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 F. 케네디 주니어와 부인 캐롤린의 생전 모습. 이들은 ‘임신소동’으로 인해 멀어져갔다고 한다. | ||
이야기는 케네디 주니어가 죽기 4개월 전인 1999년 3월로 거슬러 올라 간다. 그는 이때 묘령의 여인으로부터 ‘존에게’라고 시작되는 두 장의 편지를 받았다. 봉투에 적힌 주소와 이름을 본 그는 편지지를 봉투에서 꺼낼 때 이미 손을 가볍게 떨고 있었다.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우리는 두 번 정도밖에 안 만났지만 나는 당신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래서 이렇게 편지를 보내요.”
편지의 어조는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는 단호함이 엿보였다.
“나는 조용히 있을 거예요. 하지만 나는 당신과 아이의 관계가 지속되길 원하고 있어요. 나는 우리가 그것을 잘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당신도 자신의 결혼생활이 점점 무너지고 있다는 걸 알잖아요. 우리는 계속 서로 만나야 해요.”
1년에 이런 종류의 편지를 수백 통씩 받는 그이지만 이번 편지만은 그 느낌이 남달랐다. 피식 웃으며 동봉된 누드사진들과 함께 버리던 그것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케네디 주니어는 알았다. 그는 웃을 수가 없었다.
부러울 것이라곤 없어 보이는 그의 삶이 이 편지로 상당부분 흔들리고 있었다. 마음이 산란해진 케네디는 자신의 가장 가까운 친구에게 이 편지를 보여 주었다. 놀란 친구가 “사실이냐”고 물었고 이에 케네디 주니어는 “그럴 수도 있다”고 마지못해 대답했다.
친구는 상대편이 계속 밀어붙이면 DNA 테스트 받으면 문제가 가라앉을 것이라고 위로했지만 케네디 주니어의 얼굴은 풀리지 않았다. 그는 “성관계를 가질 당시 그녀는 피임약을 먹어 괜찮다고 말했다”면서 친구에게 “이탈리아로 직접 가서 진짜 임신인지 확인해 줄 수 있겠느냐”고 부탁했다.
‘사고’의 싹은 1998년 가을 뉴욕에서 이탈리아로 가는 비행기 일등석 안에서 트기 시작했다. 케네디 주니어는 객실에서 아름다운 모습의 한 여성승객을 보았다. 상대 역시 그에게 호감을 보여 그들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헤어질 때 케네디 주니어의 손에는 그녀의 전화번호가 있었다. 그 다음날 밤 케네디 주니어는 밀라노에 있는 그녀의 아파트에 갔고 성관계를 가졌다.
케네디 주니어의 친구는 간곡한 친구의 부탁을 이기지 못해 이탈리아 밀라노에 가서 문제의 여자를 직접 만났다. 그 여자는 이탈리아에서도 알아주는 일류 디자이너였다.
“당시 그녀는 4~5개월 정도의 임신상태여서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정말 아름다웠고 세련된 여자였다. 20대 중반의 그녀는 키가 크고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을 갖고 있었다. 케네디 주니어의 아내 캐롤린과는 달리 이 여자는 몸매의 볼륨이 아주 좋았다. 그녀는 케네디의 옛 여자친구였던 모델 줄리 베이커를 빼다 닮았다.”
친구가 확인한 문제의 이탈리아 여자는 “관계를 유지하는 것 이외에 그에게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녀는 경제적인 도움이 필요없는 부유한 집안의 딸이었다.
이탈리아에 다녀온 친구의 말을 전해들었지만 케네디 주니어는 그래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그는 친구에게 그녀를 굉장히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아내 캐롤린과 이혼을 하고 결혼은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이때 친구는 더욱 놀라운 사실을 듣게 된다.
“두 사람은 밀라노에서만 만난 것이 아니었다. 비행기에서 처음 만난 지 한 달 후 케네디 주니어는 이탈리아 여자를 뉴욕으로 데려와 플라자호텔에 머물게 하면서 만났다고 했다. 그때 나는 정말 놀랐다. 명석한 그가 어떻게 그렇게 멍청한 짓을 할 수 있는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후 친구는 이탈리아 여자에게 전화를 했다. “케네디 주니어를 만날 동안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진 적은 없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이며 “나에게 그런 걸 물어 보지 말라. 나는 그냥 그 사람이 아이의 아버지라는 걸 알아줬으면 했던 것뿐이다. 나중에라도 내 아이가 자신의 아빠가 누군지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내 생각을 그에게 꼭 전해 달라”고 말한 후 전화를 끊었다. 케네디 주니어의 친구는 그녀를 신뢰했다.
