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0부는 10월 1일 송영숙 회장과 임주현 부회장, 킬링턴이 신동국 회장을 상대로 낸 위약벌 청구를 1심에서 모두 기각했다. 갈등은 지난해 한미사이언스가 검토한 서울 반포 시니어케어 사업에서 시작됐다. 한미사이언스 이사회는 지난해 6월 5일 서울성모병원의 협력 등을 조건으로 약 160억 원을 투자하는 안건을 만장일치로 승인했다. 신 회장도 찬성했다. 하지만 닷새 뒤 열린 후속 이사회에서는 신 회장을 포함한 이사 6명이 반대표를 던져 투자가 무산됐다.
송영숙 회장·임주현 부회장·킬링턴 측은 신동국 회장이 4자 사이의 합의를 깨고 입장을 바꿨다고 주장했다. 주주간계약에는 전원 합의 없이 신규 투자 사항을 이사회 안건으로 올리지 않고 보유 지분의 의결권을 공동 행사하는 내용이 담겼다. 원고 측은 신 회장이 이미 찬성한 사업을 다시 논의해 반대한 행위가 계약 위반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주주간계약 위반을 이유로 600억 원의 위약벌도 요구했다.
재판부는 첫 이사회 결의가 최종 투자 승인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당시에는 일정 조건이 충족되는 것을 전제로 투자안을 승인했고, 조건 충족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후속 이사회도 예정돼 있었다는 판단이다. 이에 따라 투자 여부를 다시 이사회에 올린 행위는 4자 사이 합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고 결론냈다. 재판부는 4자가 투자 여부를 이사회에서 다루기로 합의했을 뿐 실제 투자까지 확정적으로 추진하기로 했다는 증거 역시 부족하다고 봤다.
이 갈등이 커진 배경에는 시니어케어 사업을 둘러싼 이해관계도 얽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신동국 회장 측은 시니어케어 사업 투자를 주도한 곳으로 폴캐피탈코리아를 지목하고 있다. 폴캐피탈코리아와 라데팡스파트너스는 킬링턴 지분 100%를 보유한 사모펀드를 공동 운용한다. 신 회장 측은 이런 연결관계를 들어 투자안의 사업성과 경제성을 더 엄격하게 검토해야 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번 판결이 4자 주주간계약 자체를 유명무실하게 만든 것은 아니다. 재판부는 공동의결권 약정만으로 모든 경영 안건에 동일한 입장을 취해야 한다고 보지 않고 개별 안건에서 당사자들이 실제로 어디까지 합의했는지를 따졌다. 앞으로 투자나 M&A, 이사 선임에서도 사전 합의의 범위가 분명하지 않다면 각 당사자가 다른 판단을 내릴 여지는 커진 셈이다. 반대로 합의 내용이 명확한 사안에서는 주주간계약의 구속력이 그대로 작동한다.
권재열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주주간계약은 당사자 사이에 구속력이 있다”며 “분쟁이 생겼을 때 계약을 종료하기로 정해두지 않았다면 소송 중이라는 이유만으로 쉽게 깰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번 판결도 4자 협약 자체를 무력화했다기보다 시니어케어 투자라는 개별 사안에서 합의 범위를 가른 판단으로 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원고 측은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하겠다는 입장이다. 선고 직후 판결문을 검토한 뒤 항소장을 제출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신동국 회장 측은 이번 판결을 이사회의 독립적인 경영 판단이 존중된 결과로 평가했다.
한미그룹 측에 이번 판결과 향후 경영 영향에 대한 입장을 물었으나 답변을 받지 못했다. 한미약품을 커버하는 한 증권사 연구원은 “회사 측에서는 전문경영인 체제인 만큼 경영에는 문제가 없다는 입장만을 전달받았다”고 말했다.

