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하는 지난 4월 30일 승부조작 브로커를 자청한 한 남자에게 전화를 받았다. 그 남자는 “선발 등판 하는 날 경기 첫 타자에게 볼넷을 허용하면 대가를 지불하겠다”는 제안을 했다. 이영하는 곧바로 “다시는 전화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거절한 뒤 전화를 끊었다. 전화번호도 차단했다. 하지만 이틀 뒤인 5월 2일 그 브로커가 다른 번호로 다시 전화를 해왔다. 이영하는 다시 “신고하겠다”고 화를 냈고, 실제로 다음 날 소속팀 두산에 이 내용을 알렸다. 두산 역시 곧바로 KBO에 이영하가 승부조작 제의를 받았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그동안 여러 차례 야구계를 멍들게 했던 승부조작의 새로운 불씨는 그렇게 진화됐다.
2018 프로야구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 두산의 이영하 선수가 클린베이스볼상을 수상하고 있다. 박정훈 기자
승부조작 제의를 받은 뒤 즉각 구단이나 KBO에 신고하는 것은 프로야구 규약에 명시된 선수의 의무다. 그동안 그 ‘당연한’ 일을 하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승부조작에 가담했다가 물의를 일으킨 선수가 적지 않았다. 이영하의 자진신고는 선수들의 달라진 인식을 보여주는 상징적 행동이다.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선수협)가 곧바로 성명을 내고 “이영하의 용기 있는 행동과 두산의 적절하고 단호한 조치는 승부조작을 원천 차단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라고 반겼을 정도다.
두 통의 전화에 단호하게 대처한 덕분에 이영하는 데뷔 후 가장 많은 주목을 받았다. 일단 KBO는 상벌위원회를 열고 규약 제152조 ‘유해행위의 신고 및 처리’ 조항에 따라 이영하에게 포상금 5000만 원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KBO 관계자는 “최대한 의미 있는 포상 액수를 고심하다 2018년 연봉 4200만 원보다 많은 금액을 포상금으로 정했다”고 했다. 이영하는 망설임 없이 “이 포상금을 모교와 불우이웃을 돕는 데 쓰겠다”고 선언해 더욱더 박수를 받았다.
이뿐 아니다. 선수협이 뽑은 2018 플레이어스 초이스 어워드에서 대상 격인 올해의 선수상 수상자는 다승왕도, 구원왕도, 홈런왕도, 타점왕도 아닌 이영하였다. 선수협은 “리그 성적뿐 아니라 그라운드 안팎의 품행과 다른 선수들에게 모범이 되는 프로 선수다운 모습, 선행 등을 고려해 선수들이 직접 뽑았다”고 설명했다. 연이은 사건·사고로 KBO 리그 선수들의 이미지가 바닥까지 추락한 상황에서 이영하의 행동이 가뭄에 단비를 내렸다는 점에 의미를 부여했다. 이영하는 “혹시나 내가 신고를 했다는 이유로 브로커가 복수를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 후 아무런 협박이나 보복도 없었고 평소대로 야구장에 다녔다”며 “내가 엄청난 일을 한 게 아니라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자꾸 칭찬을 받아 민망하다. 다음에는 좋은 성적으로 상을 받고 싶다”고 했다.
# ‘영구실격’ 문우람이 폭로한 선배의 폭행사건
물론 한 시즌 동안 이렇게 좋은 소식만 있었던 건 아니다. 그라운드 밖에서 모범을 보인 선수가 더 박수를 받는 이유는 반대로 그라운드 밖에서 벌인 실수 탓에 야구에도 악영향을 받는 선수들이 많이 나와서다. 승부조작에 연루된 전 NC 투수 이태양과 전 히어로즈 외야수 문우람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가 과거 벌어진 팀 내 폭력사건을 폭로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태양은 2015년 고의 볼넷을 통한 승부 조작에 가담한 혐의로 유죄판결이 확정돼 KBO로부터 영구 실격 처분을 받았다. 당시 군인이던 문우람은 평소 친분이 깊던 브로커 조 아무개 씨와 함께 친구 이태양에게 승부 조작을 제의하고 조 씨에게 대가성 금품을 받아 이태양에게 전달한 혐의로 군사법원에서 벌금형을 받았다. KBO는 문우람에게도 전역 이후 영구 실격 처분을 내렸다.
승부조작 혐의로 한국야구위원회(KBO)로부터 영구실격 처분을 받은 이태양(왼쪽)과 문우람의 기자회견. 연합뉴스
하지만 문우람은 지난 12월 10일 결백을 주장하는 기자회견을 자청한 뒤 그 과정에서 ‘선배 A’에게 폭행당했던 과거와 진단서를 끄집어냈다. 해당 선배의 실명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당시 팀 선배에게 야구 배트로 폭행을 당했다. 머리를 7차례나 맞아 뇌진탕 증세가 오고 얼굴이 부어올라 게임에도 못 나가고 집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며 “그 일로 스트레스를 받고 힘들어 하던 나를 따뜻하게 위로해준 브로커와 가까워지게 됐다”고 설명했다. 브로커 조 씨에게 받은 고가의 시계 역시 승부조작 가담 대가가 아니라 그저 “친한 형의 마음을 담은 선물”이라고 여겼다는 얘기다.
