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배역 68명 섭외, 촬영보다 빡세” 황정민 민머리 1초 만에 OK, 정우성 집요한 러브콜 못 이겨 출연
영화 ‘서울의 봄’을 본 한 관객이 온라인 영화 커뮤니티에 올린 리뷰의 일부다. “잘 만들어서 화가 나는 영화는 처음”이라는 반응부터 “피가 끓어오르는 영화”라는 평가도 잇따른다. 뜨거운 반응 속에 연말 극장가에서 화력을 발휘한 작품으로 떠오르고 있다.
11월 22일 개봉 첫날 20만 관객을 동원한 ‘서울의 봄’은 개봉 전부터 10일 연속 예매율 1위에 올라 돌풍을 예고했다. 극장가와 영화계에서는 ‘서울의 봄’이 오랜만에 극장에 흥행 훈풍을 몰고 올 것이라는 기대감까지 형성됐다.
‘서울의 봄’은 1979년 12월 ‘하나회’와 전두환으로 상징되는 신군부가 정권을 손에 넣기 위해 벌인 12‧12 군사반란을 파고드는 영화다.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이듬해 봄까지 형성된 민주화에 대한 기대를 지칭하는 ‘서울의 봄’이 신군부에 의해 얼마나 무참하게 무너졌는지를 다루고 있다.
영화의 미덕은 역사적인 실화를 다뤘지만, 그 사건을 그대로 옮기는 데서 벗어나 마치 한 편의 전쟁영화를 보는 듯한 긴장감을 선사하는 구조로 이야기를 설계한 데 있다. 보안사령관 전두광(황정민 분)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의 세력과 서울을 지키려는 수도방위사령관 이태신(정우성 분)의 대립을 주축으로, 대통령과 국방장관, 납치된 육군참모총장 등 여러 인물이 얽힌 정치적인 소용돌이를 다루면서도 상업영화로서의 재미도 놓치지 않았다. 그 역사를 알지 못하는 젊은 관객들도 40여 년 전 서울에서 벌어진 비극에 그대로 몰입할 수 있도록 설계한 감독과 배우들의 ‘집요한 작업’의 결과물이다. 영화를 연출한 김성수 감독과 주연 배우인 정우성, 황정민은 ‘서울의 봄’이 여느 영화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집중력과 밀도 높은 작업으로 탄생했다고 말한다.
#김성수 감독, 결국 연출 맡은 이유
김성수 감독은 2016년 영화 ‘아수라’를 통해 정치인과 그의 하수인 형사가 벌이는 지옥 같은 세상을 그려 주목받았다. 추악한 범죄의 늪에 빠진 모두가 지독한 파국을 맞는 결말로 관객에 충격을 안긴 감독은 이후 차기작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2019년 ‘서울의 봄’의 연출을 제안 받았다. 당시 시나리오는 12‧12 군사반란의 역사적인 정황이 구체적으로 묘사돼 있었다. “그대로 영화를 찍는다면 군사반란을 주도한 신군부 세력에 일종의 당위성을 부여할 수 있다는 우려가 들었다”게 감독의 설명. 그래서 연출 제안은 거절했다.
하지만 이듬해 제작진은 다시 김성수 감독을 찾았다. 감독은 용기를 냈다. 다큐멘터리 같은 기록이 아닌 상업영화로 이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처음 본 시나리오가 줄곧 머리에서 떠나지 않은 것도 일조했다. 사실 김성수 감독은 실제로 12‧12 군사반란과 뗄 수 없는 ‘기억’을 지녔다. 서울 한남동에서 살던 19세 때, 한밤중 동네를 울리던 총성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한남동 공관에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납치되던 순간 벌어진 총격전을 직접 느꼈던 감독은 시간이 지나 그 현장을 영화로 만들었다.
김성수 감독은 “훗날 신군부 세력이 반란죄와 내란죄 등으로 대법원 판결을 받을 수 있던 데는 (12‧12 군사반란을) 증언한 사람들이 있었다”며 “맞서서 끝까지 싸운 사람들, 진짜 군인들을 부각하면 (영화가) 승리의 기록이 아니라 승리를 하기 위해 그들이 얼마나 못된 짓을 했는지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고 밝혔다.
#황정민을 ‘전두광’ 역할에 캐스팅한 이유
황정민은 12‧12 군사반란의 장본인 전두환을 극화한 인물 전두광 역을 맡아 영화에서 소름 돋는 연기력을 과시한다. 권력을 향한 욕망에 사로잡혀 군대 내 사조직을 동원해 폭주하는 전두광을 통해 실제로 서울의 봄이 어떻게 무참하게 짓밟혔는지를 보여준다.
