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 씨가 군복을 벗은 건 2019년 3월 31일이다. 그는 명예퇴직을 결정했다. 정년이 남았지만 후배들에게 더 나은 길을 터주고, 국가에 짐이 되지 말자는 생각으로 퇴직을 결정했다고 한다. 37년 군생활을 정년보다 일찍 정리한 대가는 명예퇴직금 3911만 3830원이었다.
명예퇴직은 정년이나 징계 등 사유와 무관하게 근로자가 스스로 신청해 직장을 그만두는 행위다. 상호 합의 아래 근로계약을 해지하는 절차다. 국가공무원법 제74조 2항엔 명예퇴직과 관련한 규정이 있다. 공직자들에게 해당하는 이 규정에 따르면, 명예퇴직은 20년 이상 장기근속자에 대한 명예로운 퇴직기회 부여와 퇴직 시 금전적 보상을 함으로써 노고에 보답하기 위해 마련된 제도다.
공직자가 명예퇴직을 하게 되면, 이에 따른 금전적 보상에 해당하는 ‘명예퇴직 수당’을 받는다. 이후 정년과 무관하게 즉시 면직된다. 군과 경찰처럼 계급과 임관연도가 중요시되는 문화가 존재하는 조직에선 상급자 계급 및 임관연도 등에 따라 적절한 시점에 명예퇴직을 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다른 말로는 ‘희망퇴직’으로도 불린다.
명예퇴직 이후 정 씨는 당시 결혼을 앞두고 있던 장녀 상견례를 위해 캐나다 밴쿠버를 방문했다가 2019년 5월 13일 귀국했다. 귀국 이튿날인 2019년 5월 14일 정 씨 자택에 국정원 요원들이 들이닥쳤다. 국정원은 군사기밀보호법(누설) 위반 혐의에 따른 압수수색영장을 제시했다.

영문도 모른 채 압수수색을 받은 정 대령은 기밀 누설 혐의와 관련해 무혐의를 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졌다. 압수수색 과정에서 채집된 전자기기 포렌식 결과 20년여 전 비밀 문건이 발견됐다. 정 씨는 군사기밀 탐지·수집 혐의로 기소됐다. 1심에서 정 씨는 징역 6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정 씨 측은 채증법칙 위배, 법리 오해 등을 주장하며 항소했다. 그러나 2심 재판부는 정 씨에게 더 중한 형을 선고했다. 2심에서 정 씨는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 사회봉사명령 160시간을 선고받았다. 2024년 5월 대법원은 2심 판결을 확정했다. 정 씨는 기밀 누설 혐의는 무혐의 처분을 받았지만, 기밀 탐지·수집 혐의와 관련해 유죄를 선고받았다.
군 안팎에선 수사 및 재판 과정 자체를 미심쩍게 여기는 시선이 존재했다. 전직 정보기관 관계자는 “본인이 작성한 뒤 본인이 삭제한 비밀을 포렌식으로 되살린 뒤 기밀 탐지·수집을 했다고 판단한 것은 앞뒤가 안 맞는 것”이라면서 “비밀을 소급적용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 씨 재판 과정서 공판조서와 녹취록 내용이 다르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평생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생한 국가유공자에게 없는 죄를 뒤집어 씌웠다는 주장도 나왔다(관련기사 조서와 녹취록이 다르다? 정규필 ‘군사기밀 위반’ 2심 재판 미스터리).
5년 동안 벌어진 법적 공방은 정 씨가 걸어 온 37년 ‘첩보 외길인생’ 명예를 건 혈투였다. 결론적으로 정 씨는 이 싸움에서 졌다. 그 여파는 컸다. 평생을 군에 헌신한 대가를 빼앗길 처지에 놓였다. 군은 대법원 판결 이후 정 씨의 군인연금을 50% 삭감한다고 통보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받았던 군인연금 중 절반을 환수하기로 했다. 환수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연 12%에 해당하는 법정이자가 추가된다고도 했다.
비상계엄으로 군이 떠들썩했던 2024년 12월 3일 육군본부는 정 씨에게 명예전역수당 환수 고지문을 발송했다. 명예퇴직 수당 3911만 3830원을 반납하라는 문서였다. 고지문 내용은 이랬다.

