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 7월 19일 경북 예천 수해 실종자 수색에 투입된 해병대 1사단 소속 채수근 일병(상병 추서)이 급류에 휩쓸려 숨졌다. 해병대 수사단장이던 박정훈 대령이 채 상병 사망 사건 진상조사에 착수했다. 박 대령은 임성근 당시 해병대 1사단장을 비롯한 8명의 인물이 과실치사 혐의가 있다는 내용의 수사보고서를 올렸다.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 결재를 받았다.
수사보고서 언론 브리핑은 취소됐다. 이종섭 전 장관 지시였다. 박 대령은 이날 이후 유재은 전 국방부 법무관리관이 자신에게 수차례 죄명, 혐의자 혐의 내용을 빼고 일반서류로 넘기라고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김계환 전 해병대 사령관은 박 대령에게 “VIP(윤석열)가 격노하면서 장관과 통화한 후 이렇게 됐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한다. 윤석열 정부 붕괴의 시발점으로 평가되는 ‘VIP 격노설’이 불거졌다.
관련자들은 ‘VIP 격노설’을 부인했다. 이종섭 전 장관은 2023년 9월 4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 회의에서 대통령이 격노하거나 외압을 한 사실이 없다고 했다. 조태용 전 국가안보실장은 같은 해 8월 30일 윤 전 대통령이 이 사안에 대해 몰랐다고 증언했다. 김태효 전 국가안보실 1차장과 정진석 전 비서실장은 2024년 7월 국회 운영위원회 현안 질의에서 윤 전 대통령 격노설을 일축했다.

7월 11일 김태효 전 차장도 입장을 바꿨다. 김 전 차장은 윤석열 정부 실세로 꼽히는 인물이다. 김성한 전 실장 등 안보실장이 교체돼도 김 전 차장은 자리를 지켰다. 이 때문에 정치권에서는 김 전 차장이 막후에서 안보실장 역할을 맡고 있다는 뒷말이 나왔다. 김 전 차장은 특검 조사에서 윤 전 대통령이 채해병 사건 수사 결과를 보고받고 크게 화를 냈다는 취지로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검팀은 VIP 격노설이 불거진 2023년 7월 31일 대통령실 주제 수석비서관 회의 자료를 확보해 참석자 명단을 파악했다. 참석자는 김용현 전 경호처장, 조태용 전 국가안보실장, 김태효 전 안보실 1차장, 이충면 전 외교 비서관, 왕윤종 전 안보실 경제안보비서관, 임기훈 전 안보실 국방 비서관 등이다.
관련자들 진술이 뒤집히면서 윤 전 대통령에 대한 ‘직권남용 권리 방해 혐의’ 수사는 빨라질 것으로 보인다. 형법 제123조에 따르면 공무원이 자신의 직무상 권한을 넘어서는 행위를 했을 때 5년 이하의 징역,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1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질 수 있다.
#‘고립무원’ 윤석열
12·3 비상계엄 국무회의 관련 진술도 변하고 있다. 헌법 89조는 대통령의 계엄과 그 해제를 할 때 국무회의 의결을 거치도록 규정하고 있다. 헌법 82조는 대통령의 국법상 행위는 문서로써 하고 국무총리와 관계 국무위원이 부서(서명)한다고 규정한다. 국무회의는 관련 부처 협의, 협의한 의안 행안부 의정담당관실 제출, 국무회의시스템 등을 통한 회의 일정 공지, 의안 배부 및 회의록 작성 등의 절차를 거친다.
진술 번복 중심에는 강의구 전 대통령실 부속실장이 있다. 강 전 실장은 윤 전 대통령이 평검사 시절인 2006년부터 알고 지낸 측근이다. 강 전 실장은 비상계엄 선포 직전 열린 국무회의 회의록 초안을 허위로 작성했다는 의혹을 받는다. 초안에는 약 40분 동안 회의가 진행된 것처럼 작성됐다가 다시 수정됐다는 것이다.
