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씨에서부터 태도까지 일본 내지인과 조금도 다르지 않아”

안상호는 조선공론이 창간 초기 발행한 ‘일선동화’ 연재물에서 첫 번째로 소개된 인물이었다. 1913년 9월 발행된 ‘조선공론’ 제1권 제6호에는 ‘일선동화의 선구 조선인 남편·일본인 아내 평판기’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다. ‘일선동화’는 일본과 조선의 동화를 뜻하는 말로 1930년대 후반 본격적으로 내세워진 ‘내선일체’보다 앞서 1910년대부터 쓰인 표현이다.
르포 형식의 기사는 필자가 경성에 위치한 안상호의 진료소를 직접 찾아가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필자는 “시험 삼아 남대문 안쪽 어느 지점에서 3전을 내고 전차를 타보라”며 “동대문통(현 동대문 일대의 주요 도로)으로 향하다 보면 조선식 가옥 사이로 한층 높이 솟은 서양식 건물이 나타나는데 그곳에 ‘의학득업사 안상호’라는 간판이 걸려 있다”고 소개했다.
기사에는 당시 진료를 보던 안상호의 모습도 세세하게 묘사됐다. 조선공론은 문을 열고 들어가 진찰을 청하면, 마르고 작은 체구에 짧은 머리를 한 안상호가 나타난다고 했다. 이어 “붉은빛이 도는 얼굴에는 곰보 자국이 있어 풍채가 볼품 있지는 않다”면서도 “말씨에서부터 태도까지 일본 내지인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평가했다.
마르고 작은 체구에 짧은 머리, 붉은 얼굴, 곰보 자국이 얼룩덜룩해 풍채가 썩 나지 않는 한 의사가 깨끗한 흰옷을 입고 기쁘게 맞이하며 아주 스스럼없는 태도로 먼저 ‘몸 상태는 어떠십니까’라고 물을 것이다. (원문 번역)조선공론은 안상호의 경력을 소개하는 한편 그에 대해 후한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조선공론은 안상호를 일본 도쿄 자혜의원 의학교에서 공부한 뒤 귀국해 경성에 개업한 의사로 소개했다. 그러면서 “조선인에게서는 보기 드물 정도로 재기가 넘치며 대단히 근면한 사람”이라며 “환자가 몰려 진료소 앞이 시장처럼 붐볐다”고도 했다.
도쿄 자혜의원 의학교에서 공부해 내무성 의사개업시험의 전기와 후기에 뛰어난 성적으로 합격해 의학득업사 칭호를 얻었다. 귀국 후 현재의 장소에서 개업해 조선 의료계의 선각자로서 특유의 외과술을 펼쳤고, 기존의 ‘인삼의사’(한약재를 사용하던 기존 전통 의원을 낮춰 부른 표현으로 추정)들을 무색하게 했다. 그는 조선인에게서는 보기 드물 만큼 재기가 넘치고 매우 근면한 사람이다. 진료소 문전이 시장을 이루는 것도 까닭 없는 일이 아니다. (원문 번역)일본인 아내 가와구치 이소코와의 결혼 과정을 한 편의 연애담처럼 풀어내기도 했다. 조선공론에 따르면 안상호는 다카기 가네히로의 추천으로 당시 일본에 머물던 의친왕 이강의 의사가 됐는데, 이소코는 당시 의친왕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이후 안상호가 의친왕에게 결혼 의사를 밝혔고 의친왕이 이를 승낙하면서 두 사람은 1907년 3월 부부의 연을 맺은 것으로 나온다. 이 대목에서 조선공론은 안상호를 재차 “본래 운 좋은 남자”, “복이 많은 남자”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안상호는 본래 운이 좋은 남자였다. 그가 의학득업사 면허를 얻고 자혜의원의 의사가 되어 의학 연구에 몰두하던 무렵, 마침 의친왕도 도쿄 별저에 머물고 있었다. 안상호는 다카기 남작의 추천으로 의친왕의 의사가 됐다. (중략) 의친왕의 옆에는 스물두세 살의 아름다운 여시종이 있었다. 지금까지 해부니 세균이니 하며 현미경 속만 들여다보던 안상호의 눈에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 들어왔고, 그의 심장을 뛰게 했다. (중략) 안상호는 복이 많은 남자다. (원문 번역)이후 안상호의 재산도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조선공론은 “안상호의 진료소는 날로 번창했다”며 “2~3년 사이에 택지도 생겼고, 전답도 생겼다”고 했다.