정 씨는 “처음엔 등기로도 스팸 메일이 오는구나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면서 “그 이후 독촉장이 도착한 뒤 이게 진짜인가 싶었다”고 했다. 2025년 2월 5일 발송된 ‘명예전역수당 납부 독촉장’엔 앞서 도착한 고지서 내용과 비슷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다른 점은 ‘미납에 따른 가산 이자’가 붙은 것이었다. 2025년 1월 3일부터 2월 28일까지 57일 분 이자 73만 2982원이 추가로 명시돼 있었다.
정 씨 측은 연금 삭감 및 명예퇴직금 환수 절차에 대한 법적 모순을 강조한다. 군인연금법 제38조에 따르면 현역 복무 중 사유로 금고 이상의 형을 받을 경우, 연금 급여액을 2분의 1로 삭감한다. 군인사법 제53조의 2(명예전역) 4항에 따르면 현역 복무 중 사유로 금고 이상의 형을 받은 경우에 명예전역수당을 환수해야 한다.

이 당시 복원된 비밀은 모두 시효가 지난 것으로 파악됐다. 이런 상황을 ‘현역 복무 중 사유’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는 상황이다. 재판 당시 핵심 쟁점도 재조명되고 있다.
법조계 한 관계자는 “이 사건은 군사기밀보호법 상 업무상 누설 혐의에 대해 군검찰이 무혐의 처분 소견을 서울중앙지검에 이첩한 것”이라면서 “그런데 서울중앙지검이 별건으로 기소를 해 정 씨가 유죄를 받은 사안”이라고 했다. 이 관계자는 “정 씨가 민간인이 아니라 군인 신분이었다면, 군검찰에서 무혐의로 종결됐을 사안”이라면서 “서울중앙지검이 정 씨를 별건기소한 부분은 공소권 남용에 해당하는 셈”이라고 했다.
법조계 또 다른 관계자는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혐의가 적용되려면, 군사기밀 누설 등으로 국가안보에 실질적인 위협이 있었음이 입증돼야 한다”면서 “정 씨 사건에선 10~20년 전 시효가 만료된 비밀이 포렌식을 통해 발견됐다는 이유로 유죄 판결이 났다. 굉장히 이례적인 사건으로 좋지 않은 판례로 남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앞서의 전직 정보기관 관계자는 “평생을 군에 헌신한 첩보장교가 전역한 뒤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은 것만으로도 엄청난 수치로 느껴질 것”이라면서 “여기다 연금이 삭감되고, 명예퇴직금까지 도로 내놓으라고 하면 살아온 인생 근간이 흔들릴 정도로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은퇴한 첩보원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그냥 죽으라’는 것과 다름없는 조치들”이라고 했다.

눈에 띄게 수척해진 정 씨는 “명예퇴직 대가로 받은 명예전역 수당은 남은 임기에 받을 임금보다도 훨씬 적은 금액이었다”면서 “명예퇴직 이후 5년 동안 진행된 형사재판을 위해 쓴 돈이 명예퇴직금보다 많다”고 토로했다.
정 씨는 “37년 동안 국가에 헌신했지만 남은 것은 없다”면서 “기밀 탐지·수집 혐의 유죄를 받으면서 명예도 사라졌고, 소송을 치르는 과정에서 돈도 사라졌다”고 했다. 그는 “몸과 마음 모두 지쳤다”면서 “인생의 의미가 부정되는 상황에서 뭘 더 가져가겠다는 것인지 막막할 따름”이라고 했다.
그는 “평생을 남북통일을 목표로 달려왔지만, 남은 것은 비밀 탐지·수집 혐의 관련 유죄를 선고하는 판결문과 돈을 도로 내놓으라는 독촉장뿐”이라고 하소연했다.
정 씨는 판결 이후 즉각적인 재심 청구를 준비하려 했다. 그러나 2024년 말 비상계엄 사태와 정보사를 둘러싼 각종 논란이 비화하면서 계획을 잠시 중단했다. 정 씨는 “내가 사랑하던 전 직장에 불이 났는데, 거기에 기름을 부을 수는 없었다”고 했다. 정 씨 측은 탄핵정국이 수습된 뒤 본격적으로 재심을 준비할 계획이다.
정 씨는 ‘연금 삭감’ 건과 관련해 군인재해보상연금재심위원회(재심위)에 심사를 청구했다. 재심위는 군인연금 급여 결정 이의사항에 대해 행정심판 기능을 수행하는 특별행정심판이다. 3월 6일 재심위에 정 씨 건이 상정됐다. 재심위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