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모든 것을 봅니다.”
‘오이디푸스 왕’에서 내 눈을 반짝이게 했던 코로스의 노래였다. 그 환상 같은 시간 속에서 우리가 배운 것, 배워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문형배 전 헌법재판관은 ‘호의’를 강조했다.
“나를 여기에 이르게 한 것은 내가 아니에요.”

한 생명이 살아가는 것은, 강조할 필요도 없다, 만 생명의 은혜다. 일찍이 서정주 시인이 말하지 않았나. 나를 이룬 것은 팔 할이 바람이었다고. 지금 그대가 그 자리에 서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바람이 지나갔을까. 그중 호의의 바람을 기억하여 감사하는 일은 그 개인의 복이기도 하고, 그가 성숙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 그것은 그가 또 그런 호의를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느 사이 문 전 재판관은 우리 사회의 등대가 되어있다. 그 등대에서 나오는 빛은 묘하게도 상식에서 온다.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그의 책, ‘호의에 관하여’를 읽으며 경쟁사회에서 우리가 놓쳐버린 상식의 힘을 다시 한 번 상기할 수 있었다.
헌법재판관이 되기 전 그는 지방 판사였다. 부산경남에서만 근무하는 그를 두고 동창 중엔 서울에서만 맡을 수 있는 큰 사건을 경험해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지적하는 이들이 있었나보다. 그가 말한다.
“재벌 사건은 큰 사건이고, 재산 없는 시골사람의 사건은 작은 사건인가요? 재판받는 사람들에겐 그것이 전부인 거예요. 저는 서울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에 대해 콤플렉스가 없었어요.”
우리가 평정심을 잃고 헛손질하는 것은 언제나 스스로 ‘큰 사건’이라고 믿고 있는 사태 속에서다. 마음에 힘이 생기면 큰 사건도 크지 않고 작은 사건도 작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같다. 그래야 소위 ‘큰 사건, 큰 권력’ 앞에서 저울질하지 않을 수 있고, 소위 ‘작은 사건, 존재감 없는 사람’ 앞에서 함부로 하는 것을 멈추게 된다.
4월 4일, 그날. 그날의 탄핵심판은 어쨌든 큰 사건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 사건 앞에서 눈치 보지 않고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크고 작은 일이 없다는 그의 철학 때문이었을 것이었다.
‘호의에 관하여’에는 그가 읽은 책들에 대한 짧은 단상들도 많다. 그 단상 중에 “불의는 인간적이다. 그러나 더 인간적인 것은 불의에 맞서 싸우는 것”이라는 브레이트 문장이 눈에 띈다. 그 문장을 곱씹으며 그가 말한다.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불의를 묵과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 인터뷰에서 질문자가 탄핵된 전 대통령에 대해 이렇게 물었다. 그런 역량과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대통령이 된 것은 우리의 민주주의가 그만큼 취약했기 때문이 아니겠냐고. 그의 대답이 빛난다.
“민주주의는 무오류가 아닙니다. 자정능력을 가지고 있어요. 민주시민이 극복했습니다, 3년 만에. 우리의 민주주의가 그만큼 힘을 가진 것입니다.”
그는 늘 일기인지, 기록인지 모를 글을 쓰는 것 같다. 그날 중요했던 일, 그가 읽었던 책에 대한 단상, 그가 그런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 말한다.
“기록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 10년 지나서 내가 삶을 제대로 살아가고 있나 없나를 따져볼 때 내가 썼던 글이 잣대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다.”
참 단단한 사람이다.
※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 master@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