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주간겐다이>가 독점 공개한 김정철 유학 시절 모습. 오른쪽은 그가 좋아했다는 장 클로드 반담의 <유니버셜 솔저2> 스틸. | ||
김정철 25세. 일본의 대중지 <주간겐다이>는 최근호에서 지금까지 사생활이 거의 알려진 바 없는 김정철에 대한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를 소개했다. 이 잡지는 김정철이 다녔던 것으로 알려진 스위스 학교의 전직 교사들과 동창생들을 인터뷰하고, 김정철이 학교에서 썼다는 작문을 입수해 분석·보도했다. 영어에 능통하고 취미는 농구와 할리우드 영화 감상이라는 김정철의 본모습을 살펴보자.
스위스 ‘베른인터내셔널스쿨’에선…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63)에게는 배우인 성혜림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정남(34), 재일교포 출신의 댄서인 고영희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 정철(25)과 삼남 정운(22)이 있다. 그 중에서 지금 가장 유력한 후계자 후보인 김정철은 1980년 9월25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일본의 TV 저널리스트 집단인 ‘JIN·NET’의 취재를 통해 박철이라는 가명으로 1993년에서 1998년까지 스위스의 수도 베른에 있는 ‘베른 인터내셔널 스쿨’에 유학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학교관계자나 동급생의 증언을 바탕으로 김정철의 본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당시 학교의 교장은 “이 학교는 한 학년의 학생이 10~15명 정도로 학생의 대부분은 외교관이나 그 관계자들의 자녀다. 박철은 스위스의 북한대사관 운전기사의 아들이라는 신분으로, 문관철이라는 소년과 함께 입학했다. 박철은 유머 감각이 뛰어난 섬세한 소년으로, 영어와 수학, 스포츠를 잘했다. 스포츠 중에서는 특히 농구와 스키, 격투기를 좋아했다. 크리스마스 연극에서는 여행자 역을 맡아 쑥스럽다는 듯이 영어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난다”고 설명했다.
1995년에서 1997년까지 김정철에게 영어를 가르쳤다는 전 영어교사는 다음과 같이 전했다.
“그는 상당히 수줍음이 많고 상상력이 풍부한 소년이었다. 할리우드 액션 영화를 좋아해 자주 격투기 연습을 하곤 했다. 문관철과 언제나 함께 있었으며 다른 사람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친구들과 외출하는 일도 적었다.”
이 영어교사는 김정철이 15세 때부터 3년 동안 썼다는 세 편의 영시와 한 편의 영어 작문을 보여줬다. 이는 김정철의 성격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김정철이 1995년 15세 때 지은 ‘과거에 대한 생각’이라는 영시를 살펴보자.
‘구름이 낀 날이었다. 비가 내렸다. 똑똑. / 지독한 기름 냄새가 흘러들었다. 아주 먼 곳에서. / 한 소년이 서 있었다. 어떻게 할지 모른 채. / 슬픈 표정으로 엄지 손가락을 빨고 있었다. / 그러다가 구름에서 태양이 나타나면서 지독한 기름 냄새가 사라졌다.
▲ 김정일. | ||
모든 것이 달라졌다. 소년은 점점 성장하여 훌륭해졌다. 그렇다, 모든 면에서 우수한 학생이 된 것이다. 스포츠는 물론 성적도 뛰어나고 강철 같은 근육과 사자 같은 가슴을 지녀 매우 용감했다. 모두가 그를 알고 있었고, 매우 유명해졌다. 그는 조선인이었다.’
이 시는 “어린 시절에 느꼈던 일을 떠올리며 써보라”는 지시에 따라 쓴 것이라고 한다. 영어교사는 “이 시를 썼을 때 박철은 기쁨과 자신감에 차있었다. 시 말미에 ‘매우 유명해졌다. 그는 조선인이었다’는 말로 봐서 언젠가 할리우드 영화의 영웅처럼 유명해지겠다는 마음을 시에 담은 것 같다”고 말한다.
김정철의 시에 대한 정신분석
김정철의 시에 대해 정신과 의사인 와다 히데키는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김정철은 북한의 로열패밀리로 태어났지만 시에서 ‘지독한 기름 냄새’라는 표현을 쓴 것으로 볼 때 아버지인 김정일에게 엄격한 가르침을 받았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그래도 북한에서 보낸 유년기는 김정철에게 행복한 시절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갑자기 상황이 변해 ‘학교 가방을 짊어져야 했다’고 표현했다. 즉 스위스 유학을 가게 되는데 본인은 상당히 가기 싫었던 듯하다. 시의 마지막에 나오는 ‘강철 같은 근육과 사자 같은 가슴을 지녀 매우 용감했다’는 부분은 그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나의 이상적인 세계’라는 제목의 시에서 김정철은 “테러리스트들을 할리우드 스타인 장 클로드 반담과 함께 무찌르겠다”고 쓰고 있다. 지금 미국과 북한의 관계를 생각하면, 북한의 ‘황태자’가 썼다고 믿기 힘든 표현이다. 와다는 “이 시에서는 김정철이 국가지도자의 아들의 삶을 받아들이고 이복형제인 김정남의 라이벌이라는 복잡한 가정환경을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장 클로드 반담과 같은 강자가 됨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지키고자 하는 결의를 느낄 수 있다. 또한 ‘조선말을 세계의 공용어로’라고 쓴 부분은 멀리 타국에서 혼자 유학하며 북한사람으로서 자부심을 갖게 됐다는 증거”라고 분석했다.