강 전 실장은 사후 비상계엄 문건을 만들었다는 의혹에도 휩싸였다. 2024년 12월 5일 김주현 전 민정수석이 “대통령의 국법상 행위는 문서로 해야 하는데 비상계엄 관련 문서가 있느냐”고 문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자 강 전 실장은 국무총리와 국방부 장관의 서명란이 들어 있는 사후 비상계엄 선포문을 작성했다. 한덕수 전 총리는 해당 문건이 또 다른 논쟁을 낳을 수 있다는 취지로 폐기를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사후 비상계엄 문건 작성 의혹이 불거지자 강 전 실장은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강 전 실장은 2월 검찰 조사에서 해당 문건 작성과 폐기 모두 윤 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6월 30일 내란 특검(특검 조은석) 조사에서는 “문건을 폐기한 뒤 윤 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자신의 판단으로 문건을 폐기했다는 것이다. 특검팀은 윤 전 대통령 변호인인 채명성 변호사가 입회한 뒤 진술이 번복됐다는 점에 주목했다. 윤 전 대통령 측이 강 전 실장을 회유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윤 전 대통령 체포 저지에 앞장섰던 김성훈 전 경호처 차장은 7월 3일 특검 조사에서 진술을 뒤집었다. 김 전 차장은 윤 전 대통령 측 변호사들이 조사에서 빠지자 윤 전 대통령에 불리한 진술을 시작했다고 한다. 내란 특검이 청구한 윤 전 대통령 구속영장에는 “경찰은 전문성도 없고 총은 경호관들이 훨씬 잘 쏜다” “총을 갖고 있다는 걸 좀 보여줘라” 등 윤 전 대통령이 김 전 차장에게 내린 지시가 담겨 있다.
특검팀은 강 전 실장 입장 번복 등을 근거로 윤 전 대통령 측이 사건 관계인들에게 회유·압박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구속 수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특검팀은 계엄 사후 문건 파기에 대해서는 허위공문서작성, 허위공문서행사, 대통령기록물법 위반, 공용서류손상 등의 혐의가, 체포 저지 지시에 대해서는 특수공무집행방해 등의 혐의가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특검이 확보한 국무회의 촬영 CCTV에는 한 전 총리가 다른 국무위원 자리에 놓여 있는 문건과 접견실에 있는 문건을 모두 챙겨 나오는 장면이 담긴 것으로 전해졌다. 대국민 담화문으로 추정되는 5장의 문서를 살피는 모습도 촬영됐다고 한다. 이 전 장관도 국무회의가 끝난 뒤 3장짜리 문건을 한 전 총리와 함께 보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확인된 것으로 알려졌다. 두 사람의 주장과 반대되는 물증이 확보된 셈이다.
이 같은 측근들의 이탈은 윤 전 대통령이 자초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윤 전 대통령은 2024년 12월 7일 대국민담화에서 “이번 계엄선포와 관련해 법적, 정치적 책임 문제를 회피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윤 전 대통령은 탄핵 심판 때 비상계엄에 가담한 부하들의 발언을 거짓 또는 음모라고 말했다. 7월 9일 구속 전 피의자 심문에서도 비상계엄 사후 문건은 폐기 의혹, 경호처 총기 노출 지시 등 혐의를 대부분 부인했다.
이어 윤 전 대통령은 “국무위원들조차도 다들 자기 살길 찾아 떠났다”며 “아무도 내게 오려고 하지 않는데 내가 누구를 압박하겠느냐”고 발언한 것으로 전해졌다. 변호사를 구할 돈도 없는 ‘고립무원’의 상황이라고 호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헌법재판소 헌법 연구관을 지낸 노희범 변호사는 모든 혐의를 부인하는 윤 전 대통령에 대해 “윤 전 대통령 입장에서는 인정을 하나 안 하나, 협조를 하나 안 하나 (내란죄 최소 형량이) 무기징역”이라며 “이 상황에서 (범행을) 인정하면 더 바보가 될 것이다. 진술한다고 해서 특검이 용서해 줄 것도 아니다”고 분석했다.
이강원 기자 2000won@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