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0년대 제주를 배경으로 제주에서 나고 자란 ‘요망진(똑똑하고 야무지다라는 뜻의 제주도 방언) 반항아’ 애순과 우직하게 애순만을 바라보는 ‘팔불출 무쇠’ 관식의 삶을 세월의 흐름에 따라 담아낸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에서 박해준은 중년부터 노년까지의 관식을 연기했다. 10대 소년부터 청년까지의 관식은 배우 박보검이 맡아 두 명의 배우가 한 명의 캐릭터를 시간의 흐름대로 연기하는 식이다. 드라마로 2인 1역은 첫 도전이었지만, 연출자 김원석 감독과는 앞서 세 작품을 함께해왔던 만큼 그 믿음을 바탕으로 대본도 받기 전부터 “무조건 출연할 것”이란 결심이 굳었다고 했다.
“저야 김원석 감독님의 작품 보시는 눈이 워낙 훌륭하다는 걸 아니까요. 제 안에선 그냥 ‘난 무조건 이 작품 한다’는 게 기정사실이 돼 있었어요. 사실 감독님이 드라마 ‘나의 아저씨’ 때 제 머리를 실제로 빡빡 밀었던 걸 너무 미안해하셨거든요(웃음). 그때 ‘내가 어떻게든, 캐스팅이든 뭐든 은혜를 갚을게. 꼭 잘되게 해줄게’ 이러셨는데 저는 속으로 ‘뭘 잘해줘, 본인이나 잘하시지’ 그랬어요(웃음). 그런데 진짜로 이렇게 좋은 작품에 캐스팅을 해주신 거죠. 그러니 이 자리를 통해 감독님께 그 마음을 내려놓으셔도 된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웃음). 이제는 제가 오히려 은혜를 갚아야 할 때니까요.”
박해준과 박보검이 연기한 관식은 어릴 때부터 노년까지 변함없이 과묵하면서도 믿음직스럽고, 어떤 말이나 행동도 허투루 하지 않는 단단함을 지닌 인물이다. 젊은 관식과 달리 세상 풍파를 어느 정도 겪은 중년 이후의 관식은 옛날에 비해 그럭저럭 말수도 늘고, 어떨 땐 불뚝 성질도 낼 수 있게 됐지만 촬영할 때만 하더라도 박해준은 이 인물이 너무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고 했다. 입이 무거운 만큼 가슴 안에 안고 살아야 할 아픔의 무게도 만만치 않았던 관식이 답답하면서도 안쓰러웠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그런 관식이 유일하게 제 감정을 다 펼쳐 보이는 인물은 그의 ‘영원한 첫사랑이자 끝사랑’인 애순이다. 그를 위해서라면 자기가 가진 것 이상의 모든 것을 퍼주고 싶어 했던 열 살 코흘리개는 불혹을 넘어 환갑을 지나고도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준다. 이처럼 사랑만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며 직진할 수 있는 관식을 두고 ‘만들어진 인물이기에 보여줄 수 있는 로맨스 판타지의 총집합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저도 사실 관식이는 판타지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했어요. 촬영하는 동안 ‘이런 사람이 어딨어, 누가 와이프한테 이렇게 해, 말도 안 돼!’ 이러면서 투덜거리고 있었거든요(웃음). 그런데 드라마를 보신 분들 중에 ‘우리 아빠가 생각난다’ 하시는 분들이 정말 많더라고요. 동네 모임에 어머님들을 만나면 다 자기 아빠가 생각난대요. 그걸 들으면서 ‘관식이가 이렇게 많았나’ 싶었는데, 반대로 생각해보면 관식이 같은 아빠가 있다는 건 또 관식이 같은 남편도 있다는 반증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자랑처럼 얘기하는 거지만 저희 와이프도 저한테 관식이 같은 면이 많다고 그랬어요. 포장하려는 게 아니라 진짜, 거짓말 아니에요. 사실 밖에서 저는 관식이처럼 안 보이고 싶어서 부끄러워하는데 그런 면이 되게 많다고 그러잖아요, 어쩌겠어요(웃음).”

