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결국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3대 부자세습의 길로 접어들었다.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의 셋째 아들 김정은(28)은 최근 인민군 대장 칭호를 받으면서 김정일의 후계자로 대내외에 그 존재를 드러냈다. 김정은을 앞세운 북한의 권력세습은 예상을 초월한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3대 세습을 사실상 공식화한 북한 김정일 일가의 가계도 및 비스토리를 정리했다.
김정일 일가의 가계도는 3대로 나눠서 정리해볼 수 있다. 1대 김일성은 부인 김정숙과의 사이에서 김정일과 김경희 노동당 경공업부장을 뒀다. 1917년 함북 회령 출신인 김정숙은 어렸을 때 부친을 찾으러 어머니와 함께 만주로 들어갔다가 모친 사망 후 고아가 됐고, 1935년 16세 때 빨치산부대에 입대해 밥 짓는 일을 맡았다. 1940년 김일성과 결혼한 김 씨는 1942년 유라(김정일)와 슈라(4세 때 익사)를 낳고 4년 뒤 김경희를 낳았으나 1949년 네 번째 아이를 출산하던 중 사망했다.
노동당 경공업부장인 김경희는 9월 27일 여성으로는 최초로 ‘대장’ 칭호를 부여받으며 권력의 핵으로 급부상했다. 그녀는 1994년 김일성 주석의 장례식·추모행사에 참석하고 2000년 노동당 창당 55주년 열병식, 2001∼2003년 최고인민회의에 참석해 찍은 기념사진이 공개된 것 외에는 외부에 노출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뒤에서 김정일을 수행해왔다. 김정일의 여성편력에 대한 소문을 차단하고 매번 ‘뒤처리’를 담당했다. 김정일이 고영희에게 빠지자 성혜림을 모스크바에 보낸 사람도 김경희였다.
김경희는 남편 장성택과의 불화와 딸의 자살 등으로 80년대부터 알코올 중독에 빠졌으며 우울증 치료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김정은이 후계자로 내정되면서 언론에 등장했는데 이는 ‘김정은 후계 체제’ 구축과 관련이 있을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김경희 부부는 원래 장남인 정남을 지지했던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또 정남을 지지하는 김경희를 김정일이 다독이기 위해 수행을 요청했다는 분석도 있었다. 김경희는 술에 취하면 오빠인 김정일에게 뽀뽀를 할 만큼 친밀한 관계로 전해진다.
김경희는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에 재학 중 동기인 엘리트 장성택에게 빠져 결혼했다. 군부 출신의 사위를 바랐던 김일성은 장성택을 원산경제대학으로 전학시켰지만 김경희는 주말마다 직접 차를 몰고 원산까지 내려가 장성택의 밀린 빨래까지 해주는 열정을 보였고, 결국 사랑을 쟁취했다.
김경희의 딸 금송은 2006년 파리 유학 중 자신의 빌라에서 사망했다. 결혼을 약속한 북한 남성을 집안에서 반대하자 비관해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경희의 남편은 조선노동당 행정부장 겸 국방위원인 장성택으로 지난 6월 국방위 부위원장으로 승진했다. 장성택은 1972년 당 조직지도부 과장을 거쳐 1995년 11월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며 실세로 자리잡았다. 2003년 10월 직권남용 등의 이유로 좌천됐지만 2005년 말 다시 노동당 근로단체 및 수도건설부 제1부부장으로 임명되고 2008년 9월 당 조직 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복귀하면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2008년 김정일 와병설 이후 당 조직지도부와 선전선동부를 중심으로 후계구도 구축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원래 김경희와 함께 김정남을 지지했던 장성택은 최근 정은을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김정일의 권력대행자이자 김정은의 후견세력으로 평가되고 있다.
김일성은 후처인 김성애와의 사이에서도 2남(평일, 영일) 1녀(경진)를 뒀는데 김정일은 이들을 ‘곁가지’로 표현하며 견제했다. 김일성의 비서실에 근무하던 김성애는 자녀 셋을 낳은 뒤인 1963년 김일성과 뒤늦게 결혼식을 올렸다. 김성애는 1965년 조선민주여성동맹 부위원장을 거쳐 1971년 위원장이 됐다. 1972년에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뽑히는 등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자신의 아들인 평일을 후계자로 내세우기 위해 김정일과 치열한 세력다툼을 벌였으나 김정일이 정권을 잡기 시작하면서 정치무대에서 사라졌다.
후계자 자리를 놓고 김정일과 경쟁했던 이복동생 김평일 폴란드 주재 북한 대사는 79년 유고 주재 부무관으로 외국 생활을 시작한 이래 북한 땅을 밟지 못하고 있으며 아내인 김순금과의 사이에 은송과 인강 남매를 뒀다. 또 다른 이복동생 김영일은 독일대사관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하다 2000년 지병으로 현지에서 사망했으며, 여동생 경진은 주오스트리아 대사 부인으로 역시 외국에서 살고 있다.
2대 김정일은 성혜림과의 사이에서 김정남을 낳았다. 1937년 경상남도 창녕에서 1남 3녀 중 차녀로 태어난 성혜림은 서울에서 풍문여중을 다니다 1948년 부친을 따라 월북했다. 평양예술학교를 마친 그녀는 월북작가 이기영의 장남 이평과 결혼, 딸을 낳았으나 1967년 이혼하고 김정일과 동거에 들어갔다. 김정일이 다섯 살이나 연상인데다가 유부녀였던 성혜림을 이혼시키 면서까지 애착을 보인 것을 두고 주변에서는 일찍 어머니를 여읜 탓으로 분석하기도 했다.