4자연합은 2024년 한미그룹 오너 일가의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신동국 회장은 그해 3월 임종윤·임종훈 형제를 지지했다가 7월 송영숙 회장·임주현 부회장 모녀와 의결권 공동행사 계약을 맺었다. 같은 해 12월 라데팡스 측 킬링턴이 합류하면서 4자 주주간계약이 체결됐다. 이후 형제 측과의 경영권 분쟁에서 우위를 확보하고 지난해 전문경영인 체제를 출범시켰다.
4자연합이 만들어질 당시 모녀 측과 신동국 회장 모두 현실적인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송영숙 회장과 임주현 부회장은 상속세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2024년 신 회장에게 한미사이언스 지분 6.5%를 1644억 원에 매각했고, 신 회장은 이 거래를 통해 개인 최대주주로 올라섰다. 이후 모녀 측은 라데팡스에도 지분을 추가 매각했다.
최근에는 각자 지분 기반을 강화하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차남 임종훈 한미정밀화학 대표가 올해 모녀 측에 합류했고, 송영숙 회장은 9월 보유 지분 2.49%를 임주현 부회장이 지분 100%를 보유한 법인에 넘기기로 했다. 신동국 회장도 올해 3865억 원을 들여 한미사이언스 지분을 추가로 사들이면서 한양정밀 보유분을 포함한 지분율을 35.1%까지 높였다.
제약업계 한 관계자는 “그동안은 각자의 이해관계를 관철하고 경영권을 유지하기 위해 불편한 동거를 계속해온 셈”이라며 “의결권을 확대하기 위한 일종의 ‘적과의 동침’이었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어느 정도 피아 구분이 명확해질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예전에는 양측 모두 지분 매각 가능성을 열어두는 등 금전적인 이해가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본다”며 “지금은 지향점이 달라지는 모습이다. 모녀 측은 오너 일가로서 선대 회장의 뜻을 이어가려는 쪽으로 움직이는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모녀 측이 제기한 위약벌 소송 외에도 신동국 회장은 임 부회장이 공동의결권 행사 약정을 위반했다며 임주현 부회장 보유 한미사이언스 주식 100억 원 상당을 가압류했다. 신 회장 측은 임 부회장이 계약상 지분으로 기재한 9.15% 가운데 에쿼티퍼스트와 환매조건부 거래를 한 약 2.7%의 의결권을 2025년과 2026년 주주총회에서 행사하지 못한 점을 문제 삼고 있다.
법정 밖의 신경전도 이어지고 있다. 송영숙 회장 일가의 법인카드와 회사 자산 사적 사용 의혹이 제기되자 한미그룹은 사실 왜곡이라고 반박했다. 한미그룹 전직 임원들은 신동국 회장과 장남을 횡령·배임 혐의로 고발했고 신 회장 측은 고발인들을 무고 혐의로 맞고소했다. 제약업계 다른 관계자는 “어느 쪽에서 제보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서로 안 좋은 내용이 계속 나오다 보니 문제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며 “앞으로도 순탄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주요 투자에서도 판단이 다시 갈렸다. 한미약품 이사회는 올해 4월 캐나다 바이오기업 앱토즈 바이오사이언스 인수안을 참석 이사 전원 찬성으로 의결했다. 6월 재논의에서는 신동국 회장과 임종훈 한미정밀화학 대표가 보류 의견을 냈고 이영구 독립이사가 반대했다. 다른 이사들의 찬성으로 인수는 가결됐다.
한미사이언스에서는 내년부터 이사진의 임기가 잇따라 끝난다. 2027년 임종훈·배보경·신동국 이사의 임기가 만료되고 2028년에는 임주현·김재교·심병화·최현만·김영훈·신용삼 이사의 임기가 끝난다. 항소심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신규 이사 추천과 재선임을 둘러싼 4자 간 협의가 필요한 상황이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주주연합은 결국 의결권을 얼마나 확보하느냐의 문제여서 이해관계가 달라지면 언제든 균열이 생길 수 있다”며 “앞으로의 투자나 이사 선임 등 다른 안건에서도 비슷한 분쟁이 반복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 “서로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상황에서 2029년까지 기존 공동경영 방식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정민 기자 hurrymin@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