동시에 기자회견의 포커스는 문우람의 ‘억울함’보다 팀 내 폭력사건의 진상 쪽으로 맞춰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히어로즈 외야수 이택근은 12월 19일 야구회관에서 열린 KBO 상벌위원회에 직접 출석하면서 그 ‘선배 A’가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이택근은 규약 제151조 ‘품위손상행위’와 제152조 ‘유해행위의 신고 및 처리’ 조항에 따라 정규시즌 36경기 출장 정지 제재를 받았다.
이택근은 상벌위원회 소명을 마친 뒤 직접 기자들 앞에서 당시의 배경을 밝히고 사과의 뜻을 전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어떠한 경우에도 폭력은 정당화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다”며 “3년이 훨씬 지난 일이지만,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이어 “문우람은 어렵게 운동했던 선수라 내가 아끼고 많이 챙겼다”는 것을 전제로 “사건 전날 내가 문우람의 두발을 비롯한 외모 상태를 지적하면서 정리하고 오라고 당부했는데, 다음 날 문우람이 아무렇지 않게 그대로 야구장에 왔다. 그 모습을 보고 방망이 뒷부분으로 머리를 몇 대 친 것은 사실”이라고 상황을 설명했다.
넥센 히어로즈 이택근이 문우람 폭행 관련 상벌위원회 참석한 뒤 기자회견에서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폭력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이택근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정말 잘못했고,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든다. 다만 너무 심하게 폭행을 했다거나 악감정으로 한 행동이라는 건 사실과 다르다”며 “어떻게 때렸든 때린 사람의 잘못이다. 야구선수가 배트를 들었다는 것 자체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고개를 숙였다.
이택근은 이어 “폭행 이후 꾸준히 문우람과 관계를 회복하려 노력했고, 문우람 아버지께도 사과를 드렸다”며 “문우람이 상무에 입대한 후 안부 전화를 걸어와 통화를 한 적도 있다”고 했다. 넥센 구단 역시 “사건 이후 이택근과 문우람이 서로 대화를 통해 감정을 풀었다. 이택근이 팀의 주장으로서 선수단 관리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점도 고려해 외부에 알리지 않고 내부의 일로 처리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정작 문우람은 이택근의 공개 사과와 해명으로는 만족을 못한 듯하다. 사실관계를 바로잡기 위해 이택근을 형사 고소하겠다는 뜻을 굳힌 것으로 알려졌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바로 이 기자회견에서 문우람과 이태양의 말실수로 또 다른 소동이 벌어졌다는 점이다. 이태양이 현역 선수 여섯 명의 실명을 언급하면서 “브로커가 ‘이런 선수들도 다 한다’고 하던데, 왜 이들은 조사하지 않냐”고 항변한 것이다. 2018시즌 구원왕인 한화 정우람의 이름까지 포함된 리스트였다. 기자회견 후 KBO가 실명이 언급된 선수 전원을 대상으로 각 구단에 사실관계를 확인하기 위한 조사를 요청했을 정도다.
이들에 의해 이름이 거론된 선수들은 즉각 펄쩍 뛰었다. 정우람은 결국 자신의 이름을 직접 내뱉은 이태양을 허위 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서울중앙지검에 고소장을 제출한 뒤 “필요한 절차에 따라 조사에 성실하게 임하겠다. 내 결백을 밝혀 명예를 회복하겠다”고 했다.
뒤이어 SK 김택형도 나섰다. SK는 김택형의 이름이 거론된 직후 “그 진술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질 경우 선수 생명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문제를 일으킨 두 사람에게 그 책임을 묻기 위한 법적 조치를 검토할 방침”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진 SK 구단 자체조사와 KBO 조사에서도 김택형은 승부조작과 아무런 연관성이 없음을 확인됐다. 김택형은 결국 “두 사람의 진심 어린 사과를 요구한다. 만약 진정성 있는 사과가 없을 경우 당초 방침대로 두 사람에 대한 법적 조치를 검토하겠다”는 뜻을 전하기도 했다. 결국 그 기자회견은 문우람와 이태양의 억울함을 밝히기는커녕 전혀 다른 방향으로 파장을 일으키고 당사자들의 퇴로마저 막아버린 자리가 되고 말았다.
# 여전한 음주운전과의 전쟁
음주운전과의 전쟁도 여전하다. 이제는 과거의 일도 모두 공개돼 도마 위에 오르는 시대다. KT 강민국이 대표적이다. 2013년 7월 신인 드래프트에서 NC에 지명된 강민국은 정식 입단 전인 2014년 1월 초 훈련 참가 기간에 진해에서 음주운전을 하다 적발돼 면허 취소와 벌금 처분을 받았다. 강민국은 이 사실을 NC에 알렸지만, NC는 KBO에 보고하지 않았다. 대신 강민국에게 자체 벌금 500만 원을 부과하고 해외 전지훈련 명단에서 제외하는 내부 징계를 내렸다. 이후 강민국은 NC와 상무야구단에서 정상적으로 경기에 출전했다.