평양연극영화대학 졸업반 때 영화 <분계선 마을에서> 첫 주연을 맡아 문화예술인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상인 ‘인민상’을 받은 성혜림은 이후 출연한 영화 <백일홍> <인민교원>이 성공하면서 북한 주민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성혜림은 김정일과 동거 1년 만에 김정남을 낳았으나 신병 치료 등을 이유로 모스크바로 떠났고, 정남은 성 씨의 어머니인 김원주와 언니 성혜랑의 손에서 자랐다. 성혜림은 김일성에게 인정받지 못했으며 1974년 김정일이 김영숙과 결혼한 뒤 러시아로 추방됐다는 얘기가 있다. 1980년대부터 모스크바에 체류하던 성 씨는 언니인 혜랑이 1996년 모스크바를 탈출해 서방으로 망명할 때 스위스까지 따라갔으나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갔고, 2002년 5월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장남 김정남은 한때 김정일의 후계자로 주목받았던 인물이었다. 당 호위총국의 요직을 거쳤을 뿐 아니라 사람을 두루 아우르는 카리스마와 호방한 성격, 풍부한 해외유학 경험으로 국제정세에 밝으며 북한의 경제난을 해결할 수 있는 인물로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후계구도 1순위’였던 김정남은 1990년대 후반 고위층 자녀들에게 “내가 후계자가 되면 개혁·개방을 하겠다”고 발언해 물의를 빚으면서 김정일의 눈밖에 나기 시작했다. 여기에 이모인 성혜랑이 미국으로 망명하고 김정남은 2001년 5월 도미니카 위조여권으로 일본에 입국하려다 추방당하는 등 연이은 악재가 터지면서 후계구도에서 멀어졌다.
김정일의 두 번째 여자는 김영숙이다. 노동당 중앙당 김정일 집무실 타자수 출신인 그녀는 공식석상에 얼굴을 드러낸 적은 없다. 1974년 김정일과 결혼한 김영숙은 설송, 춘송 등 3명의 딸을 둔 것으로 알려졌다. 그 중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한 설송은 서구적인 미인형으로 감수성과 예술적 감각이 풍부하고, 문학적 소양이 뛰어나 김정일의 총애를 받았다. 하지만 그녀가 결혼을 했는지, 남편이 누구인지 등 구체적인 신상 및 행보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현재는 김정일의 관심에서 멀어졌다는 얘기도 있다.
김정일의 세 번째 여자인 고영희는 두 아들(정철·정은)과 딸(여정)을 낳았다. 1953년 오사카에서 태어난 고영희는 1960년 가족과 함께 북송선을 타고 월북, 만수대예술단에서 무용가로 활동했다. 무용단원으로 활동하면서 김정일의 눈에 들어 1975년경부터 동거를 시작했다고 알려진다. 고 씨는 2004년 사망할 때까지 김정일과 함께 살았으며 그의 마음을 가장 오랫동안 사로잡은 여인이었다. 1998년부터 김정일의 현지시찰에 동행하는 등 퍼스트레이디 역할도 수행했는데 김정일이 정은을 후계자로 낙점한 데는 고영희에 대한 애정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1981년생으로 스위스 국제학교를 졸업하고 노동당 선전부 간부로 활동한 김정철은 2002년 이복 형인 김정남의 일본 입국사건 이후 한때 유력한 후계자로 거론된 바 있다. 김정철 후계설은 지난 2005년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그가 만찬에 참석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수면위로 부상했다. 김정철은 영국의 세계적인 가수이자 기타 연주가인 ‘에릭 클랩튼’의 열성 팬으로 알려졌는데 그의 공연을 보기 위해 독일에 갔다가 일본 언론에 의해 성장한 그의 모습이 전 세계에 공개되기도 했다. 170㎝ 정도의 키에 청바지에 가죽점퍼를 입고 젊은 여성과 함께 독일 거리를 활보하는 그의 모습은 김일성의 젊은 시절과 닮아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또 스위스 베른 국제학교 유학시절 미프로농구단 시카고 불스의 티셔츠를 입은 사진이 공개되기도 했다. 하지만 김정일은 예민하고 나약한 정철에 대해 ‘마음이 여리다’며 자주 불만을 표출했고 호르몬계 이상으로 후계자에서 탈락했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형들을 제치고 후계자로 낙점된 김정은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내에 ‘정운’으로 알려졌을 정도로 철저히 베일에 싸인 인물이었다. 신장 175㎝ 정도에 몸무게는 90㎏으로 추정되며 고혈압과 당뇨를 앓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983년생으로 얼굴과 체형, 성격 등 김정일을 빼닮아 어릴 적부터 ‘김정일의 분신’으로 불렸다. 90년대 형 정철, 여동생 여정과 함께 스위스 베른에서 유학한 뒤 평양으로 귀환, 2002년부터 2007년 4월까지는 김일성군사종합대학에 다녔다. 김정은은 다혈질 성격으로 리더십과 승부 근성이 남달랐는데 7세에 벤츠를 시운전하고 대놓고 술을 마실 정도로 대담한 성격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자신의 호칭에도 민감해 한때 김정일 측근들이 정철·정은 형제를 각각 ‘큰 대장 동지’와 ‘작은 대장 동지’로 불렀는데 10세 때 이모가 자신을 ‘작은 대장’으로 부르는 것을 듣고 “왜 내가 작은 대장이냐”고 따졌다는 일화도 있다.
1987년생인 김여정에 대해서는 알려진 정보가 거의 없다.
넷째 부인 김옥은 1964년생으로 고영희 사망 전에는 김정일의 서기실 과장 직함을 갖고 국정을 도왔다. 고 씨 사망 이후 사실상 퍼스트레이디로 국정을 보좌하면서 권력의 중심에 들어섰다. 작년 8월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김정일과 면담했을 때도 배석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2008년 김정일의 딸을 낳았지만 신상은 외부에 알려져 있지 않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