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차례 정상회담 이후 악재 쏟아져…숙원사업 ‘종전선언’ 결국 무산 가능성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문재인 정부 핵심 국정 과제 중 하나였다. 임기 초반 대북정책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며 남북 평화무드를 조성했다. 클라이맥스는 2018년이었다. 박근혜 정부에서 얼어붙었던 남북관계를 해동하는 시발점엔 ‘스포츠 마케팅’이 적극 활용됐다. 문재인 정부는 2018년 2월 열린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을 성사시켰다.
평창 동계올림픽 당시 ‘천안함 피격 배후’로 지목됐던 김영철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과 김정은 여동생 김여정 조선노동당 제1부부장이 한국을 전격 방문해 문재인 대통령,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과 함께 남북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경기를 관람하기도 했다. 김여정은 2월 10일 청와대를 방문해 “문 대통령을 이른 시일 내에 만날 용의가 있다”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의사를 전달했다. 국제적 이목을 집중시키는 이벤트를 바탕으로 남북관계는 본격적인 해빙무드에 돌입했다. 문재인 정부의 ‘화려한 2018년’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에만 세 차례 김정은과 만났다. 임기 2년 차에 역대 대통령 최다 남북정상회담 신기록을 세웠다. 1차 남북정상회담은 평창 동계올림픽 종료 2개월 뒤인 2018년 4월 27일에 열렸다. 이날 오전 9시 29분부터 오후 9시 29분까지 정확히 12시간에 걸친 회담이 판문점 평화의집에서 열렸다. 이날 회담에선 문 대통령과 김정은이 남북군사분계선을 함께 오가는 즉석 이벤트를 펼쳤다.
김정은은 남쪽으로 건너와 정상회담에 임했다. 역사상 최초로 대한민국 실질 영토에서 펼쳐진 남북정상회담이었다. 도보다리 산책과 판문점 선언 발표 등 각종 극적인 이벤트를 집약한 제1차 남북정상회담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기대감을 높이는 정치적 이벤트로 역할을 다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2018년 5월 26일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2시간 동안 판문점 통일각에서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예고 없이 진행된 깜짝 회담이었다. 당시 정부 소식통 발언에 따르면 제2차 남북정상회담은 말이 나온 지 12시간 만에 성사된 것으로 전해졌다.
제3차 남북정상회담은 2018년 9월 18일부터 20일까지 사흘간 평양에서 열렸다. 제3차 남북정상회담 3일차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이 함께 백두산 천지를 방문해 관심을 모았다. 제3차 남북정상회담 결과물인 평양공동선언엔 ‘특별한 사정이 없을 시 김정은 서울 방문 추진’이라는 항목이 담겼다.
하지만 김정은의 서울 방문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세 차례에 걸친 남북정상회담으로 문 대통령과 김정은 사이 유대관계가 돈독해진 듯 보였으나 ‘한반도 운전자론’을 강조했던 문재인 정부가 북미정상회담에서 뚜렷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후 남북정상회담은 열리지 않았다. 2019년 6월 30일 판문점 자유의집 앞에서 문 대통령, 김정은,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회동하는 장면을 끝으로 남북 정상이 만나는 일은 없었다. 2018년 6월 12일과 2019년 2월 27~28일 두 차례에 걸쳐 열린 북미정상회담에서 비핵화와 대북제재 관련 뚜렷한 해결책이 도출되지 않았다.
대북 소식통에 따르면 두 차례 북미정상회담이 성과 없이 끝난 점과 남북미 정상회동 이후에도 국제사회 대북 외교 기조가 크게 바뀌지 않으면서 북한 지도부가 굉장한 실망감을 느낀 것으로 전해진다. 임기 초반 절정 가도를 달렸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유명무실해지기 시작한 시점이다. 2019년 11월 7일엔 귀순 의사를 밝힌 탈북 선원 2명이 안대를 쓴 상태로 강제북송되는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다.
2020년을 기점으로 남북관계는 급속도로 경색됐다. 2020년 2월 코로나19가 세계적으로 대유행하기 시작하자, 북한은 국경을 걸어 잠갔다. 이와 더불어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은을 둘러싼 건강이상설이 불거졌고 김여정이 대남 소통 채널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김여정은 2020년 3월 자신의 명의로 첫 담화문을 내며 문재인 정부를 향한 비판에 적극성을 띠기 시작했다. 대북 전단과 관련해 강한 불쾌감을 표시하며 군사적 위협을 암시하는 메시지를 냈다.