김성수 감독과 황정민은 ‘아수라’에서 처음 만났다. 둘의 인연은 계속됐다. 감독은 황정민의 초대로 그가 주연한 연극 ‘리처드 3세’ 공연장을 찾았다가 깜짝 놀랐다. 당시 ‘서울의 봄’ 준비에 한창이던 감독은 무대에서 셰익스피어의 비극 리처드 3세를 연기하는 황정민을 보고 ‘전두광은 황정민이 해야 한다’는 믿음을 굳혔다. 전두광은 단순히 악인이 아니고, 스스로도 어쩌지 못하는 수레바퀴에 빠져 무시무시한 욕망의 화신이 되어 버린 인물이라고 해석한 감독의 판단을 구현한 최적의 배우라는 생각에서다.
하지만 ‘민머리 분장’은 넘어야 할 산이었다. 우려는 기우였다. 황정민은 감독의 제안을 듣고 단 1초 만에 “좋다”고 응했다. “대머리로 상징적인 모습이 나타나야 한다. 가발이지만 그 사람(전두광)에게는 가면이고 의상”이라는 감독의 말에 황정민은 고민 없이 응답했다.
완성된 영화를 처음 확인하는 언론배급 시사회 자리에서 황정민은 눈시울을 붉혔다. “가슴에서 소용돌이가 쳐 감정이 격해졌다”는 그는 “이런 작품에 참여할 수 있다면 (대머리) 분장 말고 더한 것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충무로 남자 배우 다 나온다’
‘서울의 봄’은 개봉 전부터 ‘한국영화에 출연할 수 있는 남자 배우들이 거의 다 나온다’는 입소문으로 영화계의 관심을 끌었다. 황정민, 정우성, 박해준, 이성민, 김성균, 김의성뿐 아니라 신군부 세력으로 등장하는 김성호, 박훈, 최병모 등과 군사반란에 동참한 장성인 안내상, 고 염동현, 이들에 맞서는 군인 정형석, 남윤호 등이다.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만 68명에 달한다. 특별출연으로 참여한 정민식과 정해인, 이준혁 등도 있다.
김성수 감독은 “배우들이 많아 캐스팅하고 오디션을 보는 과정이 영화 촬영보다 더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출연 비중이 적고, 대부분 지방에서 찍어야 하는 강행군이었지만 기꺼이 작품에 동참하려는 배우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미친 캐스팅’이 이뤄졌다. 이에 감독은 “당시 신군부 세력은 굉장히 똑똑하고 근사하게 생긴 군인이었다고 하는데, 영화 속에서 인물들은 엘리트 군인의 근사함과 동시에 굶주린 늑대의 무리처럼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돌이켰다.
#정우성 ‘감독을 죽일 수도 있겠구나’ 말한 까닭은?
정우성은 폭주하는 전두광과 그 무리에 홀로 맞서 ‘나라와 국민을 지킨다’는 군인의 신념을 지키는 수도방위사령관 이태신으로 활약한다. 서울로 진격하는 신군부에 맞서 군인 한 명쯤은 수도를 지켜야 하지 않겠냐고 절규하는 그의 모습은 김성수 감독이 이번 작품을 통해 진짜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다.
정우성과 김성수 감독은 ‘서울의 봄’을 통해 5번째 호흡을 맞췄다. 1997년 영화 ‘비트’로 시작한 이들의 인연은 ‘태양은 없다’와 ‘무사’, ‘아수라’를 거쳐 이번 영화로 이어졌다. 정우성은 김 감독과 작업할 때마다 탁월한 성과를 거뒀고, 배우로서의 진가도 발휘했다. ‘서울의 봄’은 그 결정판이다.
하지만 정우성은 ‘서울의 봄’ 출연을 처음엔 거절했다. 마침 직전에 촬영한 영화가 제5공화국이 배경인 이정재의 연출작 ‘헌트’였기 때문. 정우성은 “‘헌트’의 김정도와 ‘서울의 봄’의 이태신이 동일 인물(전두환)을 대척점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 이번 작품에 불리할 것 같다”고 판단, 감독에게 “대한민국에 좋은 배우 많으니 찾아보라”고도 권했다. 그럼에도 감독은 집요하게 정우성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사실 정우성은 김성수 감독의 ‘집요함’을 가장 잘 아는 배우다. 감독을 진심으로 존경하지만, 촬영 현장에서는 감독의 채찍질에 몸서리칠 때도 많다. 정우성은 “배우가 감독을 죽일 수도 있겠구나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었다”고 했다. 극한으로 몰아붙이는 감독의 연출 스타일에 베테랑 배우인 그 자신도 감당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혹독한 과정에서 탄생한 결과물은 늘 빛이 난다. 그래서 정우성은 ‘김성수 감독의 페르소나’라는 평가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이호연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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