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순이는 ‘우리 동네에 아주 요망진 기집애 하나 있어, 걔 보통 아니야’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캐릭터예요(웃음). 하지만 제가 연기해야 하는 중년 이후의 애순이는 또 정말 특별할 게 없는, 그냥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엄마죠. 인생의 봄과 여름에 휘황찬란하면서도 폭풍이 몰아치는 일상을 살았던 젊은 애순과 나중에 가을과 겨울을 맞이하는 나이든 애순이는 달라 보이지만, 그 안에 ‘오애순’이란 변치 않는 본질이 들어있어요. 캐릭터의 이런 개별성과 보편성, 두 가지를 잘 버무려내는 게 제 첫 번째 숙제였죠.”
‘폭싹 속았수다’의 애순은 제주에서 나고 자란 ‘요망진(똑똑하고 야무지다라는 뜻의 제주도 방언) 반항아’로, 언젠가 시인이 돼 섬을 나갈 것을 꿈꾸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혀 잠시 날개를 접게 된다. 대신 곁에서 그를 물심양면 받들며 애순이 품고 있는 ‘소녀의 세계’를 끝까지 지켜준 남편 관식(박보검, 박해준 분)과의 사이에서 세 아이를 낳아 기르며 ‘엄마 오애순’으로서의 역할을 묵묵히 해낸다. 중년부터 노년까지의 애순의 모습을 그려내며 문소리는 극 중 보이는 그의 손길 하나하나에 ‘인간 문소리’의 일상을 함께 담아냈다고 말했다.

캐릭터에서 스스로를 읽어내는 것과 동시에 문소리는 촬영하면서 문득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릴 때가 있었다고도 했다. 그렇게 ‘엄마의 눈’으로도 작품을 보게 된 덕인지, 자연스레 애순과 관식의 딸 금명(아이유 분)에게서도 진짜 딸 같은 대견함과 안쓰러움을 느꼈다. 금명은 유독 부모에게만 퉁명스럽게 굴어 시청자들의 분노를 산 ‘못된 딸’이었지만, 한편으론 없는 집안의 유일한 기둥으로 ‘개천에서 난 용’이 가질 수밖에 없는 크나큰 압박감에 시달리는 장녀이기도 했다. 정작 도움이 꼭 필요했던 순간엔 부모가 걱정할까봐 아무렇지 않은 척 혼자 속으로 삭이는 금명을 보며 문소리는 “정말 제 딸을 보듯 가슴이 너무 아팠다”고 회상했다.
“저는 금명이가 너무 빨리 철이 들었다는 게 안쓰러웠어요. 자기가 뭘 원하는지, 뭘 해야 하는지 아는데 동시에 부모가 뭘 원하는지도 잘 아는 아이죠. 과외 집에서 도둑으로 몰렸는데 엄마한테 전화하면서도 아무 소리 못 하는 신에서 정말 너무 가슴이 아프더라고요. 저도 딸이 있지만, 내 딸이 저런 일을 당하면 나한테 울고불고 얘기를 다 해줬으면 좋겠어요. 부모 앞에선 철없이 어리광도 부리고, 실없는 소리를 하는 것도 효도의 한 방법이거든요. 일찍 철이 들어서 부모님이 걱정할까 봐 아무 말도 안 하는 딸의 모습은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날 것 같아요(웃음).”

“촬영 전부터 아이유 씨와 둘이 이야기를 많이 해보려고 했어요. 같이 만나서 서로가 각자 캐릭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의견을 나눴죠. 아무래도 한 인물을 연기하는 것이다 보니 아이유 씨가 먼저 촬영한 부분을 제가 참고하기도 했고요(웃음). 촬영하면서도 느낀 거지만 아이유, 이지은이란 사람 자체가 워낙 야무지고, 단단하고, 책임감이 정말 넘쳐나는 친구예요. 저한테는 후배지만 보면서 ‘아휴, 저걸 어떻게 다 해내지?’ 싶을 정도로 대단하단 생각을 여러 번 했었어요. 물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요(웃음).”
남편으로 호흡을 맞춘, 이제 ‘국민 아빠’로 완전히 자리매김한 양관식 역의 박해준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극단 ‘차이무’ 시절부터 동경하던 무대 위의 선배와 같은 눈높이에서 호흡을 맞추게 된 것이 “너무나도 영광스러운 순간”이었다는 박해준의 앞선 찬사에 문소리 역시 “너무나도 귀한 배우”라고 맞받아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배우로서의 ‘원단’ 이야기를 하자면 문소리 역시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없는 그만의 질감을 가진 배우다. 2000년 영화 ‘박하사탕’으로 데뷔 후 문소리라는 배우를 세상에 완벽하게 각인해 낸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2002),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8), ‘관능의 법칙’(2014)과 드라마 ‘태왕사신기’(2007), ‘라이프’(2018), ‘퀸메이커’(2023)에 이르기까지 스크린과 안방극장을 가리지 않고, 문소리가 곧 장르가 되는 활약상을 펼쳐왔다. 이번 ‘폭싹 속았수다’로 또 한 번 ‘세상 유일한 문소리’를 증명해 낸 그가 찍어낼 다음 발자국에도 당연한 관심과 호기심이 모인다.
“언젠가 한 외국 감독님을 만난 자리에서 그분이 한국 여배우들과 작품을 하고 싶다고 하시기에 ‘한국 배우를 잘 아시냐’고 물어본 적이 있어요. 배우들 이름을 꼽으면서 ‘뷰티풀’(아름답다), ‘패뷸러스’(멋지다)하시다가 저한테는 ‘유니크’(독특하다, 유일하다)라는 거예요. 처음엔 ‘많은 형용사 중에 왜 나는 뷰티풀이 아니고 유니크야?’ 그랬는데(웃음), 두고두고 생각해보니 감사했어요. 만일 제게 선택권이 있었다면 저도 유니크를 골랐을 테니까요. 저는 자신에게 혹독한 편이지만, ‘이걸 이렇게 연기할 사람은 나밖에 없어’란 확신이 있거든요. 누구와도 다른 연기를 하겠다, ‘누가 해도 저렇게는 했겠지’ 싶은 연기는 안 한다는 마음으로요. 어쩌면 ‘유니크’는 제가 뿌린 씨일지도 모르겠네요(웃음).”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