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기업 풍토에서 미등기임원은 등기임원에 비해 오너(총수) 일가의 ‘권한’ 강화에 더 유용하다는 인식이 강하다. 오너 일가가 기업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지 않은 상태에서 미등기임원 제도를 이용해 각종 의무와 책임은 회피, 권한만 누리는 이른바 ‘그림자 경영’ 행태가 고착화되고 있다는 지적도 종종 나온다.

미등기임원은 책임에서 거의 자유롭다. 이사회 의결권이 없어 법적으로 일반 직원과 유사한 지위로 분류되지만 현실적으로는 임원 이상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다. 기업들은 여러 편의를 위해 미등기임원을 두고 있다. 경영상 필요한 전문 인력을 비교적 간편한 절차를 거쳐 고용·해고할 수 있어 등기임원에 비해 선호된다. 등기임원과 달리 상법상 임기에 제한이 없어 관련 업무 추진 기간에 따라 유연하게 인력을 쓸 수 있는 장점도 있다.
국내에서는 기업 오너가 미등기임원 신분으로 기업 경영에 실질적으로 관여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일감 몰아주기 등 사익편취 규제대상 회사에서 미등기임원 비율이 높다는 지적이 나온다. 오너 일가는 ‘명예회장’ ‘대표’ 등 직함을 쓰면서 그룹 전체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다.
기업분석연구소 리더스인덱스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자산 규모 5조 원 이상의 대기업집단 중 동일인이 자연인(특정개인)인 집단의 총수 78명 중 20명(25.6%)이 등기임원을 맡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삼성(이재용) △한화(김승연) △HD현대(정몽준) △신세계(이명희) △CJ(이재현) △DL(이해욱) △미래에셋(박현주) △네이버(이해진) △금호아시아나(박삼구) △DB(김준기) △에코프로(이동채) △이랜드(박성수) △한국타이어(조양래) △태광(이호진) △삼천리(이만득) △대방건설(구교운) △유진(유경선) △BGF(홍석조) △하이트진로(박문덕) △파라다이스(전필립), 총 20곳이다.
올해 대기업집단에 포함된 △LIG(구본상) △대광(조영훈) △사조(주진우) △빗썸(이정훈) △유코카캐리어스 중에는 LIG만 총수를 미등기임원으로 올려놓고 있다.
4대 그룹(삼성·SK·현대자동차·LG) 총수 중에는 삼성 이재용 회장이 유일하게 미등기임원 신분을 유지 중이다. 2019년 10월 등기임원 임기가 만료된 뒤 현재까지 등기임원으로 복귀하지 않고 있다. 이 회장의 삼성전자 등기임원 복귀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지만 사법리스크가 일부 남아 있어 당분간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이 회장은 삼성물산·제일모직 부당합병 및 회계부정 의혹과 관련해 1심과 2심에서 모두 무죄 선고를 받았지만 검찰이 상고해 대법원의 재판을 앞두고 있다.

정용진 회장은 지난 2월 모친 이명희 신세계그룹 총괄회장이 보유하고 있던 이마트 지분 10%를 2141억 원에 매입했다. 당시 이마트는 정 회장이 최대주주로서 성과주의에 입각한 책임경영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이에 정 회장의 이마트 등기임원 선임 여부에 관심이 집중됐지만 정 회장의 사내이사 선임 건은 상정되지 않았다. 업계에서는 정 회장이 이마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면서 경영 책임은 회피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신세계그룹은 이명희 총괄회장, 정재은 명예회장, 정용진 회장, 정유경 신세계 회장 등 오너 일가가 전부 미등기임원 신분이다.
이창민 경제개혁연대 부소장(한양대학교 경영대 교수)은 “오너 일가가 지주사나 그룹에서 힘을 싣고 있는 주력 계열사 등기임원으로 선임돼야 할 필요가 있다”며 “나머지 계열사에서는 미등기임원 신분을 유지하는 게 옳은 형태로 보인다”고 말했다.
황용식 세종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는 “국내 대기업들은 오너 일가가 높은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는 이유로 실질적으로 주요 의사 결정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며 “미등기임원 제도는 유발될 수 있는 경영상 실책과 이슈 등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 일종의 ‘꼼수’로 활용된다고 볼 수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등기임원들이 미등기임원의 눈치를 봐야 하는 형태가 고착화된 점도 비판할 문제”라고 덧붙였다.
정동민 기자 workhard@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