는 국세청 철칙을 감안하면 막강한 배후가 있었음을 반증하고 있다.
김 씨의 부정대출 및 재개발사업 과정에서의 특혜 의혹도 ‘정-김 커넥션’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검찰에 따르면 김 씨는 2003년 4월 한림토건과 주성건설의 공사수주계약서 등을 허위로 꾸며 신용보증기금과 기술신용보증기금의 보증을 받아 금융기관에서 60억 원을 부정 대출 받았다. 당시 기보 등은 자산잠식 상태로 대출심사가 엄격해 권력 실세 등의 지원 없이는 정상적 방법을 통한 대출이 불가능했을 것이란 게 업계 관계자들의 시각이다.
김 씨 소유의 일건건설이 2005년 12월 수주한 1502세대 규모의 부산 연제구 연산동 재개발사업 과정에도 배후설이 나돌고 있다. 김 씨는 사업 관련 서류를 조작해 재향군인회로부터 225억 원을 받아 챙기고 공사과정에서 가짜 토지수용 계약서를 이용해 157억 원을 가로채는 등 380억 원 상당의 사기 행각을 벌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 지난 31일 정동민 부산지검 2차장은 정윤재 전 비서관 관련 의혹에 대해 철저한 보완수사를 벌이겠다고 발표했다. 연합뉴스 | ||
정 전 비서관이 사표를 낸 배경과 시점에 대한 의문도 가시지 않고 있다. 정 전 비서관은 부산지역 대학 출강과 내년 선거를 준비하기 위해 사의를 표명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정 전 비서관이 청와대에 사표를 제출한 것은 8월 10일이고 정 전 청장이 구속된 것은 하루 전인 9일이다. 청와대가 이번 사건을 사전에 인지하고 파장을 줄이기 위해 사표를 받은 게 아니냐는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특히 사표 수리 과정에서 검찰에 압력을 행사했다는 지적도 일고 있다. 청와대가 검찰 측에 “사표를 수리해도 되겠느냐”고 문의한 배경에는 정 전 비서관의 사표를 수리하는 선에서 사건을 매듭짓자는 뉘앙스가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황에 비추어볼 때 정 전 비서관이 연루된 의혹을 받고 있는 수뢰 사건은 ‘정-김 커넥션’ 의혹을 넘어 정권 차원의 대형 권력형비리 공방전으로 확전될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이미 한나라당은 특검 카드로 으름장을 놓고 있고 정신적 여당인 민주신당도 검찰의 철저한 수사를 촉구하고 있는 상태다.
민주신당 이낙연 대변인은 31일 논평을 통해 “정 전 비서관의 부적절한 처신에 대한 의구심이 날로 커지고 있으나 본인의 해명과 청와대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상식은 쉽게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며 “이런 모든 의혹을 한 점 남김없이 불식시키기 위해 검찰을 포함한 관계당국은 새로운 자세로 엄정 조사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결국 검찰도 보완수사를 벌이기로 했다. 지난 31일 정동민 부산지검 2차장은 “이 사건과 관련해 각종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만큼 검찰은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철저한 보완수사를 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정-김 커넥션’ 배후에 또 다른 권력 실세들이 연루돼 있을 것이란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정 전 비서관이 대표적인 386 핵심 측근이라는 점과 김 씨와의 부적절한 관계, 여기에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가는 김 씨의 사업 행적 등을 감안하면 단순히 두 사람만의 커넥션에 그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여기에 한나라당 관계자들은 권력 속성상 현 정권도 임기 말로 치닫고 있는 만큼 변 실장이나 정 전 비서관 외에 또 다른 핵심 측근이 연루된 권력형 비리가 계속해서 터질 가능성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일부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대형 권력형 비리 사건에 연루된 정황이 포착된 현 정부 전·현직 핵심 실세들의 실명이 오르내리고 있고 검찰 등 수사기관도 이러한 사건들에 대해 내사를 벌이고 있다는 얘기가 꽤 설득력 있게 나돌고 있다.
노 대통령은 지난 31일 한국방송프로듀서연합회 창립기념식에서 “요즘 감도 안되는 의혹이 많이 춤추고 있다”고 의혹들을 평가절하하며 “언론사들이 난리를 부려도 임기 말까지 아무 지장없다”고 말했다. 과연 노 대통령의 뜻대로 될지 정계는 주목하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