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지사서 성비위 사건 잇달아 발생…2차 피해 우려에 사실 밝히지 못한 채 고립돼
한전의 한 지사에서 근무하는 20대 여성 A 씨는 상사의 언어적 성희롱 때문에 자주 수치심을 느꼈다고 호소한다. A 씨에 따르면 이 상사는 지난해 회식자리에서 스킨십을 거부한 A 씨에게 “왜 그러냐”고 한 뒤 다른 남성 직원을 가리키며 “나는 얘한테 뽀뽀할 수도 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상사는 올해 언어적 성희롱, 직원들과 잦은 갈등 등으로 현재 다른 지사로 이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A 씨는 “최근 가해 상사가 있는 지사의 여성 직원들과 오프라인 교육을 하다 만난 적이 있는데 다들 ‘하던 짓 또 하고 다닌다’며 언어적 성희롱에 대해 불쾌해했다”고 언급했다. ‘과거 사내 상담소 같은 곳에 말하지 못한 이유가 있냐’는 질문엔 “눈치가 보인다”며 “불이익을 당할까봐 말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한전의 또 다른 지사의 부장급 직원은 2년 전쯤 회식자리에서 여성 부하 직원 B 씨에게 “옆자리로 오라”라고 한 뒤 B 씨의 목 뒤로 팔을 감아 술을 마신 것으로 알려졌다. B 씨는 “처음 있는 일이라 당황했다”며 “그 이후로 뵐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다”고 토로했다. 가해 직원과 피해 직원은 현재 같은 공간에서 근무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일련의 상황에 대해 법무법인 위온 박찬호 변호사는 “다른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성희롱적인 발언을 하면 형법 제311조 모욕죄에 해당해 1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2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 “가해자와 피해자 둘만 있는 상황에서 성희롱적인 발언이 오가면 정신적 피해에 대해 민사적으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고 부연했다.
한전의 성비위 사건은 그간 꾸준히 발생했다. 2019년에도 익명제보 창구인 레드휘슬을 통해 과장급 남성 직원이 4명의 여성 직원에게 지속적인 성추행 및 언어적 성희롱을 한 것으로 드러나 뭇매를 맞았다. 김정재 국민의힘 의원실 자료에 따르면 2017~2021년 5년 동안 산업통상자원부(산업부) 산하 총 39개 공공기관 중 한전의 성비위 사건은 26건으로 최다를 기록했다.
한전에 ‘고충 관련 사건 처리 절차’ 제도가 있지만 내부 직원들 사이에선 유명무실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고충 관련 사건 처리 절차’ 제도는 한전 내부 온라인 상담 및 신고센터, 고충상담원에서 진행된다. 한전에 따르면 한전은 성비위 사건 발생 시 내·외부 전문가를 통해 공정한 조사를 진행하고 심의위원회를 열어 성비위 사건 성립 여부를 판단한다. 제도에는 성비위 사건 가해자와 피해자의 근무지를 즉각 분리하고 가해자의 직위해제 등 신속한 초동 대처로 2차 피해를 방지한다는 내용도 담겼다. 외부 전문상담센터와 제휴해 전문가와 직접 상담할 수 있게 한다는 것도 명시됐다. 그러나 한전 관계자는 고충 관련 사건 처리 절차 제도를 이용한 성희롱 피해자 수, 이용률 등에 대한 질문에 “비공개 내용”이라고 말했다.
직원들 사이에서는 이 제도를 이용하기 어렵다는 의견이 많다. 앞서 B 씨는 “우리는 지사 내 인원이 적어 피해자가 특정된다”며 “소문이 금방 나고, 다른 직원들에게 ‘내가 과했다’는 소리를 들을까 걱정돼 (성희롱이 일어나도) 조용히 있는다”고 호소했다. 성희롱 피해를 입어도 피해자가 특정돼 조직 내에서 ‘신고자’라는 이미지가 생기거나 2차 가해를 당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한전 다른 지사에서 근무하는 30대 남성 C 씨는 “사측 제도가 제대로 이뤄지는지 보려면 피해 신고가 들어와야 하는데 피해자들이 조용히 있으면 사측 대응을 확인하긴 어렵다”면서도 “다만 어떤 지사는 남성 직원이 더 많은데 이런 곳에서 여성 성희롱 사건이 발생하면 피해 여성 직원이 피해 사실을 밝히는 게 두려울 순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한전에 따르면 한전 지사는 전국에 약 250여 개가 있다. 각 지사별 인원은 30~40명이며 성비는 남성이 좀 더 많은 것으로 파악됐다. 한전 관계자는 “남녀 비율이 2 대 1 정도다”고 말했다.
구미영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여성 직원 숫자가 적은 조직일수록 피해자 식별이 가능하기 때문에 신고를 어려워하는 경우가 있다”며 “피해자 보호 의지를 전 조직적으로 강조하고 2차 가해 발언·행동이 왜 심각한 문제인지 인식을 개선하기 위한 교육, 2차 가해자에 대한 엄벌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설명했다.
일부 성희롱 피해자들은 노동조합(노조) 측에도 성비위 사건을 알리기 힘들다고 하소연한다. 앞서 A 씨는 “올해 노조 간부가 성추행한 사건이 있지 않았나”라며 “노조 간부도 성비위 사건을 일으켰는데 어떻게 안심하고 (성희롱) 피해 사실을 밝히겠나”라고 말했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김경만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한전에서 받은 레드휘슬 신고 내역에 따르면 한전의 한 노조 간부는 지난 7월 회식자리에서 여성 직원의 신체를 부적절하게 접촉했다. 해당 노조 간부는 지난 8월 1일부로 직위해제 됐으며 징계 처분 절차를 밟는 것으로 전해진다.
일각에선 애초 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철저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실제 국내에선 매년 의무적으로 직장 내 성희롱 예방교육이 포함된 법정의무교육이 이뤄지고 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국내 5인 이상 사업장의 직원들은 남녀고용평등법 제13조에 따라 5대 법정의무교육을 실시한다. 5대 법정의무교육에는 ‘직장 내 성희롱 예방교육’이 포함돼 있다. 한전에서도 해당 교육을 매년 진행한다. 류호정 정의당 의원은 “성희롱·성추행 교육이 법에서 정한 의무교육이긴 하지만 하라고 하니까 하는 요식행위로 진행되는 경우가 상당하다”고 질타했다.
법조계에선 한전처럼 내부 문제에 대한 고발 제도가 유명무실할 때 외부기관을 통해 피해 사실을 밝히는 것이 좋다고 조언한다. 박찬호 변호사는 “지방고용노동관서나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할 수 있고 피해자가 성희롱 및 이로 인한 직장 내 문제 제기로 부당한 처분을 받으면 노동위원회에 구제신청을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성희롱 행위가 모욕죄 또는 통신매체이용음란죄에 해당한다고 판단되면 수사기관에 고소를 제기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직장 내부에서 직접적인 교육을 통해 성비위 사건의 피해자를 고립시키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구미영 연구위원은 “외부 전문기관에 고충을 신고할 수 있는 핫라인을 두거나 관리자의 성희롱 예방 및 고충 대응 역량 강화를 위한 특별교육을 대면으로 실시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소영 기자 upjsy@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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