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메모리 개발업체 멤레이가 지난 9월 미국 텍사스 동부지방법원에 HPE를 상대로 특허 침해 소송을 제기했다. 쟁점이 된 특허는 전원이 꺼져도 데이터가 남는 비휘발성 메모리(NVM)와 그래픽처리장치(GPU) 또는 보조프로세서 간 데이터 전송 효율화 기술 2건이다. 멤레이는 HPE가 데이터 전송 과정에서 자사 특허 기술을 침해했다고 주장했다.
일반적으로 그래픽이나 영상 등 복잡한 계산을 담당하는 GPU는 SSD(NVM을 활용한 고속저장장치)에 저장된 데이터를 불러와 처리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데이터가 여러 번 복사되고 커널 공간(운영체제가 직접 관리하는 영역)과 사용자 공간(응용프로그램이 작동하는 구역)을 넘나들면서 지연이 발생한다. 멤레이가 보유한 특허는 GPU가 SSD 데이터를 운영체제의 개입 없이 바로 읽고 쓸 수 있도록 바꿈으로써 이런 비효율을 크게 개선한 기술로 파악된다.
해당 특허들은 카이스트의 정명수 교수팀이 발명하고 멤레이와 연세대학교 산학협력단이 2016년과 2018년 공동출원했다. 멤레이는 이번 소송에서 HPE를 상대로 영구적 사용 금지 명령과 로열티, 징벌적 손해배상 등을 청구했다. 소장에서 멤레이는 HPE가 문제의 특허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도 특허권자의 허가나 라이선스 없이 해당 기술을 무단으로 도용했다고 주장했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데이터 전송 효율을 높이는 기술이라면 서버 전체 동작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적용 범위가 넓어질 수밖에 없다”며 “HPE의 다양한 제품에 해당 기술이 쓰였다고 판단되면 배상 규모도 커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실제 멤레이가 이번 소장에서 침해 대상으로 지목한 제품군은 매우 광범위하다. 특정 모델에 한정되지 않고 HPE의 서버, 스토리지, 슈퍼컴퓨팅 등 주요 시스템 전반을 포괄한다. 프로라이언트(ProLiant)뿐 아니라 아폴로(Apollo), 알레트라(Alletra), 크레이(Cray) 등 주력 모델 30개 이상이 침해 제품군에 포함됐다.
초기 단계에서 가능한 한 많은 제품군을 침해 대상으로 지정해 두고, 재판이 진행되면서 실제 침해가 입증되는 모델만 남기는 전략을 쓴 것으로 분석된다. 이 경우 HPE는 모든 제품에 대한 기술 문서와 소스코드, 하드웨어 아키텍처를 제출해야 해 방어 부담이 크게 커진다. 사실상 합의를 압박하는 형태의 소송 패턴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준석 로한국제특허법률사무소 대표는 “소송 대상 중 하나라도 침해로 인정되면 원고 입장에선 성공한 셈이지만 피고 입장에서는 일일이 침해 여부를 검토하고 대응할지 말지 검토하는 데만 막대한 비용이 든다”며 “미국은 디스커버리(증거 개시) 제도 때문에 특허 침해 여부를 판단하려면 영업비밀 수준의 내부 자료까지 제출해야 하는 점도 피고 기업엔 큰 부담이다. 단종된 구형 제품이라면 손해배상으로 끝날 수 있지만, 현재 판매 중인 최신 제품이라면 판매 중단 위험까지 감수해야 한다”라고 설명했다.