하지만 강민국이 트레이드를 통해 KT로 이적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NC가 KT에 강민국의 음주운전 적발 이력을 전달하기는 했지만, KBO 미신고 사실은 밝히지 않았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뒤늦게 상벌위원회가 열렸고, 강민국은 트레이드되자마자 2019시즌 30경기 출장 정지 처분을 받게 됐다. 또 강민국의 음주운전 경력을 신고하지 않은 채 KT로 트레이드한 NC 역시 벌금 1000만 원 제재를 받았다.
이 사태는 또 다른 선수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히어로즈 내야수 임지열이 과거 음주운전 적발 이력을 KBO에 자진 신고한 것이다. NC 사례를 본 넥센이 선수단 전체에 “음주운전을 비롯한 각종 사건·사고로 물의를 빚고도 공개되지 않은 건에 대해 구단에 자진신고 해달라”고 요청했고, 그 결과 임지열이 2년여 전 음주운전으로 면허정지 처분을 받았던 사실을 구단에 알렸다. 술을 곁들인 식사를 하다 차량을 이동해 달라는 전화를 받고 사설 주차장으로 이동하기 위해 도로로 나섰고, 바로 그때 음주운전 단속에 적발됐다는 내용을 털어놓았다.
임지열은 2018시즌 경찰 야구단 소속으로 퓨처스 북부리그 타격왕과 타점왕에 오른 유망주다. 2019 시즌 히어로즈 복귀를 앞두고 있다. 오래 기다렸던 시간을 앞두고 과거 잘못에 발목을 잡혔다. 그는 구단에 “당시 음주운전에 대한 경각심이 부족했다. 이미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그 문제로 계속 마음이 불안했고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KBO는 임지열에게 30경기 출장 정지 징계 처분을 내렸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오현택 5km 추격해 뺑소니범 잡아’ 2018년 선수들 미담 롯데 베테랑 투수 오현택은 ‘검거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지난 8월 25일 새벽 부산 해운대구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는 20대 여성을 치고 달아나는 차량을 경찰에 신고한 뒤 5㎞가량 추격해 무면허·음주·뺑소니 운전자를 검거하는 데 공을 세운 덕이다. 이후 구단 자체 표창을 비롯해 부산 해운대경찰서 표창, TS 교통안전 의인상, 선진교통안전대상 의인상, 올해의 시민영웅, KBO 클린베이스볼상을 차례로 수상했다. 올해 KBO 리그를 훈훈하게 달군 스토리다. 프로에서 잔뼈가 굵은 선배들만 미담을 남길 수 있는 건 아니다. 12월에는 아직 프로에 정식 입단도 하지 않은 ‘예비 프로야구 선수’ 두 명이 차례로 감동적인 소식을 전했다. 한화 신인 투수 정이황과 히어로즈 신인 투수 박주성이다. 프로 마운드에서 첫 공을 던지기 전부터 아름다운 사연으로 팬들의 눈도장과 박수를 받았다. 정이황. 사진 제공 = 한화 이글스 정이황은 한 여성의 목숨을 구했다. 개인 운동을 마친 뒤 집과 가까운 부산 해운대 근처에서 바람을 쐬며 걸어가다 방파제 아래에서 누군가의 비명소리를 들었다. 방파제 밑에 빠져 구조를 요청하는 목소리였다. 상황을 인지한 정이황은 즉시 구조 당국에 신고한 뒤 소방대원들에게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기 위해 자리를 뜨지 않고 기다렸다. 이어 방파제 밑에 떨어진 여성과 계속해서 대화를 시도하면서 여성을 안심시켰다. 그 사이 해운대경찰서, 해운대소방서 대원들이 현장에 도착해 여성을 구조했다. 정이황의 빠른 신고와 후속 조치 덕에 피해 여성은 큰 피해를 입지 않고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구단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언론 보도를 통해 알게 됐다는 후문이다. 박주성은 한 어린이에게 꿈을 심었다. 어린 시절 생일파티에서 미역국을 쏟아 얼굴과 어깨에 2도 화상을 입었던 그는 당시 화상전문 병원이던 한림대학교 한강성심병원에 매일 통원하면서 열심히 치료를 받았다. 처음에는 얼굴에 자리 잡은 상처에 콤플렉스를 느끼기도 했지만, 병원에서 치료와 재활을 거듭하는 동안 마음속 아픔까지 극복해냈다. 그렇게 결국 프로 팀에 1차 지명으로 입단하는 첫 번째 꿈을 이뤘다. 그 후 박주성은 ‘첫 월급’이나 다름없는 프로 입단 계약금의 일부를 과거 자신이 도움을 받은 병원을 위해 쓰고 싶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그리고 병원에서 전신의 절반에 심한 3도 화상을 입은 12세 소년 리카 군을 만났다. 인도네시아 의료봉사를 떠났던 의료진이 현지에서 발견해 한국으로 데려온 소년이었다. 박주성은 흔쾌히 1000만 원을 화상아동 치료비 명목으로 기부했다. 축구선수가 꿈인 리카는 박주성이 기부한 돈으로 무사히 피부이식 수술을 받고 새로운 출발을 꿈꾸게 됐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