김정철은 장 클로드 반담에 상당히 열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1994년부터 1998년까지 그와 동급생이었던 미국인 가이는 “그의 집에 놀러간 적이 있는데 호화로운 아파트의 2층에 살고 있었다. 방 안에는 반담이 출연한 비디오가 열 편 가까이 있었다. 그는 자랑스럽게 비디오를 보여주며 쿵푸 포즈를 흉내내기도 했다”고 이야기한다.
1996년부터 1997년까지 동급생이었던 미국인 제이슨 또한 “그는 당시 반담이 주연한 <유니버셜 솔저>에 흠뻑 빠져 격투 장면을 흉내내곤 했다. 반담과 같은 몸매를 갖기 위해 열심히 훈련한 덕에 근육질 몸매를 만들었다”고 증언했다.
북한에서 김정일의 요리사로 13년간 지낸 후지모토 겐지도 “정철은 반담과 같은 근육질 몸매를 만들기 위한 것이라며 미국에서 들여온 근육 증강제를 마시곤 했다”며 위의 사실을 뒷받침했다.
김정철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김정철이 1998년에 한 여학생을 도와준 일화도 있다. 도움을 받았다는 여학생은 “평소의 그는 조용한 편이었다. 그러나 내가 계단에서 넘어져 발목이 골절됐을 때 그가 가장 먼저 달려와 나를 업고 아래까지 데려다 줬다. 근육질 몸매에 남자다웠고 마음씨는 다정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김정철은 반담과 같은 강자를 동경한 것과 같은 시기에 ‘아버지는 유령이었다’는 기묘한 제목의 글을 쓰고 있다.
앞서 나온 영어교사는 “이때는 에드가 앨런 포의 소설을 예로 들어, 괴담 특유의 공포감이 드는 문장표현을 가르쳤다. 그리고 배운 것을 응용해 학생들에게 단편을 쓰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와다는 이 글에서 김정철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오이디푸스 왕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후 죄책감에 시달려 스스로의 눈을 멀게 하고 방랑자가 됐다. 프로이드는 ‘(아버지에게 경외심을 갖게 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유년기(5~6세)에 보편적으로 갖는 감정’이라고 분석했다. 어렸을 때 어머니의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자란 남자아이는 아버지를 쫓아내고 어머니와 함께 살고 싶다는 소망을 갖게 된다.
▲ 김정철의 진면목을 보도한 <주간겐다이> 지면. | ||
김정철은 그로부터 2년 후인 17세 때 ‘친구’라는 제목의 시를 쓴다. 와다는 이에 대해서 “이 시에서는 정철의 정신적인 성장을 읽을 수 있다. 즉 처음 유학을 올 때는 아버지에 대한 무서움으로 떨고 있었지만, 부모 곁을 떠나 스위스에서 생활하면서 자신감을 갖게 된 것 같다. ‘우정은 돈이나 권력보다 가치 있다’고 단정 지은 부분을 보면 알 수 있다.
황태자의 귀환과 후계구도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1998년까지 학교관계자들은 교사와 학생을 포함해서 어느 누구도 김정철이 북한의 ‘황태자’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점이다.
앞서 나온 동급생 제이슨은 “1998년에 스위스 신문과 <뉴스위크>를 보고 처음으로 박철의 정체를 알게 됐다. 그 후에 생각해보니 그는 일체 가족 이야기도 하지 않았고, 매일 장갑차 같은 차로 등하교했으며, 보디가드 문관철이 항상 붙어 있었고, 제대로 포장된 음식이 아니면 입에 대지 않았다”고 회상한다.
김정철은 1998년 가을에 학교를 떠났다. 전 교장은 “박철과 문관철은 1998년 여름에 학교를 안 나오다가 9월에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다시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됐다”고 설명했다.
김정철이 갑자기 귀국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귀국 후에는 어떻게 지낸 것일까. 한국의 국정원 관계자는 “1994년 7월 김일성이 사망한 후부터 1998년 여름까지 북한에서는 2백만~3백만 명의 사람들이 굶어죽었다. 그러나 1998년 8월에 대포동 미사일 발사 실험이 성공하고 가을에는 신 헌법을 제정한 데 이어 식량생산도 회복돼 김정일은 권력계승의 기반을 다지게 된다. 그리고 2000년 5월에 중국을 방문해 김정일 외교가 시작되는데, 그 전에 ‘후계자’인 김정철을 귀국시켜 본래 있어야 할 위치로 돌려보낸 것이다.
2000년 고영희의 여동생인 고영숙과 남편이 미국으로 극비 망명하여 북한 로열패밀리의 실상을 자세하게 증언했다. 이 증언에 따르면 귀국 후 김정철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중앙기관 지도과 책임부원이라는 직책을 맡게 됐다. 조직지도부는 말하자면 북한의 심장부에 해당하는 부서로, 이 직책은 김정일이 1964년에 김일성 종합대학을 졸업하고 맡은 자리”라고 설명한다.
그 후로 김정철은 착실하게 후계자의 길을 밟아온 듯하다. 2002년부터는 조직지도부 안에서 ‘김정철 동지의 사업체계를 확립하자’는 슬로건도 사용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2003년 9월에 ‘백세봉’이라는 낯선 인물이 북한 최고기관인 국방위원회의 멤버가 된다. 한국 정부는 이 인물이 김정철일 것이라고 보고 있다.
김정철이 북한의 후계자가 되는 것에 대해 앞서 나온 두 동급생은 대환영이라고 한다.
“그는 수줍음을 많이 타고 예의 바르며,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들고 있을 때도 조용히 있는 타입이다. 그런 그가 사람들을 지휘하는 모습은 상상이 안 가지만, 스위스에서 세계정세에 대한 견문을 넓혔기 때문에 반드시 북한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 거라고 생각한다.”(제이슨)
“그는 ‘가슴깊이 모국을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가 북한의 지도자가 된다면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가이)
박영경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