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족 5000개 넘는 탄원서 경찰에 전달…피의자 주장과 달리 사고 직후 차량 ‘잠시 정지’ 등 확인, 검찰 송치
12월 7일까지만 해도 일요신문에 “언론에서 제기하는 의혹과 달리 진술과 정황으로 보면 뺑소니 혐의를 적용할 수 없다”며 “추측성 기사는 자제를 요망한다”고 한 경찰은 유가족의 호소에 여론이 호응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던 8일 오후 뺑소니 혐의를 추가했다(관련기사 “원래 위험했던 길” 청담동 스쿨존 초등생 사망사건 되짚어보니).
#경찰 피의자 송치 전날 ‘뺑소니 혐의’ 적용
12월 2일 서울시 강남구 청담동에 있는 언북초등학교 후문에서 음주 상태로 차를 몰다가 초등학생을 치어 숨지게 한 혐의를 받는 30대 남성 A 씨가 ‘뺑소니 혐의’를 추가 적용받아 9일 검찰에 구속송치됐다. A 씨는 12월 2일 오후 4시 47분쯤 언북초등학교 후문 인근에서 자택 방향 골목으로 좌회전하다 방과 후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던 9세 초등학생 B 군을 치는 사고를 냈다.
12월 4일 강남경찰서는 A 씨의 구속영장을 신청하며 ‘민식이법’으로 불리는 특정범죄가중법상 어린이보호구역치사 등 혐의를 적용했지만, 특정범죄가중법상 도주치사, 이른바 ‘뺑소니’ 혐의는 적용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8일 입장을 번복한 경찰은 “사고 경위에 대해 블랙박스와 폐쇄회로(CC)TV 분석, 피의자와 목격자 진술을 바탕으로 수사심사관과 법률전문가 등 내·외부 법률 검토를 거쳐 도주치사 혐의를 추가했다”고 발표했다.
하나하나 사실관계를 따져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A 씨는 경찰 조사에서 집에서 홀로 맥주 1~2잔을 마시고 운전했다고 진술했지만, 실제 A 씨의 당시 혈중알코올농도는 운전면허 취소 기준인 0.08%가 넘었다. A 씨는 사고를 내고 40m가량을 더 운전해 자택 주차장으로 이동했고, B 군은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망했다. 블랙박스와 CCTV 등을 분석한 경찰과 목격자 증언 등을 종합하면 사고 직후 A 씨가 운전 중인 차량이 잠시 멈췄다가 자택 주차장으로 향했다.
A 씨가 다시 사건 현장으로 도착한 시간은 40여 초 뒤로 보인다. 일각에선 A 씨가 5분여가 지난 뒤 돌아왔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경찰은 CCTV 등을 통해 40여 초 뒤에 돌아온 것을 확인했다는 입장이다.
사고 사실을 신고한 이는 A 씨가 아닌 목격자인 인근 상인이다. 다만 경찰은 사건 현장으로 돌아온 A 씨가 휴대전화로 신고하려 하는 듯한 모습이 CCTV에 찍혀 있었다고 밝혔다. 경찰은 당초 A 씨가 40여 초 만에 현장으로 돌아온 점, 사고 사실을 신고하려 한 모습이 CCTV에 촬영됐던 점 등을 고려해 뺑소니 혐의를 적용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B 군의 유가족은 당시 A 씨가 사고 이후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었고, 경찰과 소방에 신고한 것은 A 씨가 아닌 목격자라고 주장하며 강하게 반발했다.
B 군의 어머니는 12월 6일 밤 소셜미디어(SNS) 상에서 “현재 경찰은 가해자의 뺑소니 혐의를 빼고 수사를 진행하려 한다”며 탄원서를 공개했다. 유족은 탄원서에서 경찰의 부실 수사를 의심한다며 가해 운전자를 엄벌해달라고 주장했다. B 군 어머니는 7일 SNS에서 5000개가 넘는 탄원서를 모아 경찰 측에 전달했다.
경찰에 따르면 A 씨는 당시 사고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그렇지만 사고 직후 피의 차량이 잠시 정지했다는 사실이 A 씨 주장과 배치된다. 법률사무소 유심의 장태화 변호사는 7일 일요신문에 “피의자가 현장으로 빠르게 돌아왔다고 하더라도, 사고 당시 차량이 정지했다면 사고 사실을 인지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결국 경찰도 이런 부분을 감안해 검찰 송치를 앞두고 뺑소니 혐의를 추가했다. 이제 검찰이 어떤 혐의를 적용해 기소할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뺑소니 혐의’까지 인정되면 A 씨의 형량이 더 무거워진다. 특정범죄가중법상 제5조 13항인 ‘어린이 보호구역에서 어린이 치사상의 가중처벌 조항’은 피의자에게 무기 또는 3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게 돼 있지만 제5조 3항 ‘도주차량 운전자의 가중처벌 조항’은 피의자에게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게 규정돼 있다. 결국 형량이 3년 이상에서 5년 이상으로 늘어난다.
#인도 없고, 양방통행…“원래 위험했던 길”
언북초등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둔 학부모들은 학교 인근에 인도가 없고 길이 좁아 늘 위험했다고 입을 모았다. 초등학교 1학년 자녀를 둔 40대 학부모 강 아무개 씨는 “아이가 혼자 등교하는데, 인도가 없어 늘 걱정된다”고 말했다. 2시에 하교하는 초등학교 3학년 손녀를 기다리고 있던 70대 남성 강 아무개 씨도 “손녀와 동급생이 사망해 안타깝다. 특히 후문 쪽이 양방통행로라 늘 불안했다”고 했다.
대로변부터 시작되는 언북초등학교 인근 어린이 보호구역은 인도 폭이 1m가 채 되지 않았다. 정문과 후문을 잇는 도로에는 아예 인도가 없었다. 양방통행인 1차선 도로로 차들이 서로 빗겨 지나갔다. 후문에서 근무하던 보안관 60대 남성 홍 아무개 씨는 “학부모들이 오래전부터 도로를 일방통행로로 바꾸어달라고 요구했지만, 번번이 주민 반대에 부딪혔다”고 했다.
사고가 발생한 언북초등학교 후문에는 학부모와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추모 공간이 조성됐다. 추모 공간에는 아이들이 즐겨 먹는 젤리, 파란색 봉제 인형 등도 함께 벽에 붙어 있었다. 한쪽에는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어른들도 반성하고 더 노력할게”라고 쓰인 쪽지가 눈에 띄었다.
한편 뒤늦게 강남구청은 언북초등학교 후문 인근 도로를 일방통행으로 지정하기로 했다. 7200만 원의 예산을 책정한 강남구는 해당 도로가 2023년 4분기에 일방통행으로 바뀔 예정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현이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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