이윽고 이소코 부인은 꽃 같은 딸 A와 옥 같은 아들 B, 1남 1녀를 두었다. 근면한 안상호의 진찰실은 날로 번창했다. 2~3년 사이에 택지도 생겼고, 전답도 생겼다. (원문 번역)실제로 안상호가 상당한 규모의 토지를 보유했다는 사실은 다른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1926년 ‘매일신보’에는 시흥군 일대에서 안상호 소유 산림 10만여 평을 일본인 관리인이 관리하고 있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동화·모범’ 사례로 최소 3차례 소개
한편 안상호는 의사 개인으로도, 가정으로도 ‘모범 조선인’으로 기록됐다. 실제로 그와 그의 가족을 ‘동화’ 또는 ‘모범’의 사례로 다룬 문건만 최소 세 차례 확인된다.
일본 측에서 안상호를 ‘모범이 될 조선인 의사’로 주목한 흔적은 앞선 1907년에도 확인된다. 1907년 6월 일본 의학 전문지 ‘의해시보’ 제677호는 일본인 의사 사토 스스무가 안상호를 대한병원 의사로 채용하기 위해 봉급 예산까지 편성했지만, 의친왕이 그를 곁에서 놓지 않아 여의치 않았다고 전했다. 의해시보에 따르면 당시 사토는 이토 히로부미 통감에게 안상호의 채용 문제를 상의했다면서, 안상호 같은 인물을 중용하면 조선의 의학교육에서 “자연히 모범”이 될 것이라고 평가한 것으로 나온다.
이후 1913년 조선공론은 안상호 부부를 ‘일선동화의 선구’로 내세웠다. 당시 조선공론은 “안상호는 다섯 살 딸과 두 살 아들을 순일본 내지식으로 양육하고 있다. 한창 귀여울 때”라고 전하면서 “요즘에는 일본 내지에서 아이들의 할머니도 와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안상호는 1916년 조선인과 일본인의 친목 및 융화를 내세운 대정친목회 평의원에 이름을 올리는 등 친일 성격의 단체에서 활동했다. 또, 이토 히로부미 추도회 준비위원과 경성부 협의회원, 경성 종로금융조합장 등을 지내기도 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관련 민족문제연구소는 지난 14일 공식 입장을 내고 “안상호의 친일 행적은 명백하다”고 밝혔다. 연구소 측은 안상호의 대정친목회 평의원 활동과 이토 히로부미 추도회 준비위원 참여 등을 주요 행적으로 들었다. 특히 1918년 매일신보에 나타난 안상호의 발언을 근거로 그를 “일제의 동화정책을 전면적으로 내면화한 대표적 인물”로 평가했다.
안상호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지 않은 데 대해서는 “2009년 발간 당시 연구소가 축적한 자료로는 선정 기준에 미달해 수록을 보류한 것”이라며 사전 미수록이 친일 행적이 없다는 뜻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다만 연구소는 선대의 과오를 후손에게 전가하는 연좌제적 비난에는 선을 그으면서 이번 논란을 계기로 식민지 협력의 역사와 그에 대한 인식을 성찰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일요신문은 이번에 확인된 1913년 조선공론 기록 등을 토대로 하영 소속사 측에 증조부 안상호의 행적에 대한 입장을 물었으나 답변을 받지 못했다.
하영은 지난 12일 자신의 SNS에 자필 사과문을 올리고 “가족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만으로 증조부의 삶을 단편적으로 알고 있었다”며 “관련 자료를 직접 확인하는 과정에서 친일 행적을 알게 됐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역사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증조부를 가족의 자랑처럼 언급한 점을 반성한다고 밝혔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