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모바일 중국 공세로 예전만 못해…뒤늦게 콘솔 제작 뛰어들었지만 북미·유럽에 노하우 역부족 평가
엔씨소프트, 펄어비스 등은 기존 콘솔 게임 서비스를 종료하거나 신작 출시를 연기하고 있어 제작 역량에 물음표가 붙고 있다. 그간 국내 게임업계는 PC 온라인·모바일 게임에 집중했다. 그렇지만 높은 기술력과 노하우가 필요한 콘솔 게임 시장에서는 힘을 못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PC 온라인 게임의 인기가 사그라지고, 모바일 게임에서 중국 업체가 외연을 넓히면서 한때 세계 최고를 자랑하던 한국 게임 산업이 ‘끼인 신세’에 전락했다는 것이다.
크래프톤은 지난 12월 2일 ‘칼리스토 프로토콜’을 글로벌 출시했다. 이 게임은 플레이스테이션, 엑스박스 등 최신 콘솔과 PC를 동시 지원하는 AAA(초대작)급 신작으로 기대를 모았다. AAA급 게임은 영화로 치면 ‘블록버스터’를 뜻한다. 많은 제작비와 인력이 투입돼 수준 높은 그래픽과 스케일을 구현하고, 대규모 마케팅으로 높은 매출을 노린다. 크래프톤은 이 게임 제작을 위해 1200억 원 상당을 투자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존 기록인 스마일게이트 ‘로스트아크’의 1000억 원을 넘어선 국내 게임업계 사상 최고 제작비다.
칼리스토 프로토콜은 단순히 물량 공세로 기대를 모은 게임이 아니다. 크래프톤은 2019년 콘솔 게임에 잔뼈가 굵은 제작진으로 구성된 제작사 ‘스트라이킹 디스턴스’를 인수했다. 또 호러 게임 ‘데드스페이스’ 시리즈를 개발한 글렌 스코필드 SDS 대표를 제작진으로 영입했다.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 칼리스토 프로토콜에 대한 평가는 차갑다. 글로벌 최대 게임 플랫폼인 ‘스팀’에서 칼리스토 프로토콜에 대한 긍정 평가는 55%에 불과하다. 비평가 평점을 모은 메타크리틱의 점수는 100점 만점에 72~80점이다. 그래픽은 좋지만 10시간 남짓한 짧은 게임 플레이 시간, 천편일률적인 스토리, 지나치게 잔혹한 연출 등이 주요 비판 요소다. 칼리스토 프로토콜은 출시 당일 스팀에서 글로벌 매출 순위 5위에 올랐지만 지난 12월 5일 기준으로는 10위에 머물고 있다.
증권가에서는 당초 칼리스토 프로토콜 누적 판매량을 500만 장 내외로 예상했다. 크래프톤은 3분기 실적을 발표할 당시 “사전예약 현황이 예상보다 좋다”고 밝혀 기대감이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현 추세로는 판매 전망 수정이 불가피하다. 게임업계 한 관계자는 “디지털 판매가 대세가 돼 사전예약자도 몇 시간 플레이 후 환불이 가능하다”며 “싱글플레이 위주인 만큼 출시 후 사후 개선에도 한계가 명확해 흥행이 힘들어 보인다”고 말했다.
칼리스토 프로토콜의 부진 때문인지 크래프톤의 주가도 폭락 중이다. 크래프톤 주가는 출시 직후 현재까지 30%가량 떨어졌다. 크래프톤은 그간 배틀그라운드 단 한 게임에 의존한다는 지적이 있었다. 칼리스토 프로토콜은 이러한 단점을 개선해 줄 것으로 기대를 받았지만 그 예상을 밑돌 것이 분명해 보이고, 이로 인해 주가도 하락한 것으로 풀이된다. 마케팅비도 실적 리스크로 떠오른다. 크래프톤은 뉴욕 브로드웨이 타임스퀘어와 런던 피카딜리 광장, 북미프로풋볼(NFL) 등에 광고를 집행하는 등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쳐왔다.
이와 관련, 크래프톤 관계자는 “아직 칼리스토 프로토콜과 관련한 구체적 수치가 나온 것은 아니라서 지켜보는 단계”라고 말했다.