공우상 공앤유특허사무소 대표변리사는 “몇 천억 원대 배상까지 염두에 두고 소송을 제기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정도로 광범위한 제품군을 대상으로 소송을 걸려면 원고 측도 상당한 비용이 든다”며 “미국에는 소송 자금을 투자하는 기업들이 많기 때문에 원고도 외부 자금 지원을 받아 소송을 진행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이를 바탕으로 일부 침해만 인정돼도 큰 금액의 합의나 배상을 노릴 수 있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HPE는 최근 약 140억 달러(약 20조 원)에 달하는 주니퍼네트웍스 인수를 마무리하며, 시스코(44%)에 이어 24.5%의 점유율로 글로벌 무선랜 시장에서 입지를 굳혔다. HPE는 엔비디아와 협력해 AI 전용 슈퍼컴퓨팅 시스템을 공동 개발 중이며 최근에는 주력 서버 사업을 인공지능(AI)과 네트워킹 중심으로 재편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소장에는 AMD, 인텔, 엔비디아 칩이 탑재된 서버 제품군이 침해 대상으로 지목되면서 향후 사업에도 파급력을 미칠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종환 교수는 “AI 반도체는 학습된 데이터를 반복적으로 불러와 개선하기 때문에, 이를 빠르게 처리할 수 있는 구조가 중요하다. 데이터 처리량이 과거보다 크게 늘면서 처리 속도가 핵심 경쟁력이 됐기 때문”이라며 “AI 시대에 데이터 전송 효율화 기술은 핵심 기술이 됐기 때문에 파장이 클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번 건은 멤레이의 첫 특허 소송이다. 멤레이의 미국 현지법인은 2024년 12월 설립됐으며, 2025년 7월 계쟁 특허를 양수한 뒤 약 두 달 만에 소송을 제기한 것으로 파악된다. 청구 내용에서도 금전적 보상을 중심으로 하고 있어, 특허 수익화를 목적으로 한 NPE 활동으로 해석된다는 분석이 나온다. 첫 소송 대상이 글로벌 IT 기업인 만큼 향후 추가 움직임에도 관심이 쏠린다.

국내 NPE들이 최근 해외 소송 활동이 점점 활발해지는 추세다. 지난 6월 미국 통신사 버라이즌(Verizon)을 상대로 첫 소송을 제기하며 등장한 국내 NPE 옵팀넷(Optimnet)은 최근 미국의 시스코를 상대로 두 번째 소송을 제기했다. 분쟁 특허는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이 보유한 네트워크 보호 및 인프라 관련 표준 특허 5건으로, 표준기술을 기반으로 한 라이선스 분쟁의 성격이 짙다.
올해 등장한 또 다른 국내 NPE 에스텔지아(Estelgia)는 지난 5월 대만 에이서스텍(ASUS) 등 4개사를 상대로 미국 델라웨어 법원에 다중 대역 무선 RF 통신 관련 특허 침해 소송을 제기했다. 이어서 올해 세 번째로 새로 등장한 하잎아이피(Hyip IP)는 7월 자회사를 통해 미국 텍사스 서부지방법원에 마이크로소프트를 상대로 광통신 관련 특허 침해 소송을 제기했다.
한국 최초의 NPE로 꼽히는 인텔렉추얼디스커버리(ID)도 최근 글로벌 기업들을 상대로 잇단 소송을 이어가고 있다. 미국 자회사 카이피(KAIFI)를 통해 구글과 애플을, 또 다른 자회사 밸류8(Value8)을 통해 포드와 볼보를 상대로 특허 침해 소송을 제기했으며, 일부는 합의 종결된 것으로 파악된다. 국내 NPE들이 본격적으로 미국 시장을 무대로 소송 활동을 확대하면서, 한국의 지식재산(IP) 생태계가 단순 방어형에서 수익 창출형으로 전환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공우상 변리사는 “미국 NPE들이 선두주자로 나선 뒤, 우리나라는 그 흐름을 보면서 후발주자로 적극 뛰어드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는 “처음엔 해외 기업들에 당하는 입장이었지만, 특허 수익화가 실제로 돈이 된다는 걸 확인한 뒤 국내에서도 NPE를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늘었다”며 “한국은 시장 규모는 작지만 기술력 있는 기업이 많아 NPE 활동을 하기 좋은 토양이 이미 마련돼 있다”고 설명했다.
IP업계 다른 관계자는 “기업들이 자체적으로 특허 수익화를 전담하는 회사를 통해 방어와 공격 양측 역할을 맡기기도 한다. 특허 분쟁 대응과 동시에 수익 창출을 목표로 하는 구조”라며 “예전에는 NPE를 ‘특허 괴물’로 부정적으로만 봤지만, 최근 국내에서는 지식재산을 적극적으로 수익화하려는 흐름으로 인식이 바뀌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도 이미 이런 추세가 자리 잡았고, 국내에서도 NPE 활동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는 분위기”라고 덧붙였다.
김정민 기자 hurrymin@ilyo.co.kr














