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연이는 연기하기 진짜 어려운 캐릭터예요. 밀실에 갇혀 마땅한 애라고 관객 분들이 나쁘게 보셔도 할 말이 없죠(웃음). 어떻게 보면 이건 영화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아무도 속에서 꺼내지 못한 욕망의 작은 씨앗들을 수연을 통해 보여줄 수 있던 것 같아요. 영화적인 상상으로만 접근할 수 있는 캐릭터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래서 더 어렵다고 느껴지기도 했고요. 촬영할 땐 수연이를 연기하는 것만으로도 허덕이느라 다른 건 돌아보지도 못 했다니까요(웃음).”
오케스트라를 소유한 부잣집 따님인 수연은 남들 보기에 그럴듯한 ‘구색’을 갖추기 위해 잘생긴 마에스트로인 약혼자 성진(송승헌 분)과의 결혼을 결정한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성진을 온전히 소유할 수 없다는 조바심 탓에 친한 후배 첼리스트인 미주(박지현 분)와 짜고 성진을 시험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신혼집에 설치된 밀실에 숨어 성진이 자신의 소중함을 깨닫고 후회하는 모습을 확인한 뒤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나타나려 했지만, 계획 실행을 도운 미주의 배신으로 영원히 밀실에 갇히게 될 위기에 처한다. 두 배신자가 각자의 욕망에 휘감긴 관계를 맺는 동안 수연은 밀실 안에서 이를 지켜보며 처절한 분노를 토해낸다.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가 직접 ‘갇혀도 싸다’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해 강조할 정도로 수연은 ‘못되고 이기적인’ 여자다. 그의 말마따나 철저한 영화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비현실적인 인물이지만, 구축 과정에서 배우의 세심한 디테일이 더해지면서 관객들이 보기에 불편하지 않은 ‘현실 판타지’가 완성됐다. 특히 밀실 안에서 배신에 미쳐가면서도 그 상황에 절대 굴복하지 않으려 하는 모습이 조여정이 설정한 ‘수연스러움’ 가운데 하나였다고 했다.
“밀실에 계속 갇혀 있으면서도 수연이는 킬힐을 절대 벗지 않아요. 그건 걔의 존엄과도 같거든요(웃음). 따로 그런 설정을 둔 게 아니라 연기하다 보니 너무 자연스럽게 그 모습이 상상되더라고요. 밀실에 갇혔더라도 무너지는 건 나 자신이 절대 용납할 수 없다, 난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이런 느낌인 거죠(웃음). 나중에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라면을 발견하고 역겨워하다가도 먹을 때 보면 스프를 톡톡 찍어가며 되게 우아하게 먹잖아요? 그 모습이 수연이 어떤 사람인지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했어요.”

“수연이 성진과 미주의 베드신을 지켜보는 장면을 촬영하기 전에 별다른 계산을 하지 않고 현장에 바로 들어갔었어요. 그런데 본능적으로 미주의 이름을 먼저 부르게 되더라고요(웃음). 아마 수연은 그 자리에서 의도를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겠죠. 그 관계에서 성진에게는 의도가 없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성진에 대한 배신감은 당연히 느꼈을 거예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네가 감히?’라는(웃음).”
김대우 감독의 세계에 익숙해져 있던 조여정에게도 제대로 만들어내기 까다로운 인물이었던 수연을 완성해내는 데 가장 큰 힘이 돼준 것은 미주 역의 박지현이었다. “(박)지현 씨만 보고 있어도 수연이 완성되는 것 같았다”는 조여정은 무엇보다 박지현의 자연스러운 연기를 향해 몇 번이고 엄지를 치켜들었다. 극 중 수연이 절대 알 수 없는 미주의 지독한 절망을 그처럼 잘 표현해낼 수 있는 배우가 없다는 것이었다.

김대우 감독이 세 번째로 조명한 조여정의 ‘새 얼굴’은 적은 분량 속에서도 완벽한 존재감으로 빛났다. 인간의 비현실적인 욕망을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그려낸 그의 연기는 이 영화가 단순히 ‘파격적인 베드신’으로만 소비되는 것 그 이상이 돼야 한다는 주장의 뚜렷한 근거로 자리잡고 있기도 하다. ‘히든페이스’에서 증명했듯이, 데뷔 26주년을 맞이한 지금도 조여정은 여전히 대중들이 즐거운 조바심으로 그의 다음 행보를 기대하게 만들고 있었다.
“제게 이제까지 해보지 않은 새로운 역할을 주실 때면 ‘내가 안 해본 걸 주셨어, 너무 좋아!’ 이렇게 돼요(웃음). 한편으론 ‘내가 이걸 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도 있지만 그래도 늘 도전해 보게 되는 것 같아요. 배우에게 있어서 이제껏 안 해본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는 기회는 잘 오지 않으니까요. 앞으로 또 누군가 제게 다른 모습을 떠올려 주신다면 그걸 따라 제 선택의 폭도 넓어질 거예요. 하지만 지난번과 약간 비슷한 역을 주셔도 또 해나가겠죠(웃음).”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