이처럼 국내 게임업계는 콘솔 시장의 문을 두들기고 있지만 실패 사례만 쌓이고 있다. 스마일게이트도 콘솔 흑역사를 쓴 기업 중 하나다. 스마일게이트는 올해 2월 게임 ‘크로스파이어’를 콘솔로 이식한 ‘크로스파이어X’를 엑스박스 독점 출시했다. 반응은 처참했다. 메타크리틱 점수는 40점, 이용자 평점은 2.8점에 불과하다. 그래픽은 그럴듯했지만 내용물은 철 지난 아류작에 불과했다는 냉정한 평가가 뒤따랐다. 크로스파이어가 중국에서만 인기 있는 지식재산권(IP)임에도 중국에서 인기 없는 엑스박스 독점작으로 내놓은 점도 실패 원인으로 꼽힌다.
엔씨소프트도 콘솔 시장에서는 큰 힘을 못 쓰고 있다.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는 지난 몇 년간 주주총회에서 “콘솔 게임으로 글로벌 시장에 진출하겠다”고 포부를 밝혀왔다. 일각에서 엔씨소프트에 대해 ‘리니지밖에 없다’ ‘내수용 게임사’라고 비판하는 것을 의식한 행보로 풀이된다. 엔씨소프트는 2020년 소규모 제작비를 투입한 음악 게임 ‘퓨저’를 내놓으며 콘솔 시장의 문을 두드렸다. 당시 이 게임은 김 대표 아내인 윤송이 엔씨웨스트 사장의 야심작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퓨저는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았지만 그렇게까지 큰 인기를 끈 것도 아니었으며 최근 판매를 종료했다.
엔씨소프트는 수년째 콘솔 AAA게임 ‘TL’을 준비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구체적인 출시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엔씨소프트가 TL에 투입한 누적 금액은 1000억 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거액을 투자한 만큼 엔씨소프트 입장에서 TL의 성공은 절실한 상황이다. 엔씨소프트 관계자는 “내년 상반기 TL 출시를 목표로 하고 있으며 구체적인 출시 일정은 추후 공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펄어비스는 게임 ‘검은사막’으로 콘솔 시장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거둔 곳이다. 그러나 후속작 제작에 차질을 빚고 있다. 펄어비스는 2021년 신작 ‘붉은사막’을 출시할 예정이었지만 이후 출시일을 연기해 현재까지도 출시하지 않고 있다. 펄어비스 관계자는 “개발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출시일을 연기했다”며 “아직 공식적인 붉은사막 출시일은 정해지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국내 게임업계의 콘솔 잔혹사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인 콘솔 게임 시장의 전형을 보여준다. 국내 게임 시장은 PC·모바일 위주지만 글로벌 시장은 콘솔이 주류다. 락스타게임즈가 2013년 출시한 GTA5의 제작비는 2억 6000만 달러(약 3412억 원)였지만 출시 3일 만에 10억 달러(약 1조 3124억 원)를 벌어들였다. GTA5는 출시 9년을 맞은 현재까지 꾸준히 팔려 누적 매출이 60억 달러(약 7조 8744억 원)를 넘어선다.
국내 게임업계는 최근 PC·모바일 양측에서 중국 업체로부터 강력한 압박을 받고 있다. 인력과 자본을 앞세운 중국이 상대적으로 제작이 쉬운 PC·모바일 시장에서 치고 나가며 국산 게임의 입지가 위태로워지고 있다. 국내 게임업계가 콘솔로 눈을 돌리는 이유다. 그러나 블록버스터급 콘솔 게임 제작을 위해선 대규모 제작비와 깊이 있는 구성이 필수다. PC·모바일과 개발 환경이 다른 만큼 숙련도 높은 제작진 확보도 필요하다. 그간 PC 온라인과 ‘뽑기’ 위주 모바일 게임 제작에 몰두해온 한국 게임계의 개발력은 콘솔 시장에서 통하지 않고 있다.
게임업계에서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온다. 게임업계 다른 관계자는 “뒤늦게 콘솔 게임 제작에 뛰어들고 있지만 이미 노하우를 쌓은 북미·유럽 개발사들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며 “현지 스튜디오를 인수하더라도 한국식 개발문화와 맞지 않아 실패하는 사례가 반복되고 있다”고 한탄했다.
민영훈 언론인
박형민 기자 godyo@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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