“그 장면을 찍을 때 권투선수나 격투기 선수들이 하는 것처럼 체중 조절을 했어요. 촬영 날을 디데이로 삼고 일주일 전부터 준비했죠. 식사를 하지 않은 것도 그랬지만 물을 안 마신 채로 수분을 빼는 게 진짜 너무 힘들더라고요. 한 7kg 정도 뺐던 것 같은데, 힘들지만 그래도 그렇게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신을 찍는 당일에 제 외형도 그랬지만 눈빛부터가 이미 달라져 있었거든요. 정말 눈에 힘이 하나도 없었어요. 실제로는 몸에도 힘이 없어서 분장 버스 계단을 올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차더라고요. 누가 시킨 게 아니라 제가 감독님께 ‘해보겠습니다!’ 해서 한 거지만, 정말(웃음).”
4주 동안 시청자들을 흐뭇하게 웃음 짓게 하고, 동시에 펑펑 울게 만들었던 관식을 연기한 것에 박해준은 “모든 건 다 작가님과 감독님 덕”이라며 공을 온전히 제작진에게 돌렸다. 이미 다 차려져 있는 완벽한 테이블을 받아먹었을 뿐이라며 겸손해 하던 그는 젊은 관식과 애순을 연기한 박보검과 아이유 역시 그 테이블 위의 준비된 ‘메인 디시’였음을 강조했다. 이들이 없었다면 후반부의 관식을 제대로 그려내지 못했을 것이라는 게 박해준의 이야기다.
“저는 (박)보검이가 깔아준 판에 발만 얹었던 거죠. 이야기의 앞을 그렇게 잘 열어주다니, 저는 1막과 2막을 보면서 보검이를 향해 ‘정말 너무 고맙다’ 하고 있었다니까요(웃음). 사실 저는 보검이를 참고해서 연기했지만, 보검이는 아무런 데이터 없이 양관식을 만들었던 거니까요. 또 아이유도요. 뭘 하나만 던져도 리액션을 너무나 잘해주는 배우거든요. 대본 리딩 때 처음 만나서 목소리를 듣는 순간부터 ‘와, 이렇게까지 잘한다고?’ 감탄했어요. 금명은 금명대로, 애순은 애순대로 모두 책임지고 끝까지 해내는 게 정말 대견하더라고요. 현장에선 제가 정말 딸처럼 여기면서 만만하게 대했는데, 사실은 만만하게 대할 친구가 아니었던 거죠(웃음).”

“극단에서 뵀을 땐 멀찍이서 ‘문소리 선배님이다!’라면서 바라보기만 했거든요(웃음). 그런 선배님과 같이 호흡을 맞출 수 있다니, 영광스러우면서도 ‘선배님 저 잘해왔습니다’라며 인정받는 느낌도 들어요. 아무래도 어릴 때부터 쭉 알아왔던 것 자체가 이 작품을 하는 데도 도움이 많이 됐던 것 같기도 하고요. 애순과 관식이 50년을 지내오며 서로를 봐 왔던 것처럼 선배님도 제 어린 모습을 아시고, 저도 선배님이 어릴 때부터 연기하신 걸 봤으니까요.”
이처럼 배우 인생의 영광스러운 한순간을 기록한 ‘폭싹 속았수다’로 박해준은 양관식이란 새로운 인생 캐릭터를 얻게 됐다. 결말의 여운이 시청자들의 가슴속에 오래도록 머물 이 작품을 딛고 배우로서 박해준은 다시 차기작을 향해 발을 옮겨야 한다. 당장 4월 23일 개봉을 앞둔 영화 ‘야당’의 홍보 활동도 시작해야 하고, 올해 하반기 개봉으로 알려진 또 다른 영화 ‘정가네 목장’, 드라마로는 tvn의 ‘첫, 사랑을 위하여’와 디즈니+(플러스) 오리지널 ‘북극성’의 공개가 예정돼 있다. 쉼 없이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줄 준비가 된 박해준은 “제 인생 캐릭터가 양관식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관식이를 두고 제 인생 캐릭터라고 말씀해주시는 게 너무 감사해요. 2024년에도 ‘서울의 봄’으로 저를 많이 이야기 해주셨으니까, 이제는 또 다음 작품 좋은 것을 찾아 흘러가야죠. 반응 때문에도 그렇긴 하지만 사실 저는 요즘 들어서 제가 하고 있는 이 일이 정말 좋아요. 연기를 준비하는 것도, 현장에 있는 것도요. 예전에는 이것저것 신경 쓸 일이 많았다면 지금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이렇게 연기하면서 가족들도 챙기며 그렇게 단순하게 살고 싶네요(웃음).”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