“나는 그녀를 믿었다. 그녀는 특별히 바라는 것이 없었다. 돈도 거절했다. 나는 그녀에게 ‘케네디 가문이 당신에게 무엇이라도 해줄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가 원한 것은 케네디 주니어가 그 아이를 자식으로 알아주는 것뿐이었다.”
이탈리아 여자는 자기 몸 속의 아이가 아들이라는 사실도 밝혔다. 이 소식을 친구로부터 전해들은 케네디 주니어의 반응은 좀 묘한 것이었다.
“그의 첫 반응은 ‘아들이구나. 그녀가 남자아이를 임신하고 있구나’였다. 그러나 그는 이후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 그는 아이들을 갖고 싶어했지만 아내인 캐롤린이 임신을 못하는 것에 대해 초조해 했었다.”
케네디 주니어와 캐롤린은 두 번의 임신 소동을 겪었다. 그러나 두 번 모두 임신이 아닌 것으로 결론이 났고 이 사건을 통해 두 사람 사이도 점점 멀어졌다. 캐롤린이 옛 남자친구인 마이클 버진을 만나면서 두 사람은 각방을 쓰기 시작했다. 케네디 주니어는 섹스를 하고 싶어했고 그 상대가 될 여자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는 야심만만하게 준비한 잡지 <조지(George)>를 위해 세계를 돌아다닐 때 비행기 안에서 여자들을 유혹하기 시작했다. 그의 생각에는 비행기 일등석에 탈 정도로 돈이 많거나 지위가 높은 여자들은 자신과의 관계를 세상에 알리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물론 이탈리아 여자도 그렇게 해서 만난 것이었다.
“죽기 전 몇 달 동안 그는 정말 괴로워했다. 아내 캐롤린은 마약에 취해 있었고 결혼생활은 거의 끝이 난 것이나 다름 없었다. 38세의 케네디는 결국 그의 삼촌인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에게 자신의 가정문제에 대해 털어놓기로 결정했다. 그는 캐롤린과의 이혼을, 그의 사촌인 로리의 결혼 후 공식화하기로 결정을 보았지만 곧 태어날 자신의 숨겨 놓은 아들에 대해선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이때 그는 이탈리아 여자와 그 여자의 아이에 대해서 걱정을 했다. 그는 두 모자에게 올바른 처신을 하고 싶어했지만 그게 무엇인지 몰랐고 결국 아버지임도 밝히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사촌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아내 캐롤린, 처제 로렌과 함께 경비행기로 가던 중 포도원에 추락함으로써 ‘케네디가의 저주’를 재연했다.
“케네디 주니어는 7월에 죽었고 그 다음달 그녀는 아들을 낳았다. 비극적인 케네디가의 사생아가 태어났지만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
케네디 주니어의 친구는 DNA 테스트를 두고 고민을 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케네디 주니어가 워낙 황급하게 죽고 화장을 해 버리는 바람에 그의 누이 캐롤라인에게 샘플을 채취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는 고민을 하다가 캐롤라인이 나설 것 같지 않아 얘기도 꺼내지 않았다.
밀라노에 있는 이탈리아 여자도 케네디 주니어가 죽은 후 태도를 바꾸었다. 자신의 아들에게 태어나자마자 그런 일을 하게 하고 싶지 않다고 밝혔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하고 싶지 않다고 털어놨다. 자기 아들이 케네디가의 혈손임을 누구보다 인정받고 싶어하던 그녀는 오히려 그 자식이 ‘케네디가의 저주’에 포함될까 봐 두려워했던 것이다.
소식통에 따르면 그녀는 자신의 친구들에게 “내 아들이 존 F. 케네디 주니어의 외아들이고 상속자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사람들이 내 아들에게 너의 아버지나 할아버지처럼 되라고 스트레스를 주는 걸 원치는 않는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녀는 또 “나는 DNA 테스트를 원하지 않는다. 내 아들이 나와 자기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내 스스로 사실을 말해줄 것”이라고 밝히면서 “그때까지 내 아이를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곳에서 키울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케네디 주니어의 친구 역시 이탈리아 여자와 입장이 비슷하다. DNA 테스트는 아이가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알기를 원할 때 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는 또한 이탈리아의 여자가 자신의 아들을 사람들의 눈을 피해 잘 키운 후 케네디 가문에 들여보내길 바라고 있다.
이 친구는 “지금 이탈리아의 모처에 케네디 대통령의 직계 후손인 남자아이가 자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케네디가를 아끼는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말했다.
문암 해외정보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