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이 지도하는 워크숍과 뒤풀이가 성추행 온상…거장 소노 시온 캐스팅 빌미 성행위 요구 ‘불명예’
일련의 문제는 ‘주간문춘’이 지난 3월 10일 “사카키 히데오 감독이 여배우들에게 영화 출연을 빌미로 성관계를 강요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면서 비롯됐다. 사카키 감독은 가해 사실을 일부 인정했고, 이로 인해 3월 25일 공개 예정이었던 영화 ‘밀월’의 개봉이 전면 취소됐다.
이어서 주간문춘은 “사카키 감독과 친한 배우 기노시타 호우카가 여배우들에게 ‘연기지도’라는 명목으로 성행위를 요구했다”고 폭로해 다시 한 번 논란이 일었다. 의혹이 불거지자 기노시타의 소속사는 매니지먼트 계약을 해지했고, 출연 예정인 드라마에서도 하차한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기노시타는 무기한 자숙에 들어갔다.
4월 초에는 거장 영화감독 소노 시온에 대한 의혹이 터져 나왔다. 소노 감독은 2009년 영화 ‘러브 익스포저’가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카리가리상’ ‘국제비평가연맹상’을 수상하며 주목을 받았던 인물. 2010년에는 ‘차가운 열대어’, 2011년에는 ‘두더지’, 2013년에는 ‘지옥이 뭐가 나빠’가 연달아 베니스국제영화제에 출품됐고, 2021년에는 할리우드에 진출하는 등 일본을 대표하는 ‘개성파’ 감독으로 꼽힌다.
‘주간여성’에 의하면 “소노 감독은 여배우들에게 ‘자신의 영화에 출연하면 성공할 수 있다’며 성행위를 강요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 영화 배급사의 한 간부는 “소노 감독이 자신의 요구를 거부한 여배우 앞에 다른 여배우를 불러 관계를 갖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기사가 보도된 후 소노 감독은 홈페이지를 통해 “소란을 피운 점 깊이 사죄드린다. 영화감독으로서 자각과 주위 분들에 대한 배려가 없었다”는 내용의 사과문을 게재했다. 하지만, 보도에 대해서는 “사실과 다른 점이 많다. 대리인을 통해 합당한 조치를 취할 생각”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주간문춘은 “취재 결과, 영화감독들이 강사로 참여하는 워크숍이 ‘성 가해’의 온상이 되고 있다”고 전했다. 일반적으로 영화 워크숍은 배우가 수강료를 내고 감독에게 연기지도를 받는 방식이며, 짧게는 하루 길게는 며칠에 걸쳐 진행된다.
캐스팅으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에 배우들에게는 자신을 어필할 절호의 찬스. 행사가 끝난 후 ‘뒤풀이’가 열리는 경우도 많아 친목을 다지는 자리이기도 하다. 주간문춘은 “대부분의 워크숍이 건전하지만, 개중에는 흑심을 품고 여배우를 ‘물색’하려는 감독도 있다”면서 “워크숍을 계기로 피해를 입은 경우가 다수 보고됐다”는 설명을 더했다. 이와 관련, “한 감독은 워크숍에서 수강생 모두 벌거벗은 채 강의를 듣게 한 일이 있었다”는 놀라운 증언도 이어졌다.
일본 소셜미디어(SNS)에서는 영화계 미투 운동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모양새다. 인기모델 겸 배우 미즈하라 키코는 “일본 연예계에 성 가해가 계속 존재해 왔으며, 나 역시 남성 감독으로부터 성희롱적 발언을 들은 적이 많다”고 인터뷰하기도 했다. “상대는 무의식적으로 말했을지 모르지만, 계속 억울한 마음이 있었다”고 한다.
영화와 연극무대에서 활약 중인 배우 스이렌 미도리는 7년 전 ‘연기지도’라는 명목으로 성행위를 강요받은 사실을 털어놨다. “감독이 새롭게 역할을 만들었다면서 개별 연기지도가 시작됐어요. 당시 감독의 지시는 ‘절대적’이라 판단이 서지 않은 채로 (성행위가)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차마 피해를 호소하지 못했다”고 한다. 혹시라도 ‘일자리가 없어지진 않을까’ 하는 불안감 때문이다. 아울러 일본 연예계에는 ‘베개영업(성관계를 전제로 한 영업)’이라는 가해자에게 유리한 말이 존재한다. 스이렌은 “오히려 유혹한 것 아니냐는 2차 가해를 목격하면서 침묵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름과 얼굴을 공개하며 TV 인터뷰에 직접 출연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스이렌은 “일본 영화계가 좋은 방향으로 바뀌길 바란다”고 말했다. “여러 여성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그 목소리가 마치 등을 두드려준 느낌이었다”고 한다. 이 상황에서 침묵해서는 안 된다는 결심이 섰다.
미투 논란이 거세지자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니시카와 미와 감독 등 일본 유명 영화감독들은 “영화감독의 지위를 이용한 모든 폭력에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또한 ‘영상업계 성폭력을 없애는 모임’이 결성돼 ‘성폭력 실태조사 및 제3의 기관 설치’를 촉구하기도 했다.
카메라맨인 하야사카 신은 “워크숍을 주최하는 회사가 ‘성희롱이나 성폭력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감독에게도 서약서를 쓰게 하거나 개인적인 연락처 교환을 금지하는 등 규칙 마련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영화계의 경우 감독이나 프로듀서에게 권력이 집중되기 쉽기 때문에 구조적 장치를 만들어 피해를 사전에 방지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현장에서도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한 노력들이 이뤄지고 있다. 시라이시 카즈야 감독은 “촬영 전 출연자와 스태프 전원이 ‘언제 괴롭힘 발생하기 쉽고’ ‘그럴 땐 어떤 행동을 취하면 좋을지’ 의견을 내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고 밝혔다. 넷플릭스에서 도입하고 있는 이른바 ‘리스펙트 트레이닝’이라는 기법이다.
시라이시 감독은 “영화계가 바뀌지 않으면 인력 이탈로 이어질 뿐 아니라, 관객도 안심하고 극장을 찾을 수 없다”면서 “지금 일본 영화계는 신뢰를 잃어가고 있기 때문에 제대로 임해서 신뢰를 되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일본 지상파인 TBS 뉴스는 ‘해외 영화업계의 성폭력 방지책’을 소개해 눈길을 끌었다. 가령 미국에서는 인티머시 코디네이터(Intimacy Coordinator)라는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우리말로는 ‘베드신 코디네이터’ 정도로 풀이할 수 있는데, 신체적 접촉이나 노출 등의 장면을 촬영할 때 감독과 프로듀서, 배우 사이에서 조정하는 역할이다. 촬영 시 생길 수 있는 배우의 불쾌함이나 성희롱 등 범죄를 방지한다.
한국의 제도에 대해서도 높은 관심을 나타냈다. TBS 는 “2018년 한국영화성평등센터가 설립됐으며 성희롱 및 성폭력 실태조사, 괴롭힘 예방교육 등이 이뤄지고 있다”고 상세히 전하기도 했다.
강윤화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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