2020년 6월 16일 문재인 정부 대북정책의 주요 분기점이 되는 사고가 일어났다. 바로 개성공단 내에 위치한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폭파된 사건이다. 한 대북 소식통은 “문재인 정부 대북정책 중간성과를 판가름할 일대 사건”이라면서 “김여정이 담화문 정치에 데뷔한 뒤 3개월 만에 본인의 말폭탄을 실제 폭탄으로 바꾸며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원위치로 돌려놓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한국 정부 예산으로 건립된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는 명백한 대남 도발 일환이었다.
2020년 9월 22일엔 해양수산부 어업관리단 소속 공무원 이 아무개 씨가 서해 소연평도 인근 해역에서 어업지도활동을 하다 실종됐고, 실종 지점에서 38km 떨어진 북한 측 해역에서 북한군 총격으로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정부 당국은 북한군 경계병이 코로나19 확산을 차단하려는 목적으로 방역 지침에 따라 이 씨에게 총격을 가했고, 시신을 불태운 것으로 추정했다. 이후 정부 당국은 이 씨가 자진 월북을 시도하다 표류했고, 북측 총격을 받아 사망한 것으로 사건을 결론지어 논란 중심에 서기도 했다.
2020년 급격하게 얼어붙은 남북관계는 2021년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북한은 꾸준한 미사일 도발을 했다. 그 가운데 코로나19 대유행이 잦아들지 않으면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문재인 정부 국정운영 핵심 과제 우선순위에서 점차 멀어진 형국이 됐다. 더구나 미국에선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선에 실패하면서 대북 강경 기조를 띤 조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섰다.
일요신문 취재에 응한 북한 전문가는 “북한이 국경을 걸어 잠근 상황에서 남북 평화무드를 재조성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면서 “북한은 대북제재 완화라는 뚜렷한 목적을 갖고 대미, 대남 외교에 임했는데 일련의 사태로 더 이상의 대화가 무의미하다는 판단을 내리는 상황까지 간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른 대북 소식통은 “문재인 정부는 북한에 꾸준하게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하면서 코로나19 대유행 상황 아래서도 남북 평화무드 재조성 의사를 보여왔다”면서 “그러나 북한 입장에선 코로나19가 촉발한 내부 사회·경제 상황이 체제 존립을 위협하는 요소인 까닭에 외교에 우선순위를 둘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고 했다. 이 소식통은 “문재인 정부가 종전선언 카드를 꺼내는 상황에서도 김정은을 비롯한 북한 지도부는 ‘소득 없는 외교’에 우선순위를 둘 이유가 없어진 셈”이라고 덧붙였다.
2022년 베이징 동계올림픽은 문재인 정부가 종전선언이라는 최종 과제를 추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 계획마저도 사실상 무산됐다. 북한이 1월 베이징 동계올림픽 불참을 결정하면서다. 북한은 2021년 7월 열린 2020 도쿄 올림픽에도 불참한 바 있다. 문재인 정부가 임기 초반 재미를 봤던 ‘스포츠 마케팅’을 추진할 경로가 원천 차단된 셈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2월 10일 세계 7개 통신사와 합동으로 진행한 서면 인터뷰를 통해 “우리 정부 임기 내에 종전선언을 이루겠다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 수 있다”고 밝혔다. 기존 종전선언에 대해 강력한 의지를 보였던 것과는 다른 뉘앙스였다. 사실상 임기 내 종전선언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임을 피력한 모양새다.
한 안보단체 관계자는 “문재인 정부가 북한에게 주도권을 내주는 대북정책을 펼친 뒤로 북한은 다시 도발 일변도로 회귀했다”면서 “더불어 북한과 대화에 우선순위를 두는 대북정책에 따라 국내 거주하는 탈북자들이 신변에 위협을 느끼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잇따르고 있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문재인 정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시작은 창대했으나 끝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결말을 맞이하는 듯 보인다”면서 “결과론적으로 보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대북정책으로 평가될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반면 문재인 정부 대북정책이 소기의 성과를 달성했다는 평가도 있다. 또 다른 북한 소식통은 “결과론적으론 큰 성과를 이뤄내지 못했으나 남북 정상회담을 세 차례 성사시킨 부분은 분명 역사에 남을 만한 숫자”라면서 “문재인 정부 대북정책은 북한도 대화 테이블로 나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함과 동시에 북한이 원하는 조건을 만족하지 못하면 테이블은 금방이라도 엎어질 수 있다는 한계성을 확인했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고 했다.
그는 “남북 평화무드가 조성될 당시엔 일시적으로나마 한반도 긴장이 완화되는 것 역시 확인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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